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스 메카니카 스페로 투르비용
2012년 선보인 스페로 투르비용은 예거 르쿨트르가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두 개의 키워드를 하나로 융합한 모델입니다. 2004년 독립제작자(토마스 프리셔)가 아닌 시계 메이커로서 프랑크 뮬러와 함께 자이로투르비용 I으로 다축 투르비용을 선보인 이래 가장 발전된 형태의 ‘다축 투르비용’과 2007년 듀오미터 크로노그래프로 보여준 새로운 메커니즘인 ‘듀얼 윙 컨셉트’를 하나의 모델로 완성한 것이죠.
듀얼 윙 컨셉트는 두 개의 두뇌 혹은 두 개의 심장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저는 후자로 표현합니다. 듀얼 윙 컨셉트의 구조를 간단하게 말하면 두 개의 배럴과 두 개의 기어트레인이 하나의 밸런스를 공유합니다. 음. 공유라기 보다 공통의 컨트롤 타워(밸런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듯싶은데요. 독립된 두 개의 파워가 하나의 컨트롤 타워로 제어되는 무브먼트를 말합니다. 듀얼 윙 컨셉트의 첫 모델인 듀오미터 크로노그래프는 이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 모델인데요. 하나의 배럴과 기어트레인은 시간 표시, 다른 하나는 크로노그래프를 담당합니다. 보통의 크로노그래프는 클러치를 통해 시간 표시를 하고 있는 기어트레인에 크로노그래프의 기어트레인을 연결하고 떼는 메커니즘이죠. 이것은 평소 시간 표시만을 할 때에 비해 크로노그래프를 작동시키면 감당해야 하는 힘이 더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때의 증상(?)으로는 밸런스의 진동각이 떨어진다거나 파워리저브가 줄어든다거나 하는데, 진동각이 떨어지는 것은 정확성에 좋지 못한 영향이 될 수 있습니다. ‘크로노미터’는 기계식에서 여전히 심도 있게 고려해야 할 주요 요소로, 듀오미터 크로노그래프는 각각의 독립적인 배럴과 기어트레인이 있어 크로노그래프를 작동하더라도 시간 표시에 부담이 더 걸리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더욱 높은 수준의 크로노미터를 이룰 수 있다는 접근인 것이죠. 자동차로 예를 들면 가파른 한여름 땡볕에 언덕을 올라갈 때 에어컨을 켜면 자동차의 출력이 약해지는 것과 비슷하지 싶습니다. 듀오미터 방식의 자동차는 에어컨만 구동하기 위한 별도의 배터리를 가진 것이고요.
듀얼 윙 컨셉트는 듀오미터 이후 크로노그래프 이외의 모델에 적용됩니다. 문 페이즈와 데이트, GMT, 투르비용, 그랑 소너리인데 크로노그래프 만큼 듀얼 윙 컨셉트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랑 소너리 그 다음으로 투르비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듀얼 윙 컨셉트가 적용된 투르비용인 스페로 투르비용은 듀얼 윙 답게 두 개의 배럴이 확인됩니다. 무브먼트를 보면 두 개의 배럴이 대칭하는 것이 보이죠. 친절한 예거 르쿨트르는 스페로 투르비용의 각 배럴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배럴 위에 ‘Regulateur(레귤레이터)’와 ‘Heuers Minutes(시간, 분)’로 각인을 했습니다. 즉 하나의 배럴은 투르비용 케이지의 회전에 다른 하나는 시간 표시에 관여합니다. 덕분에 스페로 투르비용은 다른 투르비용에 없는 기능을 갖추게 되는데요. 인스턴트 리스타트 플라이백이라는 다소 긴 이름의 기능으로 케이스 2시 방향이 버튼을 누르면 케이지가 계속 회전 중인 상태에서 초침을 0으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번 SIHH에서 랑에가 1815 투르비용으로 제로리셋 메커니즘의 투르비용을 선보였는데요. 