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호이어 까레라 칼리버 5 체험기
제 첫 번째 기계식 시계는 다름아닌 태그 호이어였습니다. 요즘 고등학생 사이에서 최고의 시계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또래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은 태그 호이어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시계였습니다. 패션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이태원 어디에서 20만원을 줬네, 30만원을 주고 샀네’ 하는 말을 들었다 뿐이지 그 때는 사실 태그 호이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습니다. 1990년대 초, 중반의 20, 30만원은 고등학생이 아니더라도 제법 큰돈이었지만 이태원 어딘가의 가게를 알음알음으로 찾아가 사는 시계라면 아마 진짜는 아니었지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조차 못했을 만큼 시계에 생소했을 때입니다.
Ref. CT2111
그렇게 잠시 잊혀졌던 태그 호이어의 기억은 20대 중반에 되살아 납니다. 유학시절 나름 소소한 용돈벌이를 할 수 있게 되자 좋은 시계 한번 사보고 싶은 정말 뜬금없는 충동이 생겨납니다. 저는 신체에 뭐든 걸치고 다니는 걸 싫어해서 손목에 시계를 차는 일도 없었습니다. 요즘에야 시계 하나는 꼭 차고 있지만 말이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시계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업데이트도 없었고, 따라서 여전히 가장 좋은 시계로 기억하던 태그 호이어를 사야겠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며칠에 걸친 집요한 검색 끝에 당시 태그 호이어의 대표모델인 링크 Ref. CT2111로 결정합니다. 아쿠아레이서도 후보였지만 대세를 따르기로 합니다. 후속 모델인 Ref. CT5111이 나오면서 Ref. CT2111가 시장에서 끝물이었는데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C.O.S.C인증의 유무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C.O.S.C가 없는 대신 더 저렴한 Ref. CT2111을 선택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택배로 받은 Ref. CT2111는 태엽이 전부 풀려 시계가 멈춰있었습니다. 멈춰있는 시계를 보며 한줄기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릅니다.푸시 버튼을 눌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동력이 없는데 푸시 버튼을 누른다고 움직일 리가 없죠). ‘고장 난 시계를 산 게 아닐까. 외국인이라 사기를 친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당장 판매자에게 전화를 걸어 따질까 하다가 먼저 검색을 해보기로 합니다. 놀랍게도 태엽으로 움직이는 시계라는 겁니다. 크라운을 돌리니 작은 바늘이 움직입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영구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한 다음에도 왜 크로노그래프 바늘이 움직이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야 하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계식을 이해하기까지 한바탕 쇼를 했었죠. 지금처럼 시계에 관한 정보가 풍부하던 시기가 아니었으니까요. 링크를 산 덕분에 한동안 강제 하루 2식을 해야 했음에도,링크의 자태는 대단히 만족스러웠습니다. 그 때만 해도 ETA 칼리버 7750의 와인딩 감촉이나 푸시 버튼이 꽤 빡빡했었고, 링크의 브레이슬릿이 미끄러워 손목에서 자리를 잘 잡지 못해도 좋았습니다. 제 첫사랑 시계였으니까요.
