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네라이 매뉴팩처 방문기
파네라이(Panerai)는 이탈리안 소울을 바탕으로 스위스 정통 워치메이킹을 구사합니다. 영혼이 머무는 이탈리아 본사에서 디자인 및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고, 스위스 뇌샤텔에 터를 잡은 매뉴팩처에서 실질적인 워치메이킹을 담당합니다. 따라서 현재 파네라이의 모든 시계는 스위스 뇌샤텔에서 탄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네라이 뇌샤텔 매뉴팩처 모형
-파네라이 COO 제롬 카바디니(Jérôme Cavadini)
파네라이 시계의 본거지인 뇌샤텔 매뉴팩처는 2002년 처음 문을 열었고, 지난 2014년 같은 뇌샤텔 안에서 장소를 옮겨 새롭게 오픈했습니다. 새로운 매뉴팩처는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신식 시설답게 최첨단 설비가 곳곳에서 가동 중입니다. 친환경 시스템도 주목할 만합니다.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태양열 및 지열을 이용한 히트 펌프(Geothermal pump)로 재생에너지를 생성하는가 하면, 빗물을 모아 각종 용수로도 활용한다고 합니다. 매뉴팩처 규모는 약 10,000m². 한 건물에 약 25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뇌샤텔 매뉴팩처 투어는 특별히 브랜드 COO(Chief Operating Officer) 제롬 카바디니가 맡아서 진행했습니다. 파네라이에서 14년간 근무한 베테랑의 안내를 따라 처음으로 향한 곳은 프로덕션 구역입니다. 각종 대형 장비가 가득한 이곳에서는 주로 무브먼트의 메인 플레이트 및 브릿지, 케이스를 생산합니다. 배럴, 휠, 이스케이프먼트를 비롯한 무브먼트 세부 파트, 사파이어 크리스탈 글라스, 크라운과 같은 특정 부품은 외부로부터 공급받는다고 하네요. 나머지는 모두 이곳에서 제작합니다. 총 11대의 최신 CNC 머신이 1년에 약 8만개의 부품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CNC 머신으로 완성한 메인 플레이트(로듐 도금 전)
-CNC 머신에서 메인 플레이트 및 브릿지에 구멍을 뚫는 도구.
좀더 세밀한 작업은 스틸(위)보다 세라믹 툴(아래)로 진행한다고 한다.
-가공 전후의 미들 케이스
-조립 전의 베젤, 케이스백, 크라운 가드
프로덕션 섹션 한 켠에는 파네라이 무브먼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틴 브러시드 가공을 자동으로 하는 기계도 있습니다. 뇌샤텔 매뉴팩처와 같은 지역의 엔지니어링 스쿨이 공동으로 개발한 이 머신은 로봇 암(Arm)에 의해 작동합니다. 일종의 스캐너가 특정 브릿지가 어떤 파트인지 구분하고, 로봇 암이 그를 집어 2개의 특수한 롤러에 차례대로 부품을 맞닿게 하면서 표면의 결을 만듭니다. 자그만 먼지 하나로도 작업을 망칠 수 있기에 철저하게 관리한다고 합니다. 브릿지 홀에 주얼을 배치하고 표면에 브랜드명, 주얼수 등 각종 정보를 표시하는 작업도 기계를 통해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하나의 기계당 한 사람이 붙어서 일일이 관리를 하긴 합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래버러토리(Laboratory). 파네라이는 문자 그대로 이곳에서 다양한 실험을 진행합니다. 가령, 크라운으로 조작을 얼마나 하면 시계에 이상이 생기는지, 시계가 어느 정도의 충격이나 온도, 자기장, 압력을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바탕으로 실제 무브먼트 또는 케이징을 완료한 시계를 한계로 밀어붙입니다. 특히, 시간/날짜 조작, 와인딩 등 사용 정도와 누적된 세월에 따라 무브먼트에 부화가 걸리는 실험의 경우 기계가 자동으로 진행합니다. 즉, 기계가 크라운 및 푸시 버튼을 조작하고 로터를 돌리는 등 쉬지 않고 무브먼트(또는 시계)를 혹사시킵니다. 시뮬레이션 기간은 평균적으로 10년을 가정한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이 10년동안 한 시계를 착용하고 조작했을 때 무브먼트의 상태를 보는 겁니다. 물론, 기계는 10년의 세월을 금방 뛰어넘습니다. 대략 2일이면 에이징 시뮬레이션이 끝납니다. 현행 모델은 물론 앞으로 출시될 모든 시계의 프로토타입이 이와 같은 실험 절차를 거칩니다. 테스트를 완료한 모델에 한해서만 공식 출시 여부가 결정됩니다.
