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는 다이빙 워치라는 장르를 정의 내리는데 있어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특징들이 있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이러한 요소들이 시작부터 명백했던 것은 아니다. 한 명의 선구자가 최초의 현대적인 다이빙 시계를 만들었고, 나머지들이 이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을 개척한 선구자가 바로 블랑팡이었다."
- 제프리 S. 킹스턴(Jeffrey S. Kingston), <블랑팡 : 레트르 뒤 브라쉬(Blancpain : Lettres du Brassus)> 18번째 이슈 중에서...
- 1953년 제작된 오리지널 피프티 패덤즈 시계 ⓒ Blancpain
1953년 탄생한 블랑팡(Blancpain)의 피프티 패덤즈(Fifty Fathoms)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브랜드의 시그니처 컬렉션이자 다이버 워치의 영원한 클래식입니다. 당시 블랑팡의 수장 장-자크 피슈테르(Jean-Jacques Fiechter)와 프랑스 해군 소속 엘리트 전투부대의 창립자이자 전투 다이빙 스쿨 교관이었던 로베르 밥 말루비에르(Robert "Bob" Maloubier) 두 선구자들의 협업이 이뤄낸 결실인 피프티 패덤즈는 같은 해 등장한 롤렉스의 서브마리너와 함께 모던 다이버 워치의 절대적인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해온 피프티 패덤즈지만 1953년 런칭 초기부터 확립된 몇 가지 주요한 특징들은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잠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단방향 회전 베젤, 특허를 획득한 더블-씰 크라운을 갖춘 견고한 밀폐 설계 케이스, 손목의 움직임에 의해 저절로 와인딩이 되는 오토매틱 무브먼트, 다이빙 장비에서 나오는 강한 전자파를 차단하는 안티 마그네틱 성능, 독자적인 디자인의 다이얼과 야광 인덱스 같은 특징들이 그것입니다.
- 2013년 출시한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 Ref. 5000-1110-B52A
나아가 블랑팡은 피프티 패덤즈 컬렉션 안에 오리지널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바티스카프(Bathyscaphe) 라인을 2013년 피프티 패덤즈 60주년을 맞아 추가로 전개하기 시작했고, 현재는 가장 기본적인 데이트 모델부터 데이-데이트, 트리플 애뉴얼 캘린더,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 컴플리트 캘린더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다양한 제품군을 갖추고 있습니다.
- 2018년 출시한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 부쉐러 블루 에디션 (블루 세라믹 케이스) Ref. 5200-0340-O52A
- 2018년 출시한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 애뉴얼 캘린더 Ref. 5071-1110-B52A
특히 지난해를 기점으로 바티스카프 라인에 데이-데이트, 애뉴얼 캘린더, 컴플리트 캘린더와 문페이즈 기능의 신제품을 대거 추가함으로써 라인업이 한층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이중에서도 컴플리트 캘린더 문페이즈 제품은 다이버 워치와 풀 캘린더 그리고 문페이즈의 조합 자체가 타 브랜드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 만큼 특색이 있기 때문에 한층 더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에 타임포럼은 블랑팡의 새로운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 컴플리트 캘린더 문페이즈(Fifty Fathoms Bathyscaphe Complete Calendar Moon Phase, Fifty Fathoms Bathyscaphe Quantième Complet Phase de Lune) 스틸 모델(Ref. 5054-1110-NABA)을 공식 리뷰를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블랑팡이 피프티 패덤즈 컬렉션에 문페이즈를 포함한 컴플리트 캘린더 제품을 선보인 게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하지만 과거의 하이 컴플리케이션 모델(Ref. 5066F-1140-52B)은 플라이백 기능을 갖춘 자동 크로노그래프 베이스에 컴플리트 캘린더 모듈을 추가한 형태를 띠고 있다면, 새로운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 컴플리트 캘린더 문페이즈는 오롯이 캘린더와 문페이즈 기능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티스카프 라인에 처음으로 전개하는 컴플리트 캘린더 문페이즈 제품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 컴플리트 캘린더 문페이즈는 우선 스틸 케이스로만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간 컬렉션을 운용해온 방식을 돌이켜볼 때 향후 티타늄 버전이나 다른 다이얼 컬러(블루가 유력!) 베리에이션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같은 스틸 케이스로도 세일 캔버스(Sail-canvas) 스트랩 버전(Ref. 5054-1110-B52A)과 스틸 브레이슬릿 버전(Ref. 5054-1110-70B)으로 또 나뉩니다.