링크 Ref. CT2111을 산지 벌써 12년이 흘렀는데요. 제 첫사랑 링크는 떠나 보냈지만 태그 호이어를 다시 착용 해 볼 수 있다고 하니 기분이 묘합니다. 12년이 흐르는 동안 태그 호이어의 라인업에도 변화가 많아졌는데 레이스와 측정이 굵직한 키워드로 자리잡으며 대표모델이 링크에서 까레라로 중심이동을 했고, Se/l이나 고급 라인이었던 6000은 과거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저와 일주일을 같이 한 모델은 이번 바젤월드에서 발표된 까레라 칼리버 5 Ref. WAR211입니다. 기존에도 같은 이름의 모델이 있었는데 다이얼 디자인을 다듬어 낸 점이 가장 큰 변화이지 싶습니다. 다이얼의 구성에서는 둘의 큰 차이가 없지만 디테일에 차이를 두었습니다. 구형이 다이얼 중앙과 바깥쪽으로 단차를 두어 경계 지었다면, 신형은 전체가 같은 높이입니다. 제가 착용했던 모델은 Ref. WAR211C로 그라파이트 컬러에 선레이 패턴을 넣은 모델입니다. 선레이 다이얼의 특징은 표정 변화가 풍부함에 있습니다. 사진에서처럼 햇살 좋은 야외에서 특히 더 다양한 느낌을 받을 수 있죠. 다이얼 위에 바 인덱스, 플랜지에 1/4초 단위의 눈금을 올려 놓았는데, 이는 신형이 구형으로부터 이어받은 두 모델의 공통적 구성입니다. 하지만 바 인덱스, 바늘의 형태나 플랜지의 눈금은 형태에 차이가 있습니다. 신형은 구형에 비해 인덱스는 입체적으로 변화되었고 눈금은 어디까지 평면이지만 1/4초와 1초의 길이차이를 더 크게 두어 순간적인 확인은 더 용이해 졌습니다. 일상적으로 1초 단위를 주로 확인하지 1/4초 같은 작은 단위까지 읽을 일은 그다지 없으니까요. 날짜창의 디테일에서도 신형이 더 입체적으로 다이얼 색깔과 다른 창틀(?)을 올려 날짜에 좀 더 주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2시 방향의 모델명 까레라와 태그 호이어의 로고는 그대로 이지만 6시 방향에 ‘caliber 5’의 프린트가 추가되었고 ‘automatic’의 폰트 크기에도 변화가 있는 듯 합니다. 단차가 없는 평평한 다이얼 덕분에 좀 크게 보이는 효과가 있지 싶습니다.
케이스 지름은 39mm입니다. 요즘 케이스 지름이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지만 스포츠 워치로는 조금 작다 싶을 수도 있는 수치입니다. 실제 착용을 해보면 39mm로 보이지 않습니다. 베젤의 폭이 높이 좁고 경사가 있는 편이며 그와 함께 플린지도 경사각이 있는 편입니다. 이것이 평평한 다이얼과 조합되어 작은 시계라고 보이지 않습니다. 구형 까레라 칼리버 5를 상세하게 본적이 없어서 정확한 비교는 아닐 수 있지만 베젤의 경사각에도 변화가 있어 보입니다. 아마 신형이 조금 더 가파른 경사각을 지니게 되어 케이스 지름대비 더 크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지름과 달리 물리적인 39mm의 물리적인 지름은 편안한 착용감을 보장하는데요. 기본적으로 스포츠 워치라 밖으로 노출될 일이 많지만, 디자인이 완전한 본격파 스포츠 워치는 아니라 셔츠 속에 들어가도 나쁘지 않습니다. 지름 대비 다소 두께는 있지만 39mm 케이스가 빛을 발하는 부분으로 커다란 몸집 때문에 수트와는 언밸런스한 스포츠 워치와는 다른 날렵함이 있습니다.
자연광 아래에서 케이스 외관을 보면, 실내에서 보는 것과 달리 표면 가공이 더 리얼하게 보입니다. 가공이 잘 되었다면 장점이 더 부각되고 반대로 가공이 좋지 못하면 단점이 부각되죠. 다이얼과 인덱스에서 이미 전반적으로 높은 가공 수준이 확인되었지만, 케이스 가공에서 확신이 듭니다. 매우 좋은 가공 수준으로 비슷한 가격대 모델과 비교한다면 상대우위에 두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브레이슬릿은 알파벳 ‘H’ 형태의 링크에 짧은 링크를 번갈아 연결해 구성했습니다. 덕분에 제작에 좀 더 손이 갔겠지만 보기에 단조롭지 않아 좋습니다. H 형태의 링크와 짧은 링크가 한 조이기 때문에 브레이슬릿 길이 조절 시 한 조의 링크가 길어 다소 세밀한 조절이 어렵지 싶었는데요. 클라스프와 브레이슬릿이 연결되는 부분에 반 코 분량의 링크가 있어 이것을 이용하면 문제 없을 듯 합니다.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은 주로 헤어라인 피니시로 마무리되었고 베젤이나 브레이슬릿 측면은 폴리시 가공되어 있습니다. 헤어라인 피니시가 다소 얕지 않은가 하는 느낌도 들지만 결은 꽤 곱네요. 케이스의 모서리나 러그의 끝 단처럼 날카로운 부분은 매끄럽게 마무리하는 기본도 잘 지키고 있습니다.