1815 투르비용의 경우 원 미니트 투르비용에 초침을 올린 것이라 케이지에 직접 스토퍼를 건 뒤 이를 0으로 돌리는제로 리셋 방식입니다. 스페로 투르비용과 방식에서 차이가 있는데 어느 것이 더 뛰어나다 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둘 다 제로 리셋이 가능한 소수의 투르비용입니다. 제로 리셋은 아주 정확한 시간을 세팅하고자 할 때 필요합니다. 핵 기능 보다 진보한 제로 리셋, 즉 인스턴트 리스타트 플라이백은 분침을 분 눈금에 일치하게 맞춘 뒤 버튼을 누르면 그만입니다. 핵이라면 초침이 12시 방향에 올 때까지 기다려 크라운을 재빨리 당겨야 같은 제로 리셋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크라운 포지션은 0, 1, 2의 삼 단계로 0에서 수동 감기, 1에서 시침 단독 조정, 2에서 시간 조정입니다. 시침 독립구동의 GMT와 같은 방식이라고 할 수 있죠. 크라운을 포지션 0에 두고 감아보면 비교적 가볍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항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데요. 스페로 투르비용이 예전에 월드투어를 했을 때 만져봤던 느낌과 좀 다릅니다. 그 때는 상당히 무거운 크라운 감촉이었으니까요. 파워리저브의 잔량 차이 때문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 격차가 좀 크다 싶습니다. 와인딩을 하면 1시와 5시 방향에 있는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가 움직입니다. 1시 방향에는 레귤레이터라고 표시된 파란색 바늘, 5시 방향 시간이라고 표시된 곳은 은빛 바늘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듀얼 윙 컨셉트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시리즈 내내 사용하는 기법입니다. 파란색 바늘은 6시 방향의 초침, 은빛 바늘은 12시 방향의 24시간 표시와 시, 분침에 사용되는데요. 동력과 구동계의 독립성과 어떻게 배분했는지 나타냅니다. 크라운 포지션 1에서는 시침만 앞, 뒤로 조작할 수 있습니다. GMT 방식의 조작계의 경우 별도의 날짜 조정 포지션이 없는데요. 시침을 계속 돌려서 날짜를 바꾸게 됩니다. 날짜는 시, 분침의 작은 다이얼을 감싸는 알파벳 ‘C’를 180도 돌린 윈도우에서 표시하는데 시침을 계속 돌려 날짜 표시의 마커를 위치 변화시킵니다. 이 때 여느 GMT 워치처럼 12시 방향의 24시간 표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크라운 표지션 2에서 시간을 돌리면 이 때 24시간 표시도 함께 돌게 되죠.
다이얼 9시 방향 묵직하게 회전하는 케이지는 스페로 투르비용이 듀얼 윙 컨셉트와 함께 보여주고자 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입니다. 2개의 축을 지닌 2축 투르비용으로 케이지는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 직전의 회전을 보여주는 팽이와 같은 움직임입니다. 케이지는 20도 정도 기울어진 상태로 회전하는데 이것은 그루벨 포시의 30도 투르비용처럼 수직, 수평 어떤 포지션에서도 중력의 영향을 최대로 받지 않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노린 것 같습니다. 30초에 한번 수평 회전하는 첫 번째 축 + 15초에 한번 회전하는 20도 기울어진 두 번째 축 + 실린더 형태의 헤어스프링은 투르비용이 만들어지게 된 목적인 중력상쇄를 초과 달성하지 싶습니다. 계속되는 입체적인 위치 변화로 중력이 걸릴 틈을 주지 않는 거죠.