전체 매트하게 새틴 브러시드 가공한 케이스의 직경은 43mm, 두께는 13.3mm이며, 다른 바티스카프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수심 300m까지 방수를 지원해 전문 다이버 워치로서의 기본적인 사양에 충실합니다. 전체 브러시드 가공된 케이스는 그 자체로는 다소 둔탁한 느낌을 주지만, 기존의 피프티 패덤즈 혹은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 제품들과도 케이스 가공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질감은 들지 않습니다.
단방향 회전 가능한 베젤부는 새틴 브러시드 가공한 스틸 바탕에 블랙 세라믹 인서트를 더했는데, 실버톤의 스케일(눈금)은 스와치 그룹이 특허를 획득한 독특한 합금 소재인 리퀴드메탈(Liquidmetal®)을 사용했습니다. 지르코니아 베이스의 세라믹 링을 섭씨 1,400도 오븐에서 가열, 소결한 뒤 8,000 와트 정도의 레이저 광선을 이용해 눈금에 해당하는 부위를 인그레이빙 하듯이 파냅니다. 그리고 리퀴드메탈 합금을 5톤의 압력과 열을 가해 얇고 평평하게 펴낸 다음 세라믹 링과 같은 크기로 커팅해 세라믹 링 위에 올려 놓고 다시 고압과 열을 가해 압착시킴으로써 리퀴드메탈이 녹아 세라믹 인서트에 스며드는 형태로 하나의 베젤이 완성됩니다.
이렇듯 두 대조적인 소재의 결합으로 인해 해당 베젤은 스크래치가 잘 생기지 않고 자외선과 화학물질에 의해 변색, 부식되지 않으며 오랫동안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보통의 알루미늄 인서트의 경우 오랜 세월이 지나면 링 형태는 남아있어도 베젤의 눈금이 쉽게 지워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이테크 세라믹과 리퀴드메탈을 적용한 베젤은 이러한 노후의 염려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리퀴드메탈은 같은 스와치 그룹 브랜드인 오메가(Omega)를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졌고, 최근 들어서는 블랑팡의 피프티 패덤즈 라인에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습니다.
선버스트 마감한 그레이 컬러 다이얼- 블랑팡은 이를 가리켜 운석에서 착안해 ‘메테오르 그레이(Meteor grey)’라 칭함- 에는 특수 야광도료인 수퍼루미노바를 코팅한 아워 마커(인덱스)와 핸즈가 위치해 야간이나 다이빙 중에도 가독성을 보장합니다. 끝이 뭉툭하면서 가운데 부분만 얇게 처리한 흡사 주사기(Syringe)를 연상시키는 바티스카프 특유의 핸즈 형태는 여전하며, 날짜를 가리키는 별도의 포인터 핸드는 끝부분을 초승달 모양 바탕에 레드 컬러를 입혀 나름대로 포인트 주고 있습니다. 블랑팡 브랜드 로고 위에 나란히 각각의 어퍼처(창)로 요일과 월을 표시하고 있으며, 6시 방향 바티스카프 프린트 위에 의인화한 블랑팡 특유의 익살스러운 달의 모습이 어우러진 문페이즈 디스플레이가 위치해 있습니다. 컴플리트 캘린더 & 문페이즈 기능 덕분에 다이얼은 한눈에도 꽉 찬 느낌을 선사하며, 각 인디케이션의 배열이 클래식하면서도 조화롭습니다.
- 기존의 빌레레 컴플리트 캘린더 제품들
바티스카프 컴플리트 캘린더와 같은 자동 무브먼트를 공유한다.