-날짜 조작 한계 테스트
-극한의 압력 테스트에 글라스가 깨진 섭머저블
무브먼트 및 시계를 조립하는 어셈블리(Assembly) 세션은 20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합니다. 먼저, 조립 전의 무브먼트는 RFID가 내장된 키트와 하나씩 짝을 이룹니다. 각 키트는 워치메이커 테이블과 연결된 컨베이터 벨트를 따라 이동합니다. 워치메이커는 테이블에서 키트를 받아 자신에게 할당된 조립을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기면 됩니다. 직접 보면 단계별로 상당히 체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립 과정의 무브먼트는 RIFD 덕분에 관련 정보와 이동경로를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완성된 무브먼트는 CLA 크로노메트리(Chronométrie)라는 또 다른 최첨단 장비로 이동합니다. 스위스의 CLA(Clinical Laboratory Automation) SA가 개발한 이 머신은 무브먼트의 성능을 자동으로 점검하고 모니터링합니다. 각 무브먼트는 일단 와인딩 방식에 따라 수동과 자동으로 분류됩니다. 로봇 암이 이를 인식한 다음 각 무브먼트를 와인딩하는 파트로 옮깁니다. 수동은 특정 기계를 통해 와인딩하고, 오토매틱은 자동으로 돌아가는 넓은 원형 플레이트에 여러 개를 놓고 한꺼번에 와인딩합니다. 풀 와인딩 상태의 무브먼트는 로봇 암에 의해 테스트 프로세스로 곧장 옮겨집니다. 테스트는 6가지 자세차를 기준으로 무브먼트가 멈출 때까지 진행됩니다. 이때 CLA 크로노메트리에 내장된 윗치(Witschi) 테스터기가 비트 에러, 진폭, 오차 등 무브먼트 성능을 점검합니다. 각 무브먼트의 일 허용오차는 -4~+6초. 스위스 공식 크로노미터 기관(COSC) 인증의 기준치와 동일합니다. 문제가 있는 무브먼트는 따로 분류되고, 워치메이커는 RFID를 통해 그를 찾아 재조정 작업을 진행합니다.
-RFID 키트에 결합하기 전 무브먼트 하우징
-풀 로터 고정 작업
-컨베이어 벨트와 연결된 워치메이커 테이블
-CLA 크로노메트리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대량으로 와인딩하는 원판
지금부터는 기계의 개입이 최소화됩니다. 테스트를 통과한 무브먼트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어셈블리 공정이 이루어집니다. 숙련된 장인이 일일이 무브먼트에 다이얼을 결합하고 각 축에 핸즈를 고정합니다. 바로 옆에서는 케이징 작업이 한창입니다. 다이얼의 먼지를 제거한 다음 베젤 및 미들 케이스를 먼저 결합합니다. 이후 루미노르나 섭머저블의 경우 케이스 측면에 특유의 크라운 가드를 나사로 단단히 고정합니다. 다시 먼지와의 전쟁입니다. 무브먼트 면을 무결한 상태로 만든 뒤 케이스백을 닫고 케이징 작업을 마무리합니다.
