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으로 읽는 시간, 브래들리(The Bradley)
미국의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Kickstarter)에는 지난 해 7월 초 매우 흥미로운 프로젝트 하나가 공개 게시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들이 손을 더듬어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한 컨셉의 손목시계 브래들리(The Bradley)가 그것입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MBA 과정을 수료한 한국계 경영인 김형수 씨가 설립한 이원 타임피스(Eone Timepieces)의 브래들리 프로젝트는
애초 펀딩 목표액이 4만 달러(한화로 약 4,300만원) 정도였는데, 프로젝트가 공개된지 하루만에 목표액을 훌쩍 상회함은 물론,
기부가 마감된 후 최종적으로 모인 금액은 목표액의 15배인 60만 달러(약 6억 4천만원)에 달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 킥스타터 브래들리 프로젝트 결과: 관련 출처(https://www.kickstarter.com/projects/eone/the-bradley-a-timepiece-designed-to-touch-and-see)
브래들리 프로젝트의 상상이상의 성공으로 해외 매체에서는 물론, 국내에서도 킥스타터 및 브래들리 시계를 향한 관심이 지난해 말 크게 증가했지요.
우리 포럼 내에서도 몇몇 회원님들께서 브래들리 관련한 포스팅을 해주신 걸로 저 또한 기억합니다.
하지만 브래들리 시계가 한창 화제가 되었던 작년 하순만 하더라도 아직 정식으로 시판되지 않았습니다.
근래 온라인 기반의 신생 브랜드들이 많이 활용하고 있는 시스템인 프리 오더 형태로만 예약주문을 받았지요.
한국계 CEO와 디자이너들이 설립한 회사이지만 이원 타임피스(Eone Timepieces)는 미 워싱턴 DC에 둥지를 틀고 있어,
지사격인 (주)이원코리아를 통해 시계가 국내서 본격 배송되는 시기 역시 이달 말인 2월 24일 경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임포럼에서는 브래들리 시계를 이미 지난 달에 먼저 접할 기회가 있었답니다. 그것도 4종의 시계를 한꺼번에 말이지요.
오늘은 고로 저널을 통해 여러분들께 브래들리 시계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 회원님들께서는 기계식 시계 선호도가 훨씬 높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구동방식을 떠나 새롭고 창의적인 시계를 접하는 건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언제나 즐거움이지요.
저 역시 그런 마음으로 선입견 없이 브래들리 시계를 처음 접했고, 실제로 시계를 이리저리 직접 보고 매만지면서
이 시계는 단지 시각 장애인들만을 위한 제품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관심을 끌 만한 시계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답니다.
손가락 끝을 더듬어 촉각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이른바 택틸(Tacctile) 워치는 이미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에도 제조된 역사가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포켓워치(회중시계) 형태였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게 많지 않다 보니 제조사 파악이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만... 일단 대표적으로는
오메가가 1917년 발표한 회중시계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헌터형 케이스에 요철이 있는 인덱스를 통해 시간을 더듬어 읽을 수 있는 시계였지요.(위 자료 사진 참조)
이후 손목시계 형태로도 몇몇 회사서 만든 예가 있지만, 아시다시피 '시계= 시간을 눈으로 확인하는 도구'라는 공식이 으레 당연시 되다 보니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지요.
<사진 출처: Eone Timepieces>
브래들리 시계는 앞서 언급한 오메가의 20세기 초 제작된 맹인용 포켓워치를 상기하면 컨셉 자체가 사실 그렇게까지 신기하고 새로운 종류의 시계라고는 보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브래들리의 등장이 신선했던 건, 시계를 제작하게된 배경과 그 진정성이 공감할 만하며, 또한 디자인적으로도 현대적인 손목시계 형태로 선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시계의 이름이 된 브래들리는 위 사진 속의 인물인 브래들리 스나이더(Bradley Snyder) 씨로부터 비롯됩니다.
브래들리 스나이더 씨는 前 미 해군 장교 출신으로서 지난 2011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당시 폭탄 사고로 인해 불행하게도 양쪽 시력을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알 파치노 주연의 1992년 작 <여인의 향기>에서도 시력을 잃은 퇴역 장교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지만, 정말이지 당사자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브래들리 스나이더 씨는 좌절하지 않고, 이듬해인 2012년 런던 세계 장애인 올림픽(Paralympics)에 수영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룹니다.
