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ry Winston OPUS X
조금 오래 된 이야기입니다만, 해리 윈스턴의 오푸스시리즈는 짝수보다 홀수가 낫다라는 말이 있었죠. 오푸스 4나 5 정도가 나왔을 무렵 나온 말이 아닌가 싶은데 그 뒤로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끝판왕의 포스를 풍기고 있는 오푸스 3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그 뒤에 나온 짝수 모델 그루벨 포시의 오푸스 6나 마치 디지털 쿼츠 시계 같은 표시로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오푸스 8도 범상치 않은 시계임이 분명합니다. 다만 오푸스 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한 10년 전과 시리즈를 거듭할 수록 메커니즘 역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푸스가 등장하고 몇 년 간 굉장히 센세이셔널 했습니다. 주얼리 분야 특히 다이아몬드에서는 정상의 지위를 가진 해리 윈스턴이 시계를 시작하면서 대충하려는 생각은 단연코 없었을 테니까요. 오푸스의 첫 파트너는 프랑소아 폴 쥬른이었습니다. 설계자, 독립제작자이면서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인물로 비록 시계 부분을 막 시작하려는 해리 윈스턴이었지만 그들의 명성에 어울리는 인물을 선택한 것이었죠. 그에 이어 매년 안토니오 프레지우소, 비아니 할터, 크리스토퍼 클라렛 같은 시계 매니아에게는 추앙 받는 인물이 연이어 오푸스를 제작한다는 사실이 화제가 됩니다. 오푸스가 시리즈화 되자 바젤월드에서 꼭 체크해야 할 사항의 하나가 됩니다. 동시에 해리 윈스턴의 주얼리가 아닌 해리 윈스턴의 ‘시계’를 인식시키며 라인업을 구성할 시간을 확보하게 됩니다. 해리 윈스턴은 쥬른 같은 설계자나 제작자의 시계와 그들의 명성이 함께 필요했을 겁니다.시계만큼 강조되었던 것이 그것을 만든 사람이었죠. 그로 인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요. 나이 지긋한 1세대 설계자들이 메이커의 가려운 부분(컴플리케이션의 설계 같은)을 긁어주고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뒤로 다시 돌아갔던 것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숨은 공로자에 대한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기 시작한 것이죠.
작년 10주년을 맞이한 오푸스 프로젝트는 올 해로 11번째 모델(사실 모델의 가짓수는 11개가 넘습니다. 오푸스 1에는 레조넌스를 비롯 여러 모델이 포함됩니다)이 등장하여 딜리버리가 진행되고 있을 겁니다. 바젤월드에서도 오푸스를 보려면 공개 스케쥴에 맞춰야 하므로 멀리서 참석하는 사람이라면 다소 까다로울 수 있는 조건이고 더욱이 국내에서는 입고의 어려움 때문에 실물을 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오푸스 11이 공개된 시점에서 한 박자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오푸스 X이 국내 입고되어 실물을 살펴보았습니다.
역시 사장의 포스. 오른쪽 직원과 갈구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오푸스X의 쟝 브랑소아 모종
오푸스와 함께 설계자의 이름이 따라오는 것은 이제 전통이 되었습니다. 오푸스X는 10주년을 기념하는 모델이기 때문에 예년 이상의 기대치가 모아졌습니다. 또 누가 만드는가도 관심사였습니다. 하지만(?) 오푸스X의 아버지는 의외로 네임밸루가 약한 아니 잘 알려지지 않은 쟝 프랑소아 모종(Jean-François Mojon)이란 인물이었습니다. 시계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못 들어봤을 확률이 높은 이름이었죠.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스와치 그룹과 IWC의 R&D파트에서 일한바 있습니다. 2005년부터 크로노드(Chronode)라는 무브먼트 개발, 제작회사를 세우고 일을 시작하는데 가장 최근에는 MB&F의 레가시 머신이 크로노드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주로 타켓 프로덕션 위주의 메이커에서 소화하는 스페셜한 무브먼트를 공급합니다. 이 정도면 오푸스 시리즈를 담당했던 인물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오푸스X가 실제 공개가 되었을 때 반응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라는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대치도 기념 모델이라 더 높았고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괴물 같은 시계의 등장으로 면역된 덕에 평이하다는 표현이 더 맞겠군요. 도입부에서 말했던 홀수 설이 떠올랐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과연 실물을 접하고는 어땠을까요?
