Potrait of Helene Klimt
Oil on board, 1898 60 X 40 cm
Artist : Gustav Klimt (1862 - 1918 )
한시대를 살아 가면서 우리의 삶이 건조하지 않고, 즐겁고 윤택한 삶이 되는 이유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과 내가 함께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양의 돈키호테와 로시난테(는 사람이 아니군요^^;), 헬렌켈러와 설리번, 동양의 오성과 한음이라는 멋진 동반자 이야기가 전해지듯 말입니다.
이번 리뷰의 주인공인 Minerva 의 Pythagore 를 보면서 느낀 감정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처음부터 어색함 없이 이 친구를 맞이 할 수 있었죠. "멋지다.", "포스있다.", "혁신적이다." 라는 미사여구가 항상 따라붙는 오늘날의 시계들과는 사뭇 다른 색깔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앤틱과 모던의 중간에 서있는 듯한 인상, Pythagore의 다이얼입니다.
무브먼트로는 미네르바 고유의 Cal. 48 을 쓰고 있습니다. 이 무브먼트는 Andres Frey가 1943년에 제작한 인하우스 무브먼트 인데요. Frey 는 해외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미네르바를 대표할만한 무브먼트를 많이 디자인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Venus Caliber 175와 Cal.48가 대표적이죠. Frey가 미네르바에 남긴 명기중 하나가 Minerva라는 이름 안에, 고동치고 있습니다.
Cal. 48 무브먼트의 사진입니다. 위 사진에서는 스완넥 레귤레이터가 보이지 않지만, 리뷰의 그것은 멋진 스완넥을 가지고 있답니다.
(무브먼트 사진 출처는 퓨리스츠입니다.)
인하우스 자사 무브먼트의 특별함을 기대하셨던 무브 매니아분들께는 다소 실망스러운 구조일지 모르겠습니다. 배럴 배치와 2번, 3번, 4번 기어, 팔렛포크, 밸런스까지 기본에 충실한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일정 간격으로 균형있게 떨어진 브릿지와 그 위로 물결치는 제네바 스트라이프, 무브먼트 아래로 보이는 페를라쥬와 스크류밸런스는 그 정성과 미적 요소만으로도 Cal. 48이 '인하우스 무브먼트'라는 명찰을 달아 마땅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스크류 밸런스입니다. 밸런스 아래로 미네르바의 상징인 화살표 각인이 보이는군요.
(무브먼트 사진출처: 퓨리스츠)
무브먼트는 시간당 18,000 진동하는 슬로우 비트 무브먼트 입니다. 슬로우 비트의 가장 큰 장점은 마모가 적고 오래 쓸 수 있다는 점이 있죠. 하지만 비트에러에 민감하고 오차가 나기 쉽다는 조건 때문에, 심혈이 담긴 조정을 필요로 합니다. 당연히 이 시계의 오차상태는 훌륭했고, "역시 미네르바구나"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처음 이 시계를 접했을 때 느낌은 평범했습니다. 지극히 평범해서 되려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고나 해야할까요. 현행품들처럼 확 잡아 끄는 매력도 아니었고, 빈티지처럼 숙연해지는 그런 맛도 없었습니다. 다만, 어떤 곳에, 어떤 상황에 놓아도 무난하게 매치될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이얼은 검은듯 하면서도 녹색의 기운을 띄고 있고, Hour Index 는 둥글둥글하면서도 각이 잡힌 배치로 차분한 느낌을 줍니다.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핸즈는 Skelett Form 을, 글라스는 돔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Rolex 의 돔형 글라스와는 다른 느낌의 돔형 글라스입니다. 콘텍트 렌즈같은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 이 두가지 특징은 현행품 시계에서 만나기 힘든 성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핸즈는 처음에는 어색해 보이지만, 금방 적응이 되어 광원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돌려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유광 핸즈는 낮에는 빛을 듬뿍 담은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밤에는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야광을 선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시계를 볼 때 정성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짐작하면서 감동을 받는 편인데, 살짝 굽은 핸즈는 이러한 감동을 증폭시켜주는 행복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피뢰침 같이 얇게 올라오는 핸즈의 마무리는 이 시계의 거부할 수 없는 큰 매력중 하나입니다.
돔형 글라스는 무반사 코팅이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요즘에 나오는 대부분의 시계와는 사뭇 다른 선택이죠. 이 때문에 아쉬워 할 매니아분들이 계실 수 있겠습니다만, 무반사 코팅은 되어있으면 좋고 안되어있으면 아쉬운 요소입니다. 즉, 시계 구입의 기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죠. Pythagore는 이런 특성을 잘 알고 훌륭한 선택을 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광 케이스와 조용한 디자인에 시원한 무반사 코팅은 어색한 조합이 되었을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아무런 처리가 되지 않은 돔 글라스를 선택함으로서, 무광의 케이스와 글라스를 주변 사물과 어색함 없이 어우러지게 하는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어떤 팔뚝의 어떤 색깔의 손목에도 자연스러운 매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무광 케이스와 자연스러운 형태의 돔형글라스는 시계 전체에 통일감을 부여합니다.
