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쉐론 콘스탄틴 메티에 다르 시리즈 2편-인그레이빙
자고로 이름난 하이엔드 시계제조사라면,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야 합니다. 하이엔드 브랜드를 통해 시계 그 이상의 ‘작품’을 기대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각 시계제조사들은 그에 화답하기 위해 메티에 다르(Métiers d'art, 예술공예)라는 자신들만의 장르를 통해 예술혼을 불태우곤 합니다. 에나멜링, 인그레이빙, 젬세팅 등 예술을 구현하는 기법도 가지각색입니다. 밀리미터의 공간에서 각기 예술이 펼쳐지기에 극도의 정교함을 요하는 건 물론입니다.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라면 쉽게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브랜드마다 그에 맞는 장인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각 장인은 또 시계 업계에서 한 명의 예술가로 칭송받곤 합니다. 앞서 바쉐론 콘스탄틴 메티에 다르-에나멜링 편(>>관련 컬럼 바로가기)에 등장하는 에나멜러가 다이얼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면, 이번 편에서 조명할 인그레이버는 금속을 깎고 파내서 작품을 완성하는 조각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그레이빙이 적용된 바쉐론 콘스탄틴 포켓 워치와 인그레이빙 도구
오늘날 인그레이빙은 하이엔드 워치메이킹에서 필수적인 기법입니다. 메티에 다르와 같은 예술품에서 빈번하게 활용되는 건 물론 무브먼트 장식에도 널리 쓰이기 때문입니다. 인그레이빙으로 완성한 결과물은 또 무브먼트 부품처럼 폴리싱 및 베벨링을 일일이 거쳐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습니다. 뷰린(Burin)이라 부르는 조각칼, 조각용 끌 등 주요 인그레이빙 도구는 14세기에 처음 나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형태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을언정 쓰임새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그레이버는 각 도구를 적재적소에 활용해 금속을 파내고 깎아서 도안을 만드는데요. 장인의 손끝 감각이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섬세한 이 인그레이빙에도 역시나 다양한 기법이 존재합니다.
#주요 인그레이빙 기법
Line Engraving 라인 인그레이빙
가장 기본적인 인그레이빙 기법으로 15세기 유럽에서부터 성행했습니다. 조각칼을 이용해 도안대로 금속판을 파내는 작업을 말하는데요. 인그레이빙으로 하나의 입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보면 쉽습니다. 과거의 스탬프 또는 지폐를 재현하는 프린팅 기법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대표작품: 캐비노티에 메카니크 소바주-미스테리어스 애니멀 타이거
대나무 숲에 몸을 숨긴 신비로운 호랑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 호랑이를 둘러싼 식물의 줄기 및 잎사귀 하나하나를 라인 인그레이빙으로 정교하게 표현했다.
Taille de Joue 쥬-에칭 인그레이빙
프랑스어로 Taille는 '깎는다', Joue는 '측면'을 의미합니다. 즉, 바쉐론 콘스탄틴이 말하는 쥬-에칭은 측면 인그레이빙을 가리킵니다. 에칭이 판화의 일종이기에 '측면 판화'라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가로로 긴 케이스 측면에 판화를 그릴 때는 조각칼을 기울여 보다 넓은 폭으로 금속을 파내는 게 좀 더 효과적입니다.
대표작품: 캐비노티에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피닉스
총 15개 기능을 지원하는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케이스 측면의 화려한 인그레이빙 장식 역시 돋보인다. 가운데 피닉스는 입체적인 양각으로 표현하고, 비늘과 깃털로 이루어지는 배경은 음각을 활용해 털 한올한올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Pounced Ornament 파운싱 장식
양각 효과를 극대화하는 인그레이빙 기법입니다. 도안을 제외한 주변부를 모두 파내 입체감을 부각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그레이버는 파운싱 작업 시 끝이 날카로운 드라이 포인트 도구로 도안의 밑그림을 그린 다음, 조각칼로 나머지 부분을 여러 번 파냅니다. 한번 조각칼을 들이대면 돌이킬 수 없기에 사전에 치밀한 계산을 깔고 작업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대표작품: 메티에 다르 트리뷰트 투 그레이트 시빌라이제이션-다리우스의 사자상
루브르 박물관과의 협업으로 고대 문명의 벽화를 다이얼로 소환한 시리즈. 파운싱 장식 기법으로 입체적인 사자 모티프를 만들고, 라인 인그레이빙으로 사자의 눈, 갈기와 같은 세부를 정교하게 묘사했다.