오푸스X. 이런 공식적인 이미지 아래에는 제가 찍은 저질 이미지들이 있으니 요주의
케이스
시계를 많이 접해보더라도 실물과 책이나 인터넷을 통한 간접적인 체험에서 갭은 늘 발생합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직접 만져 보지 않고 평가를 내리는 일은 정말 위험합니다. 하지만 여건이 따라주지 못해 기존의 머리 속 데이터를 토대로 그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가 있다면 명확한 평가로 업데이트를 하기 위해 실물을 접합니다. 때론 실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죠. 오푸스X는 후자였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멋집니다.
아하하하. 샵에서 GF-1 단렌즈로 찍었습니다. 그래서 사이즈도 이렇습니다. 이 저열한 이미지. 양해 바랍니다.
크라운 왼쪽에 보이는 푸시홀을 누르면 24시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아. 다이아몬드 Yummy
24시간 변경용 푸시툴
지름 46mm나 되는 커다란 케이스도 케이스지만 구조에서 발산되는 개방감이 매력적입니다. 볼록한 사파이어 크리스탈, 러그, 미들 케이스, 케이스 백 이 4파트가 케이스를 구성합니다. 마치 덮게 같은 사파이어 크리스탈은 오푸스X의 메커니즘을 가리는 것 없이 완전히 드러내기 위한 만들어진 의도적인 형태라고 봅니다. 측면에서 보면 중앙이 살짝 솟아있고 끝으로 가면서 완만한 각도를 그리는 글라스로 입체감을 선사합니다. 러그는 사파이어 크리스털 위에 살짝 매달려 있는 디자인입니다. 이 부분이 재미있는데 러그는 케이스백의 스크류 위치로 봐서는 긴 스크류로 관통하여 고정했을 것 같아 보입니다. 미들 케이스는 이 모델의 경우 다이아몬드 세팅으로 가려집니다. 러그와 미들 케이스가 일체형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는데 구조적 어려울 듯 합니다. 위에서 본 러그의 디자인은 개방감에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지에서 보다시피 러그와 케이스 측면에 바게트 컷을 비롯한 다이아몬드가 세팅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푸스X에는 주얼 세팅이 되어 있지 않죠. 주얼리에 별 관심이 없지만 다이아몬드가 케이스 측면에 집중되어 있어 부담이 좀 덜하지 않을까 생각되더군요. 게다가 일반버전(?)의 케이스 측면은 두께도 두께이고 장식처리가 되어 있지만 좀 심심한 편이니까요.케이스 측면 5시 방향에는 푸시 버튼이 있습니다. 24시간 인디케이터의 위치를 변경하기 위함이죠. 오푸스X가 새겨진 전용 툴을 이용합니다. 툴은 금속 소재로 보기보다 묵직하나, 푸시 버튼과 직접 접촉하는 핀 부분은 플라스틱으로 케이스 손상을 최소화 하고 있습니다.
무브먼트
새틀라이트 메커니즘을 사용하는 URWERK
오푸스X의 매력은 디자인에도 있지만 디자인 자체가 메커니즘을 살리기 위한 형태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무브먼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푸스X의 탑재된 무브먼트는 다른 오푸스 모델과도 차별되는 부분으로, 쥬른을 비롯 많은 수의 오푸스가 설계자 자신의 플렛폼을 그대로 가져왔거나 또는 수정을 가해서 이식해 왔습니다. 오푸스X는 그 부분에서 강점을 가집니다. 오직 오푸스X만을 위해 만든 무브먼트니까요. 다만 컨셉트에서 오푸스5와 어웍(Urwerk)의 펠릭스 바움가르트너의 ‘새틀라이트 메커니즘’과 다소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따르는 태양계의 움직임이 테마니까요. 펠릭스의 입체적인 형태가 강점이라면 오푸스X는 테마에 대한 묘사가 훨씬 더 치밀합니다. 태엽을 감아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가 밟고 있는 지구처럼 자전과 공전이 다이얼 속에서 끊임없이 거듭되니까요. 머리 속에서 가졌던 평면적이라 인상은 완전히 깨졌습니다. 앞서 글라스 부분에서도 그랬지만 메커니즘의 높은 완성도를 보고 머리 속 데이터를 완전히 수정해야 했습니다.
오푸스X의 열번째 모델을 뜻하는 X가 초침입니다
HW가 프린트된 인디케이터는 24시간 표시입니다
다이얼 안의 가장 큰 원에는 1에서 24까지의 숫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메커니즘이 24시간에 한 번 회전할 것이라고 예상이 되는 부분입니다. 그 안에는 대칭되는 두 개의 원(시침과 분침), 오푸스X의 ‘X’자 모양의 초침이 올라간 작은 원, 해리 윈스턴의 HW가 그려진 인디케이터 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움직입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의 시, 분, 초침이 달린 시계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다이얼 아래의 무브먼트의 이야기이며 시각적으로 확인이 안되지만 배럴, 기어트레인, 밸런스는 일직선으로 늘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죠. 오푸스X는 크라운을 돌리면 아래 동영상과 같은 움직임이 확인되며, 그것이 오푸스X가 보여주고자 하는 포인트입니다. 손목 위에 올려놓고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움직이는 모습은 40초부터 재생하시면 됩니다.
