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스와치의 탄생
1969년 쿼츠 손목시계의 등장 이후 약 10년 간의 스위스 시계사를 말하라고 한다면 크게 특기할 부분이 없습니다. 뭔가 특별한 시계가 등장하거나 새로운 발명이 이뤄지거나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까요. 이유는 쿼츠 손목시계의 보급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계식 시계가 빠르게 밀려 났기 때문입니다. 생존의 기로에 선 상황에서 특별한 시계나 발명이 나올 여유가 없었을 겁니다. 물론 스위스도 쿼츠 시계를 만들어 대응에 나섰지만 이미 시장이 기울고 난 뒤였습니다. 당시의 스위스 시계 시장을 비유하자면 레코드로 음악을 듣던 세상에 CD가 등장하면서 평정을 이룬 상황이었습니다. 시계 메이커들은 멀쩡하게 직장생활을 하던 근로자의 대부분을 해고했고, 부품을 납품하는 관련 업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시계메이커들은 생산 설비를 처분하거나 방치하기에 이르게 되는데요. 1980년 초반의 스위스 시계그룹은 SSIH(Société Suisse pour l'Industrie Horlogère)와 ASUAG(Allgemeine Schweizerische Uhrenindustrie AG)가 두 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둘은 1930년대에 만들어져 그 때까지 이어져오고 있었는데 전자는 오메가와 티쏘를 산하에 두었고, 후자는 ETA를 비롯 론진과 라도를 산하에 두었습니다. (1980년 이전의 오메가와 론진은 지금보다 훨씬 큰 메가 매뉴팩쳐였습니다) 시장상황이 몹시 좋지 않다 보니 이 두 그룹은 스위스 연방은행과 스위스 은행의 관리(법정관리?)를 받고 있었는데요. 은행의 입장에서는 덩치 큰 두 그룹을 회생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이에 적임자로 선택된 인물이 고 니콜라스 하이에크입니다. 레바논 출생인 그는 하이에크 엔지니어링을 설립하여 기업 컨설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인물이었는데요. 하이에크의 엔지니어링의 클라이언트로는 쟁쟁한 다국적 기업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폴크스바겐, 네슬레, 지멘스, US 스틸 등이었죠.
2006년 3억 3천 3백만번째 스와치를 들고 포즈를 취한 전 스와치 그룹의 회장인 고 니콜라스 하이에크
은행의 전권을 이임 받은 하이에크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두 그룹을 하나로 합쳐서 규모로 맞서고, 또 다른 하나는 쿼츠 시계를 만들어 쿼츠에 대항하라’ 하지만 은행은 강하게 반발합니다. 스위스 시계 산업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쿼츠에 대한 적개심이 적지 않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우리를 무너뜨린 쿼츠를 쿼츠로 대항하라니 말이죠. 하지만 은행과 하이에크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가능성을 확신한 그는 펀드를 조성해 SSIH와 ASUAG를 합병해 탄생한 SMH(Société de Microélectronique et d'Horlogerie)의 지분 51%를 확보하고 회장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SMH는 바로 스와치 그룹의 전신인데요. 지배권을 손에 넣은 하이에크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ETA를 맡고 있던 에른스트 돔케를 믿고 쿼츠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쿼츠 손목시계의 원조 일본, 가격의 홍콩, 전자제품의 시각으로 접근했던 미국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쿼츠 정확성과 대량생산에만 주목하고 있었지 하나를 빼놓고 있었습니다. 바로 재미였습니다. (이것이 발전되어 하나의 문화로 형성되기에 이릅니다) 기계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시계의 재미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을 겁니다.
