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아일톤 세나 서거 30주기를 기리며)
- 막스 베르스타펜. 또 당신입니까……(사진 출처 : 오라클 레드불 레이싱)
지난 5월 19일 일요일 한국 시간 오후 10시 F1 에밀리아 로마냐 그랑프리(舊 산마리노 그랑프리) 레이스가 펼쳐졌습니다. 이번에도 우승은 오라클 레드불 레이싱의 막스 베르스타펜이 차지했습니다. 메르세데스-AMG 페트로나스 포뮬러 원 팀이 2010년대를 지배했다면 2020년대는 그야말로 오라클 레드불 레이싱의 독주체제입니다. 희망고문을 일삼는 스쿠데리아 페라리 덕분에 필자는 긴 시간을 고통 받고 있습니다. F1 에밀리아 로마냐 그랑프리에 맞춰 대규모 업데이트 패키지를 적용하며 “이번에는 다르다”를 시전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용두사미로 끝나버렸습니다. 그나마 맥라렌 포뮬러 원 팀의 란도 노리스가 경기 막판 뒷심을 발휘하며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어 준 것을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F1 에밀리아 로마냐 그랑프리가 열린 이몰라(Imola) 트랙은 몬자(Monza)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홈 그랑프리입니다. 이곳은 1994년 5월 1일 아일톤 세나가 경기 중 사망한 비극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 추모 행사를 위해 무려 자신이 소장한 맥라렌 MP4/8을 가져온 세바스티안 베텔(사진 출처 : F1)
F1 에밀리아 로마냐 그랑프리 주간에는 아일톤 세나 사망 30주기를 맞아 추모 행사가 열렸습니다. 드라이버들은 아일톤 세나의 헬멧과 유사한 디자인의 헬멧 또는 발라클라바를 착용했습니다. 은퇴한 뒤로도 F1 주변을 지박령 마냥 떠돌고 있는 세바스티안 베텔은 아일톤 세나가 1993년에 몰았던 맥라렌 MP4/8을 타고 트랙을 돌며 요절한 영웅을 기렸습니다.
- 레인 마스터 & 모나코 마스터 아일톤 세나
F1의 팬이 아니더라도 아일톤 세나의 이름을 들어본 분들은 있을 겁니다. 브라질에서 국민영웅으로 추앙 받는 그의 위상은 축구 황제 펠레 못지 않다고 합니다. 1984년부터 1994년까지 F1 드라이버로 활약한 아일톤 세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3번이나 월드 챔피언십을 거머쥐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4회 월드 챔피언 알랭 프로스트와의 라이벌리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엄청난 실력에 어울리지 않는 불공평한 외모와 맹렬한 투쟁심 그리고 끔찍한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비극적 결말로 인해 그는 F1의 아이콘으로 등극했습니다.
- 니키 라우다에게 영업 중인 잭 호이어
1963년 저 유명한 까레라(Carrera)를 선보인 호이어(現 태그호이어)는 일찌감치 모터스포츠를 자사의 DNA로 내세웠습니다. 요 시페르(Jo Siffert)를 포함해 여러 드라이버들은 잭 호이어(Jack Heuer)의 영업에 넘어가 호이어의 시계를 착용했습니다. 더 나아가 F1 자동차나 드라이빙 수트에는 호이어의 로고를 부착했습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호이어였으나 쿼츠 시계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몰락의 기로에 섭니다. 1986년 1월 태그(Techniques d’Avant Garde) 그룹이 피아제로부터 호이어를 완전히 인수하면서 호이어는 태그호이어로 다시 태어납니다. 당시 태그 그룹은 포르쉐와 함께 F1 자동차의 1.5리터 터보 엔진을 제작해 맥라렌에 공급했습니다. 이마저도 부족했는지 맥라렌의 경영권까지 획득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태그 그룹의 CEO인 만수르 오제가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태그 그룹에 속한 태그호이어는 졸지에 1980년대부터 두각을 나타낸 맥라렌의 파트너가 됐습니다. 헌데 이게 웬일. 1988년 아일톤 세나가 맥라렌으로 팀을 옮기면서 태그호이어는 미래의 챔피언과 교류할 기회를 거저 얻습니다.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는 것은 당시 태그호이어를 두고 하는 말일 겁니다.
- S/el 디지털 쿼츠 크로노그래프(Ref. S25706C)
F1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은 태그호이어는 개성 넘치는 시계를 연달아 출시합니다. 대표적인 시계가 바로 태그호이어 체제 하에서 최초로 개발된 S/el입니다. S/el은 스포츠(Sports)와 엘레강스(Elegance)라는 단어를 조합해서 만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스포츠 워치임에도 매우 우아한 형태를 지녔습니다. 1978년 발표한 다이버 워치 1000과 후속작인 2000, 3000 시리즈가 예상외로 흥행하며 심폐소생술을 받은 태그호이어는 태그 그룹에 인수된 이후 S/el을 필두로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하고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야심 차게 기획한 S/el 컬렉션은 당연하게도 태그호이어의 플래그십 컬렉션이라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S/el은 1987년부터 1999년까지 12년간 브랜드의 간판으로 활약했습니다. 쿼츠,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가죽 스트랩까지 총 7개의 모델이 포트폴리오를 채웠습니다. 남성용, 중간, 여성용까지 총 3개의 크기로 세분화했으며, 스테인리스 스틸 뿐만 아니라 골드 버전도 선보였습니다. S/el은 오늘날 대부분의 스포츠 워치가 공식처럼 따르고 있는 무광 및 유광 마감의 교차 적용을 적극 활용한 모범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 S/el 디지털 쿼츠 크로노그래프를 착용한 아일톤 세나(사진 출처 : 태그호이어)
태그호이어의 복안은 S/el 컬렉션을 통해 스포츠 워치도 멋지고 고급스러울 수 있다는 인식을 심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만 해당 카테고리를 주력으로 삼고 있는 자사의 가치가 오를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제품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태그호이어와 사람들을 이어줄 강력한 매개체가 필요했습니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은 아일톤 세나였습니다. 아일톤 세나는 가죽 스트랩을 연결한 S/el 디지털 쿼츠 크로노그래프(Ref. S25706C)를 애용했습니다. 투톤 케이스와 2개의 디지털 창이 있는 에그 쉘 컬러 다이얼을 매칭한 이 시계는 1/100초까지 측정이 가능했습니다. 내부에는 ETA에서 생산한 쿼츠 칼리버 ETA 251.251이 담겨 있었습니다.