이 시계의 사이즈는 38mm 로써, 오늘날의 시계들에 비해 작은편입니다. 하지만, 실제 생활하면서 옷과 분위기를 시계와 매치해보기엔 무난한 사이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 의류를 제외한 정장, 캐쥬얼 모두 부드럽게 소화해냅니다. 오늘날의 시계들이 주인의 인상, 분위기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 시계는 주인이 하자는 대로, 입는 대로 부드럽게 따라가는 특징의 시계라 정리 할 수 있겠습니다.
화살표 모양의 용두가 보입니다.
지혜의 신 미네르바, 브랜드 미네르바 그리고 화살표..
조작 방식은 매우 간단합니다. 타임온리 수동 무브먼트기에, 용두를 다 밀어넣은 상태에선 수동감기 기능을, 용두를 1단으로 빼면 시간 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간 조정을 할 때의 느낌은 상당히 부드러웠으며, 사용자의 컨트롤에 잘 반응해 주었습니다. 간혹 시간을 조정하는데 가벼운 유격이 있어서 미세 조정에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이얼에는 각 분(minute) 사이마다 눈금이 하나씩 더 있어서, 시간을 30초 단위로 세세하게 조정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수동감기의 경우 부드럽게 감기는 편이었으며, "차라락" 하며 감기는 손맛이 좋습니다. 용두의 크기도 수동감기를 시도하는데 무리없는 적당한 사이즈입니다. 와인딩에 대한 텐션도 민감하게 느낄 수 있어서, 풀와인딩이 아니어도 와인딩 상태가 어떤지 직감적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수동시계를 선호하는 매니아들의 입맛을 맞춰주기에 충분한. 수동 시계의 매력을 함빡 담아낸 시계라는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제가 서두에 '동반자 같다.'라고 이 시계를 평가 하였었는데, 그 이유를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것 같군요. 이 시계는 상당히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무광 케이스에, 유광 케이스백을 선택하였다는 것 입니다.
실물은 사진보다 조금 더 투박한 형태의 무광 케이스를 하고 있습니다.
유광 케이스백 역시 사진보다 그 광택의 정도가 있는 편입니다.
유광과 무광의 조화는 다른 시계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조합이긴 합니다. IWC의 포르투기스 7 Days나, 파텍필립 노틸러스의 케이스 디자인이 대표적이죠. 하지만 위의 시계들은 다이얼이나 옆면에서 유/무광 케이스 조합을 찾아 볼 수 있는 반면, Pythagore 는 단지 케이스 백만 유광입니다. 다분히 의도적이죠. 미네르바가 케이스 재고가 없어서 다른 모델의 케이스백을 채운 거라는 재밌는 추측도 할 수 있지만,( 네, 개그한거 맞습니다. 처참하게 실패했네요.- _-; ) 제가 알아본 Pythagore 모델들은 모두 무광 케이스에, 유광 케이스백을 하고 있습니다.
유광 / 무광의 케이스를 접해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사진으로 보이는것보다 유광과 무광의 차이는 큽니다. 무광은 생각보다 더 투박해 보이고, 유광은 생각보다 더 미끈해 보입니다. 이러한 특성을 생각 할 때, Pythagore 는 어색해 보인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조적인 두 모습이 한 시계 안에 있기에, 다소 이상해 보이실 수도 있죠.
하지만, 실물을 보시면 이러한 대비는 '거부감'이 아닌 '조화의 미'로 다가옵니다. 단아한 얼굴이 지루할 때, 심심하거나, 휴식할 때 시계를 벗어서 무브먼트를 볼 때면, Pythagore는 다이얼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열어줍니다. 시스루백이라는 선택이 사용자만을 위한 장인의 배려라고 생각한다면, 무광 케이스에 유광 케이스백이라는 선택은 오롯이 사용자를 위한 배려라는 추가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유광의 케이스백은 아름답게 빛나는 무브먼트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도록 보완해줍니다.
겉모습은 도도하고 조용해 보이지만, 주인에게는 모든 면을 허락한다고 할까요. 평범한 이야기를 할 때는 부드럽게, 속 마음을 얘기할 때는 거짓없이 그 속을 활짝 열어 보이는 친구같습니다.
미네르바. 이 브랜드는 그 숨이 다하기 전까지, 마지막 시계까지도 온정을 담아 제작하였을 것 입니다. 이 시계 역시 그들의 온정이 담긴 시계 중 하나겠지요.
갑자기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웠던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소통하는 매개체다.'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미네르바의 작품을 통해, 장인과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계를 착용하고 바라보며, 밥을주고, 생활하면서 본능적으로 대화를 했고. 무브먼트를 조사하고, 아름다움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 보면서 한번 더 대화를 나눴습니다.
무광·유광 케이스의 조합 역시 리뷰에서는 사소하게 다뤄졌을 수도 있으나, 이 사실을 발견했을 당시에는 몸이 떨릴 정도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런 의도치 않은 발견 하나 하나가 사용자에게 있어서는 보물찾기 같은 감동의 요소가 될것입니다. ( 미네르바의 보물 하나는 제가 찾은게 되어버리는군요. ^^; )
이제는 새로운 얼굴로, 새로운 디자인으로 미네르바와 소통할 수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 하는 추억의 브랜드로 남았기에.
지금 저는 시계를 잠시 내려놓고, 빠진 이야기는 없는지, 더 들어야 할 이야기는 없는지 조용히 눈을 감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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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시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