- 브래들리 시계를 제작하게된 배경이 담긴 관련 메이킹 필름입니다.
위 영상 도입부를 보면, 미국의 영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가 친히 연설을 통해 브래들리 스나이더 씨의 공로를 치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스나이더가 말한 "I'm not going to let my blindness build a brick wall around me(나의 눈멂으로 인해 내 주변을 둘러싸는 벽을 만들게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감동적인 어록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브래들리 스나이더 씨는 미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영웅의 표상인 셈이지요. 물론 우리의 보편적인 휴머니티에도 호소력이 있습니다.
이원 타임피스의 CEO 김형수 씨는 애초엔 시각 장애인인 자신의 한 친구를 위해 시계 제작을 기획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브래들리 스나이더 씨의 감동적인 사연을 접하고는 그에 헌정하는 뜻에서 첫 컬렉션에 그의 이름을 따 브래들리라고 지었지요.
이러한 배경을 통해 마침내 탄생한 컬렉션이 바로 위에 보시다시피 총 4종의 시계들입니다.
겉은 직물, 내피는 가죽으로 제작된 3가지 색상(블루, 올리브 그린, 머스터드 옐로우)의 스트랩 버전과
한 모델은 스틸 소재의 밀라네즈 메쉬 브레이슬릿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케이스 바디는 티타늄 소재입니다. 스틸에 비해 가볍고 내구성이 좀더 좋지요.
뭐 요즘 신생 브랜드들이 다 비슷비슷하지만, 케이스 매뉴팩처는 중국(홍콩) Shenzhen에 위치해 있습니다.
티타늄 특유의 다크 그레이톤과 질감을 브래들리의 시계에서도 볼 수 있구요. 전체적인 마감 상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일단 시계 무게 자체가 가볍다 보니(전체 약 70g 정도) 손목에 체결시 부담스럽지 않고 케이스백 또한 티타늄이라서 피부와의 친화력도 좋습니다.
케이스 지름은 40mm이고 두께는 11.5mm 정도로 그리 얇진 않습니다. 러그 길이는 20mm이구요.
그리고 이 시계는 보시다시피 전통적인 방식(핸즈)으로 시와 분을 표시하지 않습니다.
두 개의 쇠구슬이 앞쪽 다이얼 안쪽(분) 및 케이스 측면(시)에 파인 홈 안에서 움직이구요.
각각의 홈 내부에는 별도의 자석이 내장돼 이 자성에 의해 시와 분이 이동하는 형태입니다.
단, 홈안에 먼지나 이물질, 모래 같은 것이 들어갈 수도 있으니 평상시 약간의 주의도 요구됩니다.
초침이 없기 때문에 언뜻 봐서는 이게 지금 시간이 정말로 가고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는데요. ㅋㅋ
크라운을 1단 빼고 돌려 보면 실제로 쇠구슬이 보통의 핸즈처럼 트랙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시계의 작동은 위 동영상을 함께 보시면 더욱 확실하게 이해되실 겁니다.
시와 분을 한 다이얼에 같이 병행하면 시각 장애인들이 시간을 읽을 때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시를 표시하는 구슬을 케이스 측면으로 따로 뺀 점은 기발한 발상이지만,
한편으로는 구슬이 하단부(4시에서 8시 방향)에서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더불어, 쇠구슬을 손으로 조금 세게 더듬으면 구슬이 바로 자리를 이탈해 트랙 안을 돌아가기 때문에 각 트랙 내장 자석과 쇠구슬 간의 접지력에 아쉬움이 좀 있습니다.
물론 이럴 땐 시계를 살짝 흔들어주면 다시 구슬이 제 시간대로 가서 멈추지만, 장기적으로 볼땐 구조적인 약간의 개선이 필요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전면부에 도드라지게 5분 단위 마다 양각 인덱스(티타늄 바디와 달리 스틸 소재임)를 부착한 점은 실제 시각 장애우들에게도 매우 유용할 것으로 보이며,
12시 방향을 역삼각형 처리한 점도 디테일을 잘 살린 부분입니다. 또한 각 요철 인덱스 상단만 폴리싱 처리를 해서 비장애인들이 보기에도 좋게 제작한 점이 눈길을 끕니다.
