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새롭게 발표한 헤리티지 크로노메트리(chronométrie)는 정확한 시계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인 크로노미터(Chronometer)의 프랑스어인 셈이죠. 몽블랑은 헤리티지 크로노메트리를 새로 런칭하면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예전 니콜라스 뤼섹 라인업을 선보일 때처럼요. 필기구로 시작해 시계의 역사가 길지 않은 약점을 크로노그래프 메커니즘을 확립에 공헌한 니콜라스 뤼섹에 대한 헌정이라는 스토리 텔링으로 보완한 것처럼 이번 헤리티지 크로노메트리도 탐험가 다 가마와 미네르바 공방에 관한 내용으로 꾸몄습니다.
미네르바 피타고르와 무브먼트
리뷰의 헤리티지 크로노메트리 울트라 슬림은 몽블랑이 흡수한 스몰 매뉴팩처 미네르바와 그들의 대표작인 미타고어(Pythagore)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지금도 매니아들 사이에서 필수 수집품으로 손꼽히는 미네르바 피타고어는 인 하우스의 수동 무브먼트 칼리버 48을 탑재한 정갈한 시계입니다. 황금비율을 고려한 브릿지 디자인과 분할은 다소 투박하지만 아름다웠고, 그와 잘 어울리는 유려한 외관은 매니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헤리티지 크로노메트리 울트라 슬림은 피타고어를 표방하는 모델인데요. 아쉽게도 칼리버 48을 부활시켜 탑재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수동 시계가 되었겠지만, 디자인을 중심으로 피타고어를 따르고 있습니다.
피타고어의 다이얼 디자인은 버전이 많습니다. 야광 인덱스와 코브라 핸드를 사용한 군용 스타일에서 로마, 아라비아, 바와 이를 혼용한 드레스 워치까지 다양한데요. 헤리티지 크로노메트리 울트라 슬림은 3, 6, 9, 12에 아라빅 인덱스, 나머지는 바 인덱스를 사용하고, 분 단위는 레일웨이 인덱스를 변형한 형태를 사용합니다. 피타고어를 떠올릴 수 있는 부분은 아라비아 인덱스의 폰트입니다.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입체적으로 가공한 아라빅 인덱스는 심플한 다이얼에 엑센트를 줄 뿐더러 시간을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바늘은 살짝 접은 가공을 거쳤고 요즘은 간혹 명암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코팅 혹은 페인트 처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공법을 따랐습니다. 다이얼은 로듐 도금의 실버로 선레이 가공을 입혔습니다. 시침과 분침 만으로 구성된 타임 온리로 다소 단조로울 수 있는 다이얼을 표정 변화가 풍부한 선레이 가공으로 어느 정도 커버하고 있습니다. 로듐 도금을 사용한 만큼 실버의 색감은 밝은 편으로 어두운 조명에서 매력을 급격하게 잃어버리는 어두운 실버와 달리 장소 변화에 대한 내성(?)이 강한 편입니다.