하이에크는 쿼츠에 재미를 불어넣었는데요. 그 재미란 디자인, 예술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시계가 바로 스와치(Swatch)입니다. 스와치는 세컨드(Second) + 와치(Watch)의 조합입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당시에는 시계는 한번 사면 거의 평생 쓰는 도구처럼 여기던 생각을 뒤집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시즌마다 새로운 옷을 선보이듯 지금의 스와치도 새로운 모델을 선보이는데, 옷이 질리면 새로운 옷을 사듯 시계도 질리면 새 시계를 사도록 하는 지금의 패스트 패션과 같은 감각으로 접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저렴한 가격으로 시계를 내놓아야 했고 실제로 첫 스와치는 약 35스위스 프랑으로 판매되었습니다. 플라스틱 케이스에 쿼츠 무브먼트를 탑재하고 디자인과 예술로 된 옷을 입힌 시계를 1983년부터 발매를 시작해 3년 뒤 첫 생산량의 열 배인 1000만개를 만들어 냈고, 1990년에는 2000만개를 생산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하이에크의 전략이 보기 좋게 적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축적한 이익은 스와치 그룹을 형성하는데 사용되었을 테죠. 현재 스와치 그룹은 피라미드 형태의 브랜드 포지셔닝을 갖추고 있는데요. 맨 아래가 다름 아닌 스와치로 그룹의 밑바탕을 플라스틱 쿼츠 시계가 마련합니다. 그룹의 이름을 스와치로 정할 정도로 각별한 플라스틱 쿼츠 시계죠.
시스템(SISTEM) 51
2013년 바젤월드에서 스와치 30주년을 기념함과 동시에 시스템 51이 공개됩니다. 바젤월드에 스와치를 참가시키지 않는 스와치 그룹으로서는 이례적인 행동이었죠. 시스템51의 이름은 부품 수 51개에 따왔고 모듈화와 완전한 자동화를 통해 완성되는 기계식 스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간혹 기계식 무브먼트 탑재한 스와치 모델이 나오긴 했으나 이번엔 달랐습니다. 시스템 51은 기계식일 뿐 아니라 스와치의 탄생 개념을 동일하게 적용했으니까요.
투명하게 처리한 로터는 무브먼트를 가리지 않고 패턴을 잘 살려낸다. 그 덕분에 무브먼트의 구조도 쉽게 볼 수 있다.
와인딩 모듈과 이스케이프먼트 모듈로 크게 구분된 것이 한눈에 들어오며 정지상태의 밸런스에서는 레귤레이터나 조정용 스크류를 찾아 볼 수 없다.
무브먼트의 패턴은 표면 자체를 건드리는것이 아니라 디지털 프린트 방식으로 이뤄진다.
우선 시스템 51은 기계식 스와치로 부를 수 있는 가격표를 달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만 3천원, 다른 나라에서는 200달러 내외로 판매될 시스템 51은 스위스 기계식 시계로는 거의 불가능한 가격입니다. (가장 저렴하다고 할 수 있는 ETA의 칼리버 2824나 2824의 제네릭이 탑재된 모델의 최저가격을 봤을 때) 중국을 제외한 저가 기계식 무브먼트를 장악하는 일본으로도 쉽지 않은 가격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앞서 말한 기계식으로서의 최소 부품 수 51개(그 중 40개의 부품이 직접 용접되며 하나에 무브먼트에필요한 용접 시간은 30초가 채 걸리지 않습니다), 5개의 모듈화(배럴과 기어 트레인을 포함한 메인 플레이트 모듈, 이스케이프먼트 모듈, 와인딩 모듈, 크라운 모듈, 로터), 로터에 사용된 단 한 개의 스크류, 과감한 플라스틱 부품의 사용, 완전한 자동화 조립공정에 의해서죠. 여기에 레귤레이터가 없이도 하루 ±10초의 오차, 파워리저브가 90시간에 달합니다. 오차는 솔직히 가격대비 경쟁상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이고 90시간 파워리저브는 티쏘의 파워매틱80이나 해밀턴의 H-10 시리즈의 80시간 파워리저브가 머리 속에 떠오를 뿐입니다. 스위스 메이드의 가치가 헷갈리는 요즘 100% 스위스 메이드라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저렴하다고 느껴집니다. 누군가 기계식 입문용 모델을 찾는다는 질문을 한다면 여러 메이커의 다양한 모델로 의견이 나뉠 겁니다. 하지만 20만원 미만이라면 조건이라면 대답은 시스템 51 하나로 모아질 수 밖에 없을 만큼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이는 기계식이 비싸 사지 못했던 연령층에게도 접근 가능한 수준이기 때문에 기계식의 보급연령이나 보급률을 조금 더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좀 오버한다면 시스템 51로 처음으로 기계식을 경험한 청년이 몇 십 년 뒤에 브레게를 사게 되는 과정의 밑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맡을 수도 있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스와치의 구조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이미지. 투명한 케이스에 봉입되어 무브먼트에 접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시스템 51 역시 마찬가지로 밀봉된 구조