탑재된 칼리버 5는 태그 호이어가 ETA의 칼리버 2824를 리네임 한 무브먼트입니다. 현재는 ETA의 칼리버 2824보다는 2824의 제네릭인 셀리타의 SW200이 주로 탑재됩니다. 시스루 백으로 된 케이스 백은 밸런스 아래의 메인 플레이트에 새겨진 각인을 확인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글라스 부분이 좀 더 넓으면 보였지 싶은데요. 그래서 정확한 베이스 무브먼트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2824건 SW200이건 기본적으로 거의 동일한 무브먼트라고 보면 문제는 없습니다. 다소 두꺼운 두께를 지녔지만 까레라와 같은 스포츠 워치에서는 두께가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충격에 좀 더 강하기 때문이죠. 칼리버 2824 설계의 무브먼트 지름대비 대형 밸런스는 2824 최대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태그 호이어는 칼리버 5에 약간의 멋을 부렸는데 블루 스크류와 로터 브릿지를 패를라쥬로 가공했습니다. 로터도 기본형태 보다 날렵해 보이는데요. 제네바 스트라이프로 가공하고 좌우에 홀을 낸 뒤, ‘caliber 5’등의 문구를 각인했습니다. 살짝 기울어진 ‘caliber 5’가 날렵한 느낌을 주는데 일조하지 않나도 싶군요.
크라운의 조작은 0, 1, 2의 포지션으로 세 단계입니다. 포지션 0에서 수동 감기, 1에서 날짜 조정, 2에서 시간 조정인데요. 모든 포지션에 무난합니다. 수동 감기는 부드러운 편이고 날짜와 시간 조정에는 불편함이 없습니다. 각 포지션 간의 경계도 뚜렷하고요.
일주일 동안 착용하며 느낀 점은 우선 다이얼과 케이스의 만듬새가 보면 볼수록 가격대에서 훌륭하다 입니다. 디자인 포함 케이스와 무브먼트의 비율을 50 : 50으로 보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시계는 착용하는 물건인 만큼 외관이 중요합니다. 크로노그래프인 까레라를 센터세컨드의 시간+날짜로 재구성하기 시작해 이제는 디자인 면에서는 무르익어 더 이상 손댈 곳이 없는 디자인에 좋은 외관 가공이 더해져 만족도가 높습니다. 16.0~16.5cm 정도되는 보통 손목을 지닌 제게 39mm는 요즘 다운 사이즈가 추세인 케이스 지름을 고려했을 때 딱 좋았는데요. 그래도 좀 작다 싶다는 사람을 위해 41mm의 데이데이트 모델이라는 선택지를 함께 제공하고 있습니다. 무브먼트는 ETA의 2892 계열이 가능해 보이기도 한데요. (칼리버 7이 2892의 GMT 버전인 2893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활동적인 시계에는 2824가 더 적합한 성격이고, 까레라를 비롯 아쿠아레이서에서도 칼리버 5를 엔트로 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바 2824가 더 적합하지 않나 싶습니다. 태그 호이어 혹은 기계식에 처음 발을 딛는 유저라면 한번 경험해봐야 하는 기계식 무브먼트의 하나이기도 하니까요. 총평을 내리자면 태그 호이어의 엔트리 모델로 가장 만족할 수 있는 시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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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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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k2
2020.04.1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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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k2
2020.05.05 01:59
칼리버5는 테그호이어중 가장 맘에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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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리T쿠마
2020.06.04 08:55
정성스러운글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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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Lance
2020.09.29 16:14
이렇게 보니 되게 이뻐보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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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늑대-
2020.10.16 14:33
첫 기계식 시계로 아쿠아레이서와 동일선상에 놓고 고민했던 시계입니다. 결국 아쿠아레이서를 택하긴 했지만 여기저기 어울리는 모델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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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amaku
2023.12.19 14:29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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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버5는 제 20대 첫 오토메틱 시계라 너무 좋습니다. 정말 이쁜디자인이 아직도 생생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