다이얼은 3에서 9시를 관통하는 선을 기준으로 대칭을 그립니다. 듀얼 윙 컨셉트 무브먼트의 특징이기도 한데요. 케이지를 위해 도끼날 형상으로 절개한 다이얼 아래에는 무브먼트의 메인 플레이트가 드러납니다. 예거 르쿨트르는 컴플리케이션 모델에 한해 브라스에 로듐 도금을 하는 스위스 스타일이 아닌 니켈 실버(저먼 실버)로 플레이트와 브릿지를 만드는데 스페로 투르비용도 그러합니다. 케이스 백을 보면 노란색을 머금은 은은한 은빛 플레이트가 확인되는데요. 날개를 펼친 새의 실루엣 같은 투르비용 브릿지. 여기서 새의 머리처럼 돌출된 부분을 중심으로 빛이 퍼지는 방사형 패턴으로 브릿지 표면을 피니시 했습니다. 예거 르쿨트르가 종종 사용하는 피니시 패턴이기도 하죠. 다시 다이얼로 돌아갑니다. 다이얼 표면은 에그쉘로 듀얼 윙 컨셉트의 모델들이 애용하는 가공법입니다. 빛의 가감에 따른 표정변화가 크다고 하긴 어렵지만 고급스러운 질감이 특징입니다. 단차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보이는데요.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케이지를 가지다 보니 두께도 필연적이고 하여 단차가 뚜렷한 다이얼을 만들 수 있었지 싶습니다.
지름 42mm, 두께 14.1mm의 화이트 골드 케이스는 보기 보다 훨씬 더 묵직합니다. 익숙해진다면 모르겠지만 처음 손목에 올려 놓으면 부담스러울 정도의 무게인데요. 두께도 두께인데다가 시원스런 다이얼은 실제 지름보다 더 커 보입니다. 스트랩은 리뷰 모델이 까르네인 관계로 페이크 악어가죽입니다. 그 때문에 스트랩에 관해서는 크게 언급할 수 있는 내용이 없군요 버클은 예거 르쿨트르의 로고를 양각한 두툼한 탱버클이 사용됩니다. 스트랩이나 버클은 손목에 고정할 수 있게 제 역할을 잘 하겠지만 케이스의 무게가 만만치 않은 만큼 괜찮을까? 하는 불필요한 의구심도 들만큼 화이트 골드 케이스의 무게감은 인상적입니다. (현재 홈페이지에는 화이트 골드 케이스에 블루 어벤츄린 다이얼과 바게트 컷 세팅을 한 모델, 핑크 골드 케이스 모델, 부틱 에디션인 플래티넘 케이스가 올라와 있습니다)
2000년 중반은 투르비용이 대거 등장하면서 붐을 넘어 과열 양상을 띠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제품 라인업상 투르비용 같은 컴플리케이션과 크게 관계가 없던 메이커들도 외주를 주면서까지 투르비용을 만들어냈고, 투르비용 애보슈도 공급되던 때인데요. 케이지를 지닌 투르비용이 대단히 시각적인 시계였기 때문에 기계식의 신비함, 매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카드로 꺼내 들었지만 너도나도 만들면서 변별력(?)이나 신비함이 떨어지는 부작용도 나타납니다. 이 때 혜성과 같이 등장한 다축 투르비용은 다른 메이커가 쉽사리 따라 할 수 없는 경지의 산물로 상황을 정리합니다. 예거 르쿨트르가 그 주역의 하나였고 지금은 거의 경쟁자가 없을 만큼 발전을 이룬 상황입니다. 사실 투르비용의 기능적 역할은 없다고 봐야 하는데요. 브레게 오버코일이 아닌 플랫 헤어스프링만 가지고도 중력 상쇄의 효과는 충분한 시대니까요. 게다가 경량의 실리콘 소재로 나오는 헤어스프링이 등장하면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스페로 투르비용 같은 고도로 복잡한 투르비용이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기계식 시계가 계속 나오는 이유와 같습니다. 시간을 보기 위해서이긴 하나 기계식 시계의 용도는 그것뿐 만이 아니니까요. 그것은 심미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유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수집욕을 충족시키기도 하겠죠. 이런 맥락에서 듀얼 윙 컨셉트라는 고유한 매력까지 녹여낸 스페로 투르비용은 기계식의 용도 하나 혹은 전부를 극대화하는 최고수준의 물건이지 싶습니다.
사진 : Picus_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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