세컨드 워치의 감각을 잘 살려낸 에디션
두 번째로는 세컨드 워치의 요건을 그대로 표방합니다. 10만원 내외의 시계가 일회용이라고 한다면 감정적으로 이해가 안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스와치는 일회용입니다. 물론 일회용이라고 해서 한번만 쓰고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시계에 대입한 일회용은 오버홀이나 수리 같은 메인터넌스가 불가능한 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와치의 구조를 보면 무브먼트를 플라스틱 케이스로 밀봉한 형태로 배터리 부분을 제외하면 케이스에 손상을 입히지 않는 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운 좋게 양품을 뽑았고 관리를 잘 했다면 배터리를 교환하면서 오래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 전에 질리고 말 겁니다. 아니면 시계줄이 끊어졌던지요. 시스템 51은 이를 그대로 따르고 있어 케이스를 열 수 없는 구조입니다. 스와치와 마찬가지로 일회용 기계식 시계인 셈이죠. (물론 2년간 보증이 이뤄지므로 무브먼트 자연 고장 시에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마 케이스 전체를 교체하는 형식이 되겠죠) 스크류를 하나 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수의 부품이 본딩에 의해 고정되기 때문일 것이며 분해가 되지 않는 다는 이것 또한 일회용이라는 근거가됩니다. 감정적으로 일회용이라는 것은 조금 슬프지만 또 그래야만 합니다. 시스템 51은 아직 네 가지 모델 밖에 없지만 보통의 기계식 시계와 달리 팝아트 같은 디자인을 다이얼뿐 아니라 무브먼트에도 적용하고 있어 시각적으로 충분히 즐길 거리가 있습니다. 새로운 모델이 나온다면 다이얼과 무브먼트를 모두를 캔버스처럼 활용하는 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외관만 본다면 쿼츠가 탑재된 스와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격이 상대적으로 쿼츠보다는 비싸기는 해도 세컨드 워치 감각으로 다른 디자인의 시계를 여럿 살 수도 있고 시즌마다 새 모델을 컬렉팅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기계식 유저들로부터 의문은 없을까요? 이렇게 저렴하게 기계식을 만들 수 있다면 지금의 기계식은 너무 비싼 게 아닌가 하는가 말이죠. 시스템 51은 이것을 명확하게 경계 짓고 있습니다. 기계식의 본질적인 가치라고 여겨지는 무브먼트 피니시의 아름다움과 유지보수를 하며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는 (유한정의?) 영속성은 시스템51에서 쏙 빠져있습니다. 거기에 톱니바퀴만으로 구현하는 경이로운 고급 기능도 앞으로의 시스템 51에서 볼 수 없는 확률이 더 높죠. 때문에 시스템 51을 질투할 필요는 없습니다. 재미있고 부담없는 기계식 장난감이 하나 나왔다고 하는 게 더 좋겠죠.
이렇듯 시스템 51은 시계를 잘 알건 모르건, 기계식 시계를 가지고 있건 그렇지 않건.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는 시계입니다. 곧 이 호기심이 런칭과 동시에 환영으로 바뀌지 싶은데요. 직접 착용해 본다면 날짜가 퀵 체인지 방식이 아니고 시간을 뒤로 돌린 뒤 다시 앞으로 돌릴 때 초침이 약간 점핑하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 할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20만원이 안 되는 기계식 시계에서 흠이라고 보기 어렵죠. 그보다 20만원이 안 되는 기계식 시계가 주는 만족이 훨씬 크게 다가올 거라고 봅니다. 화려한 패턴의 로터가 뱅글뱅글 도는 재미, 오메가 씨마스터 플래닛 오션 대신 주말에는 플라스틱 기계식 시계의 가벼움과 새로움을 느껴보는 재미, 나의 기계식 시계 취미를 여자친구와 어렵지 않게 공유할 수 있는 재미, 세뱃돈을 탈탈 털어 처음으로 기계식 시계의 밸런스가 진동하는 경험을 하는 재미는 스와치에서 볼 수 없지만 기계식 스와치인 시스템 51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자 앞으로 우리에게 가져다 줄 많은 재미의 일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문에 시스템 51이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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