기능적으로 심플한 것이 약점(?)이라면 약점입니다. 기능은 타임 온리에 24시간 표시,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입니다. 24시간 표시의 제어는 케이스 측면의 버튼이 담당하므로 크라운 조작 체계는 0과 1뿐입니다. 크라운은 스크류 다운 방식으로 크라운을 풀어야 조작이 가능합니다. 수동 모델이지만 파워리저브가 72시간인 만큼 자주 열지 않고2,3일에 한번이면 충분합니다. 30m 방수에 수동 모델이 여닫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스크류 다운 방식을 사용한 부분은 조금 이외입니다. 크라운을 풀고 0의 위치가 되자 와인딩을 해봅니다. 메인 스프링의 탄성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항감 없이 매끄럽게 크라운이 회전하는데, 대형의 메커니즘과 작지 않은 지름을 가진 밸런스 휠을 갖춘 것을 고려할 때 의외였습니다. 게다가 롱 파워리저브라 메인 스프링의 탄성을 예상했었으니까요. 제 생각입니다만 이런 부분이 하이엔드 워치의 차별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최적화를 이뤄낸 밸런스랄까요. IWC의 칼리버 5000 시리즈가 최적화를 위해 진동수를 변경한 버전을 내놓거나 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요. (뭐 칼리버 5000은 원 배럴 7데이즈라는 매우 불리한 점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크라운의 반응도 중요하게 저로서는 매우 흡족한 부분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크라운이 1의 포지션으로 오면 시간을 조정합니다. 앞, 뒤 자유롭게 돌릴 수 있고 그에 따라 다이얼 위 커다란 메커니즘이 반응합니다. 크라운으로 전해오는 감촉은 스무스하지만 묵직함도 함께 느껴집니다.
오푸스 만진다는 생각에 실도 안벗기고 촬영했습니다. 매번 찍는거 참견만 하다가 직접 찍으니 실수연발
케이스 백은 시스루 백이며 몇 가지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밸런스 브릿지로 고정된 작지 않은 밸런스 휠, 오푸스X의 렐리프를 올려놓은 배럴, 리니어 방식의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와 연동되는 새틀라이트 방식의 기어. 무브먼트는 어두운 빛깔을 띄는데 로듐 도금은 아닌 것 같고, 루테늄 도금처럼 비 일반적인(?)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무브먼트의 표면 가공은 부채살처럼 좌우로 퍼져나가는 스트라이프 가공입니다. 배런스 브리지까지 통일성 있게 패턴 가공되어 있고, 패턴의 결을 자세히 보면(메크로 렌즈가 아니라 이 부분 잘 보여드릴 수 없어 죄송) 수 가공이라 추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버클은 일반적인 탱 버클방식입니다. 스트랩은 케이스와 완전히 밀착되는 형태를 하고 있군요.
케이스가 독특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케이스 역시 오푸스X의 케이스(글라스) 형태와 유사합니다. 볼록렌즈처럼 중앙이 살짝 솟아 있고 측면도 미들 케이스의 형태입니다.이 모델은 다이아몬드 세팅이 되어 있어 모양이 좀 다릅니다. 케이스를 돌려 열면 가운데에 시계를 넣을 수 있고, 조정용 툴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시계 둘레에는 케이스 백처럼 제작자의 이름이 확인됩니다.
초기의 오푸스는 투르비용과 같은 전통적인 컴플리케이션이 많았습니다. 오푸스5를 기점으로 기존에 없던 새로운 메커니즘의 창조에 초점에 맞춰지기 시작했고 오푸스X는 그런 기조에 충실합니다. 분명 오푸스X의 기능은 컴플리케이션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단순히 그 때문에 독특한 시계라고 밖에 치부하지는 못할 겁니다. 오푸스1에 속했던 쥬른의 레조넌스를 간단히 ‘이건 컴플리케이션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요. 오푸스X의 독창적이며 누구나 가질 수 없어 더 아름다운 메커니즘 역시 다른 오푸스와 함께 칭송 받을 자격이 있는 컴플리케이션이라 생각하며 리뷰를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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