내장된 무브먼트는 스위스 론다(Ronda) 쿼츠이구요. 작은 직경의 칼리버를 별도의 플라스틱 홀더가 감싸고 있습니다.
무브먼트에 관해서는 딱히 추가로 더 언급할 건 없구요. 케이스백은 4개의 스크류로 단단하게 잘 보호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브래들리 시계는 50m 방수까지 가능합니다.
브래들리 시계는 쇠구슬로 시와 분을 표시하는 방식과 손을 더듬어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컨셉 외에도
디자인적으로 일단 흥미로운 면이 있습니다. 시각 장애인들을 고려한 특유의 설계가 미니멀리즘 디자인으로 승화된 사례라고 할 수 있지요.
단순하면서도 기능성을 최대한 살린 점에서 좋은 설계와 디자인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해당 시계의 디자인 역시 CEO인 김형수 씨의 친구들이 직접 참여해 완성했다고 하네요.
자세히 보심 아시겠지만 러그부 역시 손목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제작한 점 또한 착용감 면에서 유리한 디테일입니다.
그리고 패키징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대요.
단출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과 구석구석 시계의 컨셉과 제작 의도를 잘 보여주는 디테일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드 커버로 제작된 단단한 외부 종이 박스를 개봉하면 위에 보시는 것처럼 작은 브로슈어 같은 게 들어 있습니다.
그 표지 역시 한쪽에 '브래들리'라는 이름을 점자 형태로 넣어 눈길을 끌구요.
이렇게 안쪽에도 한쪽에는 일반 설명과 함께 다른 한쪽에는 점자가 추가돼 이 시계의 정체성과 컨셉을 간접적으로 강하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어떤가요? 시계와 같이 놓고 보니 더욱 인상적으로 보이지 않나요?!^^
30대 초중반의 젊은 멤버들로 구성된 영한 회사 답게 구석구석 재미있는 감각 또한 엿보입니다.
착용컷도 몇 장 보시지요.
머스터드(옐로우톤) 컬러의 스트랩이 팝하는 느낌이라 귀엽고 조금은 여성스럽게 느껴진다면 메쉬 브레이슬릿 버전은 또 시크한 남성미를 느끼게 합니다.
위 사진 좌측의 인물들이 브래들리 시계를 기획하고 만든 주축들입니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팔짱을 끼고 있는 분이 이원 타임피스의 CEO 김형수 씨.
그리고 우측의 사진은 올초에 열린 이번 그래미상(Grammy Awards) 시상식의 공연 모습입니다.
다프트 펑크의 히트곡 'Get Lucky'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가수 스티비 원더가 위 공연 당시 착용하고 있던 시계가 흥미롭게도 브래들리라고 하네요.
아시다시피 스티비 원더는 어렸을 때 실명한 대표적인 맹인 가수입니다. 브래들리의 메쉬 밴드 모델을 착용했다는 사실이 어찌됐든 흥미롭습니다.
메인스트림의 시계 브랜드들이 미처 시도하지 않은 영역을 신생 회사가 도전해 결실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브래들리는 소정의 성취가 있다고 봅니다.
더불어 젊은 한국계 경영인과 디자이너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 역시 타임포럼을 비롯한 국내 커뮤니티 내에서 일견 호의적으로 작용할 만 하구요...
애초 브래들리를 두고 통상적인 '보는 시계'의 개념인 '워치(Watch)'가 아닌 보다 광의적인 의미의 '타임피스(Timepiece)'로 칭한 배경도
기획 단계서부터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손으로 읽는 시계 제작의 취지로 시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비단 시각 장애인들 뿐만 아니라,
평소 회의를 할 때나 면접 같은 상황에서 시계를 자주 들여다 보는 것이 매너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제법 유용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 제작 의도나 실제 쓰임과는 상관없이 주류 시계와는 다른 독특한 디자인에 끌려서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어찌됐든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건 보기 좋으며, 시계 자체보다도 어쩌면 그 배경에 얽힌 스토리가 더욱 흥미로워 제작의 진정성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 기타 내용 참조:
- 이원 타임피스 공식 홈페이지: http://www.eone-time.com/(Int) & http://www.eone-time.kr/(국내)
* 일부 사진 출처:
- 이원 타임피스 공식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EoneTimepieces
- (주)이원코리아 공식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eonetime
촬영 협조:
2nd Round Studio.
Photographer 김두엽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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