사실 이러한 레이아웃은 브랜드의 또 다른 클래식 라인인 빌레레(Villeret)를 통해 일찍이 익숙하게 접한 것입니다. 브랜드 재건 이래 가장 성공적인 컴플리케이션인 컴플리트 캘린더를 다이버 워치 컬렉션인 피프티 패덤즈에까지 어찌 보면 무리하게(?) 확장한 것도 컴플리트 캘린더가 블랑팡 컬렉션에 갖는 상징적인 의미가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 참고로 본 리뷰 속의 시계는 촬영용 피스인 관계로 실제 판매용 제품과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브먼트는 약 3일간(72시간)의 파워리저브를 보장하는 인하우스 자동 칼리버 6654.P를 탑재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빌레레 라인의 컴플리트 캘린더 & 문페이즈 모델들에 사용된 그것과도 동일합니다. 블랑팡은 크게 3가지 종류의 인하우스 자동 컴플리트 캘린더(문페이즈를 포함한 풀 캘린더) 칼리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3일 파워리저브를 특징으로 하는 6654가 보편적으로 널리 쓰이는 컴플리트 캘린더 칼리버라면, 8일 파워리저브를 보장하는 6639와 여성용 모델에 탑재되는 아담한 사이즈의 913QL도 있습니다. 그만큼 블랑팡에서 컴플리트 캘린더 제품을 찾는 수요가 많고 고객들의 니즈 또한 다채롭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 칼리버 6654.P
직경 32mm, 두께 5.48mm 크기 안에 총 321개의 부품과 28개의 주얼로 구성된 6654.P 칼리버는 기존의 성공적인 1151 자동 칼리버를 베이스로 캘린더 모듈을 추가하고, 진동수를 4헤르츠로 변경, 트윈 배럴 및 기어트레인 설계 역시 일부 수정해 72시간 파워리저브로 조정했습니다. 사파이어 크리스탈 케이스백을 통해 무브먼트를 감상할 수 있으며, 안트라사이트 코팅 마감한 18K 골드 로터와 함께 글루시듀르(Glucydur) 재질의 프리 스프렁 밸런스와 자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실리콘 밸런스 스프링과 같은 부품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이스 자동 칼리버가 풀-로터 타입임에도 3.25mm 두께로 워낙 슬림한 편이기 때문에 디스크 방식의 고전적인 캘린더 모듈 및 문페이즈 디스플레이를 추가하고도 그 두께는 5mm가 조금 넘는 수준이어서 자연히 케이스 두께 역시 비교적 얇게 선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클래식 라인인 빌레레와 달리 다이버 라인인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에 사용된 터라 무브먼트의 장점은 크게 빛을 발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빌레레 라인에 탑재시 10mm 정도였던 케이스 두께는 바티스카프 라인에 탑재되면서 13mm가 조금 넘기 때문입니다. 클래식 모델과 스포츠/다이버 모델은 케이스 디자인 및 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또한 기존의 빌레레 모델에서 6654.P 칼리버의 각 캘린더 기능은 크라운 외 케이스 안쪽 러그 단면에 위치한 독자적인 언더 러그 코렉터(Under-lug Correctors)로 개별 조정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전문 다이버 워치를 표방하는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의 케이스 구조 특성상 언더 러그 코렉터 부품을 추가할 수 없기 때문에(이는 방수 성능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각각의 캘린더 & 문페이즈 기능은 케이스 프로파일(측면)에 위치한 보다 전통적인 형태의 코렉터로 조정해야만 합니다. 블랑팡이 자랑하는 독창적이면서도 우아한 언더 러그 코렉터를 접할 수 없는 점은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다이버 워치만의 또 다른 장점과 매력을 감안하면 이 정도는 수긍이 갑니다.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 컴플리트 캘린더 문페이즈는 리뷰 모델인 블랙 나토(NATO) 스트랩 버전(Ref. 5054-1110-NABA) 외 물에 강하고 질긴 항해용 돛천에서 착안한 세일 캔버스 스트랩 버전(Ref. 5054-1110-B52A)과 입체적인 링크로 연결된 인체공학적인 설계의 스틸 브레이슬릿 버전(Ref. 5054-1110-70B)도 함께 출시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리뷰 속 나토 스트랩 모델의 국내 출시가는 1천 742만 원이며, 현재 신세계 본점 블랑팡 부티크 등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 컴플리트 캘린더 문페이즈는 스포티한 다이버 워치와 클래식한 캘린더 & 문페이즈가 어우러진 이색적인 제품이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을 줄 압니다. 하지만 시계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왜 이 시계가 나오게 되었는지 앞서 열거한 몇 가지 이유를 통해 헤아릴 수 있습니다. 브랜드의 가장 상징적인 컬렉션과 가장 인기 있는 컴플리케이션을 결합함으로써 컬렉션의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색다른 다이버/스포츠 워치를 찾는 틈새 고객층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당 제품을 향한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이러한 시도 자체는 환영할 만하며, 블랑팡의 DNA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때문에 충분히 인상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