-다이얼 결합 작업
-핸즈 고정 작업
-다이얼 먼지 제거
-케이징 작업
-크라운 가드 고정 작업
완성된 시계는 옆 공간으로 옮겨져 방수 테스트를 받습니다. 각 제품은 기압 테스트를 통해 케이스로 공기가 침투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먼저 확인합니다. 10개씩 한 세트로 진행되는 테스트가 끝나면 그제서야 물이 가득찬 챔버로 이동합니다. 본격적인 방수 테스트에서는 기준치보다 25% 이상의 수압을 견뎌야 합격 판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령, 300m 방수 시계라면 수심 375m 이상의 압력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전통적인 ‘물방울 테스트’도 진행하곤 합니다. 먼저, 방수 테스트를 마친 시계를 꺼내 60℃ 이상으로 10~15분간 가열한 뒤 다이얼 글라스에 물방울을 떨어뜨립니다. 이상이 있는 시계라면 케이스 내부로 습기가 침투해 글라스 안쪽에 결로가 생기게 됩니다. 문제가 없는 시계는 드디어 마지막 관문으로 향합니다. 최종 검수를 진행하는 이곳에서 케이스에 스트랩을 체결하고 파네라이 특유의 하얀색 보호캡을 씌워 작업을 마무리합니다.
-기압 테스트
-방수 테스트를 기다리는 루미노르
-스트랩 체결 전 퀄리티 컨트롤
퀄리티 컨트롤 세션 바로 옆에는 오뜨 오롤로제리(Haute Horlogerie) 파트가 있습니다. 고급 시계라는 의미대로, 애뉴얼 캘린더부터 퍼페추얼 캘린더, 미닛 리피터 투르비용에 이르기까지, 파네라이의 컴플리케이션이 이곳에서 탄생합니다. 첨단 장비의 흔적은 이 구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무브먼트 조립부터 다이얼 결합, 케이징, 성능 체크 및 조정에 이르기까지, 숙련된 워치메이커 한 명이 하나의 시계를 완성합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워치메이킹이 이루어지는 만큼, 각 워치메이커의 테이블에는 적막이 흐릅니다.
-라디오미르 애뉴얼 캘린더 PAM01364 제작 과정
-투르비용 칼리버 P.2015/T 제작 과정
마지막 코스는 트레이닝 센터입니다. 베테랑 트레이너가 상주하는 이곳에서는 무브먼트를 분해 및 재조립하는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합니다. 수술대에 오른 무브먼트는 P.3000입니다. 좀더 컴팩트한 사이즈의 P.6000에 자리를 점점 내주고 있지만, 과거 P.3000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수동 워크호스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전방보다 후방에서 훌륭한 교본으로 소임을 다하고 있는 셈입니다. 일반적인 워치메이킹 클래스에서는 보통 밸런스를 분해하는 과정은 생략하는 편인데, 파네라이 마스터 클래스에서는 브릿지부터 배럴, 기어트레인, 이스케이프먼트, 밸런스까지 모두 분해하고 재조립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게 또 파네라이 인하우스 무브먼트라서 더 뜻 깊었던 것 같습니다. 범용 무브먼트로 클래스를 진행하는 브랜드도 많으니까요. 물론, 매뉴팩처 투어에서 워치메이킹 클래스까지 진행하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10년 이상 경력의 베테랑 트레이너.
마르코 브루노(Marco Bruno, 왼쪽), 페르난도 폰세카(Fernando Fonseca, 오른쪽)
-파네라이 수동 인하우스 칼리버 P.3000
-기어트레인 분해 과정
-분해가 끝난 P.3000의 주요 부품
-브릿지 재조립 과정
-재조립이 끝난 P.3000
파네라이는 뇌샤텔 매뉴팩처 투어를 통해 대부분의 내부 시설과 워치메이킹 과정을 숨김없이 공개했습니다. 몇몇 브랜드에서 공개를 꺼리는 자동화 공정도 오픈 마인드로 소개했고요. 그렇다고 파네라이가 첨단 장비에 의존해 시계를 만드는 건 아닙니다. 단지 사람의 손을 굳이 필요치 않는 공정을 자동화 시스템으로 대체해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여전히 사람이 부품을 일일이 조립해 전통적인 기계식 시계를 만듭니다. 기계는 말 그대로 거들 뿐입니다. 혹자는 정통 워치메이킹에 기계가 개입되는 걸 여전히 꺼리곤 합니다. 무엇이 정답이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순 없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시대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파네라이 뇌샤텔 매뉴팩처럼 인간과 기계가 적절한 비율로 공존할 수 있다면, 이상적인 그 시스템에 21세기 워치메이킹의 또 다른 해답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