Chasing 체이싱
소재를 깎고 파내는 게 아니라 끝이 무딘 소형 끌이나 해머로 금속을 누르고 두드려 변형시키는 기법을 일컫습니다. 특정 장식에서 다양한 높이와 형태의 패턴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곤 합니다. 특히, 동물의 비늘이나 올록볼록한 패턴을 입체적으로 나타내기에 좋습니다.
대표작품: 트래디셔널 투르비용
기존 트래디셔널 투르비용에 기요셰 및 화려한 인그레이빙 장식을 더한 아트 피스. 파운싱 및 라인 인그레이빙으로 신화 속 동물 '기린(Qilin)'의 도안을 완성하고, 체이싱 기법으로 동물의 올록볼록한 비늘을 묘사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마스터 인그레이버는 “다이얼이나 케이스 측면에 인그레이빙 모티프를 구현할 때 빛과 볼륨, 그리고 대비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때로는 움직임이나 감정, 욕망을 암시하도록 하기도 한다. 하이 워치메이킹에서 인그레이빙은 하나의 미니어처 조각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라며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부심을 나지막히 드러냅니다. 하이엔드 시계제조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바쉐론 콘스탄틴은 그가 말하는 조각 작품을 지난 18세기부터 만들어 왔습니다.
#주요 워치 셀렉션
-인그레이빙 포켓 워치 Ref. 10727
메종의 아카이브에 인그레이빙 장식이 처음으로 등장한 건 1755년입니다. 다만, 그때 제품은 시계 외장이 아니라 무브먼트의 일부 브릿지에만 특정 문양을 새긴 회중시계였습니다. 흔히 아는 예술품과는 거리가 멀었죠. 조각 작품이라 부를 만한 시계가 나온 건 그로부터 약 20년 뒤입니다. 당시 바쉐론 콘스탄틴은 라인 인그레이빙을 활용해 처음으로 회중시계의 커버와 케이스백에 화려한 장식을 새기게 됩니다. 이때 나온 시계가 메종의 역사에도 선명한 궤적을 남긴 Ref. 10727(1778년)입니다. 주요 장식은 가운데 비둘기 인그레이빙을 중심으로 반복적인 소용돌이 무늬가 하나의 윤곽을 이룹니다. 이처럼 특정 무늬가 하나의 프레임처럼 어떤 형상을 둘러싸는 장식을 가리켜 카르투슈(Cartouche)라 합니다. 원래 고대 이집트 시대에 국왕이나 신의 이름을 석판에 기록하는 용도로 활용했던 카르투슈는 훗날 바로크 건축양식에 영향을 끼친데 이어 지금은 하나의 디자인 양식으로 널리 쓰이곤 합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Ref. 10727 이후에도 해당 양식을 인그레이빙 장식으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플로럴 모티프와 같은 문양으로 윤곽을 만들고 가운데 또 다른 동물이나 수렵 풍경을 장식하거나 특정 가문의 문장을 새기는 식이었습니다.
-인그레이빙 포켓 워치 Ref. 11837
Ref. 10727이 카르투슈 양식에 음각을 활용한 작품이었다면, 그로부터 약 50년 뒤에 나온 포켓 워치 Ref. 11837(1827년)은 양각 인그레이빙으로 입체감을 한껏 살린 작품입니다. 케이스 전체에 아르누보 풍의 식물 모티프를 새기고, 파낸 부분은 또 블랙 에나멜로 채웠습니다. 19세기에는 이와 같은 인그레이빙 기법으로 제작한 포켓 워치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케이스와 백커버의 넓은 면적이 특정 장식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려 넣기에 딱 좋았기 때문입니다. 손목시계 시대인 오늘날은 회중시계 자체가 귀하지만, 간혹 회중시계가 나온다면 그때 그 시절처럼 각종 장식으로 케이스를 치장하며 하나의 예술품으로 탈바꿈하곤 합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지난 2021년 출시한 캐비노티에 웨스트민스터 소네리-트리뷰트 투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대표적입니다.