탑재한 무브먼트는 칼리버 MB 23.01이며 수동 와인딩 방식입니다. 베이스 무브먼트는 ETA의 칼리버 7001이며 과거에는 푸조(Peseux) 칼리버 7001로 부르던 것이죠. 몽블랑의 엔트리 라인은 셀리타 무브먼트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데 비해, 수동 무브먼트는 ETA를 탑재합니다. 이유는 마땅한 대체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셀리타는 자동 무브먼트 중심의 라인업을 갖추고 있고 수동은 SW200에서 몇 종이 나오긴 합니다. 하지만 SW200(≒ETA 2824)가 수동 베이스에 자동 와인딩 메커니즘을 올려 만들어진 역사를 볼 때 수동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조이긴 하나 제대로 된 수동은 없다시피 하니까요. 다시 돌아와서 무브먼트 밸런스 아래 부분을 보면 ETA의 로고가 확인되며, 기본 설계는 7001과 다른 부분이 없지만 원래 기본기가 좋은 무브먼트입니다. 이스케이프 휠에서 3번 휠을 덮는 브릿지, 2번과 배럴을 덮은 큰 브릿지, 밸런스 콕으로 시원하게 분할하고 직선으로 자른 특유의 디자인은 익숙하네요. 브릿지는 코드 드 제네브로 장식 가공했고, 모서리의 앵글라쥬는 생략했습니다. 아쉬운 부분이긴 하나 절단면이 거칠지 않도록 적절한 마무리를 거친 듯합니다. 위 이미지처럼 매크로 촬영을 해보면 절단면을 상세하게 볼 수 있는데 크게 거슬리지 않습니다. 육안으로 확인한다면 충분히 허용범위에 들어갈 테고 시계 가격을 고려한다면 흠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크라운 포지션은 0과 1이며, 크라운을 당기지 않은 포지션 0에서 수동 와인딩, 한 칸 당긴 포지션 1에서 시간 조정입니다. 수동 무브먼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와인딩 감각은 자동 무브먼트에 비해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와인딩이나 조작 특성은 ETA의 칼리버 7001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풀 와인딩에 가까워 질수록 탄성이 제법 강해집니다. 울트라 슬림이라는 이름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와인딩 감각인데 사실 좀 예전이었다면 칼리버 7001은 울트라 슬림에 해당하지 않았을테니까요. 크라운의 지름이 좀 작은 영향도 있으며, 크라운이나 손에 기름기가 묻어있기라도 한다면 와인딩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포지션 0에서 1의 변경은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갑니다. 크라운을 제법 강하게 당겨야 하죠. 시간 조정은 크라운을 돌리는 대로 즉각적인 반응이나, 뒤로 돌렸다가 다시 앞으로 돌릴 때는 약간 유격이 일어납니다.
깔끔하긴 하나 특별함이 없는 무브먼트와 달리 케이스 가공은 만족스럽습니다. 사실 헤리티지 크로노메트리 울트라 슬림과 같은 가격대의 시계를 만들 때의 합리적인 방법이 아닐까도 싶은데요. 빈티지 피타고르를 꺼내어 매끈하게 다듬어 낸 듯합니다. 살짝 돌출한 글라스를 둘러싼 완만한 베젤, 길고 날렵하게 뽑아낸 러그는 모던 클래식이라고 해도 좋을 요소들이군요. 러그 부분의 마무리가 인상적인데요. 피부와 상시 접촉하는 부분의 하나이므로 상당히 신경 쓴 티가 납니다.
스트랩은 악어 가죽을 사용합니다. 버클이 상당히 얇으며, 핀(Tongue) 역시 얇습니다. 케이스 두께에 맞춰 버클의 두께를 통일했습니다. 그에 비해 스트랩은 케이스 두께에 비해 두껍지 않은가 싶군요. 두께가 두꺼워지면 손목에서 고정력이 좋아지지만 전반적인 밸런스가 다소 무너지게 됩니다. 헤리티지 크로노메트리 울트라 슬림은 전자를 고려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리뷰 모델은 헤리티지 크로노메트리 라인은 물론 몽블랑 전체 라인업에서도 엔트리에 해당합니다. 가격이 이를 가장 먼저 말해주고, 수동의 단순한 기능이 다시 한번 말해주지만 시간을 표시하는 도구로서 가장 본질을 추구하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매니아들이 복잡시계를 거친 뒤 타임 온리의 수동시계로 회귀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무브먼트는 스몰 세컨드를 갖춘 삼침의 타임 온리 구성이 가능하나 그게 아닌 시, 분 구성으로 피타고르와의 연관을 약하게 만든 점은 아쉽습니다. 무브먼트는 특징이나 개성을 잡기가 어렵고 기본기에 충실하며 무난하지만, 그 외에는 드레스 워치로서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결론은 내리자면 요즘 많지 않은 엔트리 급 수동 드레스 워치에서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촬영 : Picus_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