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섬옥수
누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나요.
남자는.. 모든 계절을 타는 것 같습니다.
▲ 사진은 저작권 문제없는 본인사진..
이 사진을 찍었던게 2010년이었는데.. 어느새 2012년 봄이 되었습니다.
추웠던 겨울이 가고 금방 봄이 돌아왔습니다. 책상 위에 밀린 서류더미를 올려 놓고 앉아, 창 밖으로 흩날리는 연분홍의 벚꽃 잎을 보고 있자니 순수하고 정갈한 것에 대한 아련함이 느껴집니다. 시계 이야기로 몇 년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4년 째 타임포럼에 글을 쓰고 댓글을 남기고 하고 있는 저를 보고있자니 시간의 영속성과 그 매력이 봄 처럼 오묘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계 리뷰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쓰는 글이니 어디까지나 시계 이야기가 빠지지 않아야 하겠지만, 꽃도 떨어지고, 촉촉한 봄 비도 내리는데 오늘은 사는 이야기나 해볼까 합니다.
다른 분들의 삶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제 삶은 언제나 아름답고 찬란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얼마나 살았고, 얼마나 삶의 쓴 맛을 알길래 이런 건방진 말을 써 내려가는지는 오늘만큼은 생각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7살 배기 어린아이에게도 삶은 치열할 수 있고, 한 해, 한 달 안에도 수 없이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는 우리들이니까요. 무튼 그랬습니다. 저는 많은 날을 사랑이 주는 열병에 아파 잠 못 이뤄보기도 했고, 한창 팔에 링거 맞아가며 공부를 해야 했던 그 때에는 집 안 발코니에서 반짝이는 마천루의 불빛을 바라보며 성공하는 인생에 대해 답 없는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하기도 했으며,때로는 알 수 없는 힘에 취해 안개와 전봇대 할로겐 불빛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새벽 3시의 축축한 밤거리를 하염없이 걷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 웃기도 많이 하고, 농담도 주고받고, 행복한 일도 많은 저입니다만, 때로는 이유 없이 가슴을 두드리는 외로움에 취해, 때로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취해 스스로 고독해지는 시간은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저를 찾아왔고, 저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때론 즐겼던 것 같습니다 .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세상은 참 덧없고 영원한 것 하나 없는 그런 공간인 것 같습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유행에 적당히 적응해가며 쾌락을 찾다가, 크게 지쳐 방 안 내 의자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그게 지루해지면 다시 또 나가 행복을 쫓는 무상(無想)의 반복이랄까요.
그래서 우리는(아니, 저는) 불안한 자신 대신에 무언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들을 찾아 기대고 싶어하고, 의지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릅니다. 행복의 절정에 있으면서도 불안함을 생각하는 나. 그런 나와 대조되는 안정되고, 의지하고 싶은 무엇. 절대적인 것들, 또는 절대적인 것들과 가까운 것들에 말이지요.
그래서 자케드로는 다이얼에 '8'자를 숨겨놓았는지도 모릅니다. 끊임없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우리네 세상과는 다르게 자케드로의 시계는 끊임없이 팔(八)자를 그리며 무한한 생의 굴레를 반복하며 영원하고 안정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지요.
▲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스와치그룹이 자케드로를 인수하고 시계를 제작한지는 사실 12년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자케드로는 엔트리 모델이 일 천 만원을 넘어가는 시계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IHM(In House Movement)를 사용하지 않는 브랜드이기도 하지요.자케드로의 역사성이나 기술력에 대해서 흠을 잡고자 한다면, 문제가 될만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스와치그룹 산하에 있는 80%가 넘는 브랜드들이 그렇지요. 하지만 자케드로가 이렇게 기계적으로 무시를 당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사랑을 받고 있는다는 사실은 마니아들이 무시하고, 어리게 보는 자케드로 안에도 간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 입니다.