- 아일톤 세나가 등장한 태그호이어 광고
1989년부터 광고에 아일톤 세나를 등장시킨 태그호이어는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몸소 실감했습니다. S/el는 물론이고 태그호이어의 거의 모든 제품이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아일톤 세나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일본에서는 매출이 폭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아일톤 세나는 1993년을 끝으로 자신에게 영광을 안겨준 맥라렌에 이별을 고합니다. 규정이 바뀌면서 맥라렌의 자동차가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승을 위해 위닝 카를 원했던 아일톤 세나는 윌리엄스로 전격 이적합니다. 여담으로 아일톤 세나는 1993년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나기 전 맥라렌 테스트 팀 소속 메카닉 론 펠랏에게 자신의 S/el 디지털 쿼츠 크로노그래프를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훗날 이 시계는 본햄 경매에서 판매됐습니다.
- 6000 시리즈를 착용한 아일톤 세나(사진 출처 : 태그호이어)
멱살 잡고 브랜드를 하드 캐리한 다이버 워치의 뒤를 이어 우아한 스포츠 워치를 표방한 고급 시계 S/el, 컬러풀한 케이스에 쿼츠 무브먼트를 장착한 포뮬러 1이 연달아 성공하면서 태그호이어는 경영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재정 상황이 호전되자 태그호이어는 고급스러운 스포츠 워치를 개발하는데 집중했습니다. 대표적인 모델이 1992년에 나온 6000 시리즈입니다. 요르그 하이섹이 디자인한 6000 시리즈는 태그호이어가 출시한 기존의 다이버 워치와 마찬가지로 여섯 가지 특징(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 스크루 다운 크라운, 200m 방수, 단방향 회전 베젤,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와 다이버 익스텐션 기능을 갖춘 브레이슬릿, 뛰어난 가독성을 지닌 다이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골드와 플래티넘 같은 귀금속으로 케이스를 제작하기도 했으며,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은 무브먼트를 채택하는 등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했습니다. 6000 시리즈는 수명이 길지는 않았으나 격동의 시대에 탄생한 태그호이어 다이버 워치 시리즈의 완결판이자 까레라와 모나코라는 아이코닉 워치가 부활할 수 있게끔 발판을 마련해준 의미 있는 시계였습니다.
- 6000 시리즈 세나 리미티드 에디션
필자가 6000 시리즈를 언급한 이유는 당연히 아일톤 세나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아일톤 세나는 S/el가 함께 6000 시리즈도 애용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은 ETA 무브먼트가 담긴 6000 시리즈(Ref. WH5151)를 착용했습니다. 아일톤 세나는 S/el과 마찬가지로 6000 시리즈도 브레이슬릿이 아닌 가죽 스트랩 모델을 선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필자의 킹리적 갓심에 의하면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F1 드라이버다운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6000 시리즈를 착용한 아일톤 세나(사진 출처 : 태그호이어)
아일톤 세나와 태그호이어의 끈끈한 관계는 아일톤 세나가 맥라렌을 떠난 뒤에도 계속됐습니다.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기 이틀 전인 1994년 4월 29일, 아일톤 세나와 태그호이어는 6000 시리즈 세나 리미티드 에디션 출시 계약을 체결합니다. 6000 시리즈 세나 리미티드 에디션은 아일톤 세나가 직접 관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태그호이어 시계입니다. 3가지 크기로 만들어진 이 시계는 각각 1000개씩 총 3000개 한정 생산됐습니다. 체커드 플래그를 모티프로 제작한 다이얼, 하단 러그, 케이스백에는 아일톤 세나를 상징하는 알파벳 S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6000 시리즈 세나 리미티드 에디션의 출시는 아일톤 세나의 사망으로 인해 같은 해 10월로 연기됐습니다. 살아생전 취약 계층 아동을 위해 막대한 금액을 기부했던 고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태그호이어와 세나 재단은 6000 시리즈 세나 리미티드 에디션 판매금의 일부를 기부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사고 이후 아일톤 세나를 공식 앰버서더로 임명한 태그호이어는 현재까지 아일톤 세나 에디션을 꾸준히 제작하며 의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절치부심 재기를 노리던 어느 시계 브랜드와 낭만 치사량을 초과한 당대 최강 드라이버의 만남. 시계를, F1을 그리고 아일톤 세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실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겁니다. 아일톤 세나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30년이 흐른 지난 5월 1일, 넷플릭스는 아일톤 세나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세나>의 공식 티저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아일톤 세나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전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6부작 드라마라고 합니다. 아일톤 세나 역은 브라질 배우 가브리엘 레오네가 맡았습니다. 넷플릭스는 해당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현실 고증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데요. 극 중 아일톤 세나가 태그호이어의 시계를 착용한 모습이 나올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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