자케드로 라는 브랜드의 시작은 탁상시계(clock)이었습니다. 게다가 자케드로라는 브랜드는 창립자가 '손목시계'의 시작조차 보지 못한 브랜드입니다.(사실,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브랜드 중에 창립자가 손목시계라는 것을 본 브랜드가 얼마나 되겠습니까마는..) 어쨌든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이제 막 시계공 일을 시작한 꼬꼬마 피에르 자케드로는 조그마한 상자 안에 정교하게 조립되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의 '아름다움'에 매료 당합니다. 손에 베일듯하게 날카로운 톱니바퀴의 존재와, 그 존재들이 좁은 간격 안에서 만들어내는 오묘한 조화, 가로 세로로 움직이는 포크와 그 포크가 만들어내는 회전의 유의미함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지요. 하지만 자케드로가 매료된 것은'무브먼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무브먼트의 아름다움 무게를 두는 많은 브랜드들과는 달리, 자케드로는 그저 정교하고 신비적인 것이 가져다주는 경이로움에 취했던 것이지요. 다시말해 피에르는 '무브먼트' 자체는 아름답지 아름답지 않고, 어떠한 의미를 갖는 대상을 실현해주는 수단으로서 그것이 오류가 없이 제 역할을 다 할 때,아름다움이란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했고,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아름다움'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지고 그의 작품을 바라보면, 그의 작품관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그의 인생관, 그리고 자케드로라는 브랜드의 미래도 조심스레 점쳐 볼 수 있습니다.
▲ 피에르가 만들었던 그랑드 스콩드
앞서 이야기했듯 피에르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습니다. 시대적으로는 고전주의 미술이 시작되는 때였고, 바로크 양식의 예술품들이 절정이었던 시기였습니다.정교한 규칙성이 주는 아름보다는 규칙이 있는 듯 하면서도 비대칭인 것들과 페이즐리 문양이 유행이었던 시기였지요. 그는 분명 클락매이커였습니다만, 그가 가진 기술을 더욱 아름답게 보여줄, 또는 다른 방면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많은 회원분들이 알고 계시는 에나멜부터 쥬얼리, 그리고 음악에도 관여했었죠.
그렇다고 피에르가 자신의 본업에 소홀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계를 만드는 일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노력했고, 그 와중에 자신의 넘쳐나는 상상력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계를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벌기위해' 일을 하지만, 일을 통해 다른 의미를 찾듯, 피에르 역시 시계를 통해 돈을 벌었지만, 그것이 피에르의 삶의 이유이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철학이 담긴 '아름다움'을 만들길 원했고, 그 주된 수단이 시계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직업과 그 일에 대한 대가로 받은 보수만으로 당신을 모두 설명해주지 않듯 말이지요.
위의 세 작품은 가히 '작품'이라 표현할만한 피에르의 걸작입니다. 위의 인형은 그냥 인형이 아니라 '재미있는 로봇'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휴머노이드 로봇의 시초이며,지금도 몇몇 휴머노이드 공학 개론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합니다. 이 작품들은 피에르가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만든 것입니다. 이는 초기 기계공학의 정수이며, 당시 스위스의 정밀 공학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걸작중에서도 수작(秀作, 빼어난 작품)입니다.
사실 시계를 만든다는 것 자체에는 공학적인 요소가 빠질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만드는 기술자가 있기 이전에 필요한 것은 '도구'이니까요. 도구는 말 그대로 기계가 될 수도 있고, 위의 오토마타와 같은 방법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바젤에서는 (비록 한쪽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정밀 기계공학과 관련된 기계들과 기술들을 전시하는 부스가 매년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과 프로모션 덕분에 스위스가 정밀 공학에 있어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 입니다. '시계를 잘 만든다'는 단어 기저에는 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 분야에 대한 끊임없는 수요와 연구,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시계에 관한 일 중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 있을 때, 그러나 누군가는 해줘야 하는 길이 있을 때. 우리가 스위스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면, 그 이유는 스위스에는 시계 그 이상의 철학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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