-캐비노티에 웨스트민스터 소네리-트리뷰트 투 요하네스 베르메르
미닛 리피터에 그랑 소네리까지 지원하는 ‘캐비노티에 웨스트민스터 소네리-트리뷰트 투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주문제작으로 이뤄지는 캐비노티에 컬렉션답게 단 한 명을 위해 제작된 유니크 피스입니다. 제품명대로, 네덜란드의 천재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The Girl with a Pearl Earring)'가 케이스백 커버를 가득 채웁니다. 케이스 소재는 옐로우 골드, 사이즈는 무려 직경 98mm, 두께 32.6mm에 달합니다. 해당 고객이 처음부터 메종의 역사적인 창립 260주년 에디션 Ref. 57260(직경 98mm)과 비슷한 크기의 시계를 원했다고 합니다. 베젤 및 케이스 표면은 역시나 화려한 인그레이빙 장식으로 마감했습니다. 특히, 케이스 측면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예술품에서 볼 법한 아칸서스(Acanthus) 잎사귀를 정교하게 묘사한 것이라 합니다. 베젤과 케이스백 테두리는 튤립을 반복적으로 새기며 하나의 무늬처럼 표현했습니다. 12시 방향 크라운에는 그와 같은 장식과 함께 고리 양옆에 포효하는 사자를 입체적으로 조각했습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에 따르면, 각 인그레이빙 작업에만 총 5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다고 합니다.
-캐비노티에 웨스트민스터 소네리-트리뷰트 투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측면 장식
회중시계는 이처럼 케이스 전체를 자유롭게 활용해 장인의 예술혼을 투영할 수 있지만, 손목시계는 그에 비해 케이스 공간의 활용도가 베젤 및 미들 케이스로 제한됩니다. 시계를 손목에 착용하면, 케이스백은 사실상 없는 공간으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예술가의 창의력이 발현될 가장 넓은 도화지가 사라지는 셈이죠. 대안은 역시나 그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훤히 드러나는 다이얼이 마침내 예술가들의 주무대로 자리잡게 됩니다. 각 시계제조사들은 이를 베이스로 또 한 번 예술혼을 불태우는데요. 바쉐론 콘스탄틴은 한 발 더 나아가 시계를 초월한 작품으로만 구성된 별도의 메티에 다르 컬렉션까지 선보이기에 이릅니다.
-메티에 다르 코페르니쿠스 천구 2460 RT
오늘날 바쉐론 콘스탄틴 메티에 다르 컬렉션의 핵심 기법 중 하나가 인그레이빙입니다. 대다수 작품에 인그레이빙 장식이 포함됩니다. 2017년 출시한 메티에 다르 코페르니쿠스 천구 2460 RT(Ref. 7600U/000G-B211)는 그 중에서도 인그레이빙의 묘미를 잘 살린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15세기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에 헌사하는 이 시계는 365.2421898일간 태양 주위를 도는 실제 지구의 궤도를 표시하는데요. 가운데 익살스러운 표정의 태양부터 그 주위를 회전하는 지구, 다이얼 배경을 가득 메우는 황도 12궁 별자리까지, 모든 장식 요소를 핸드 인그레이빙으로 세밀하게 표현했습니다. 확대경으로 보면, 궁수자리의 불룩한 근육과 바람에 흩날리는 염소자리의 갈기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정교한 디테일을 자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메티에 다르 컬렉션은 아니지만 지난해 출시한 트래디셔널 투르비용 피닉스 & 드래곤 역시 화려한 인그레이빙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기요셰 다이얼 위에서 서로 대립하는 불사조와 용은 파운싱 장식 기법으로 정교하게 묘사하고, 베젤의 소용돌이 패턴과 케이스 측면의 구름 무늬는 음각과 양각으로 각각 나타내며 입체감을 살렸습니다.
-다이얼의 불사조와 용이 돋보이는 트래디셔널 투르비용
-메티에 다르 아에로스티어-파리 1783
때에 따라서는 인그레이빙에 에나멜링을 곁들여 작품의 디테일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가령, 세계 최초로 열기구를 발명한 몽골피에 형제에 헌사하는 메티에 다르 아에로스티어-파리 1783(2017년)는 배경은 플리카주르 에나멜링을 통해 속이 비치는 듯한 효과를 냈고, 그를 떠다니는 듯한 열기구 장식은 각종 인그레이빙을 활용해 입체적으로 조각했습니다. 덕분에 좀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특히, 파운싱 장식 기법으로 입체감을 극대화한 열기구 미니어처는 시계를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습니다. 열기구의 세부를 들여다 보면, 정교한 인그레이빙 장식의 향연이 이어집니다. 태양, 황도대, 백합 문장, 독수리 등 각종 무늬를 일일이 새겨넣었는데요. 독수리의 털, 천사의 날개, 커튼의 주름 등 작은 디테일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심지어 열기구 아래쪽에는 세계 최초로 하늘을 여행하는 두 형제도 깨알같이 묘사했습니다.
-메티에 다르 레전드 오브 차이니즈 조디악 토끼의 해
비슷한 방식으로 완성한 작품으로 메티에 다르 레전드 오브 차이니즈 조디악 시리즈도 있습니다. 매년 그 해의 동물을 작품으로 소환하는 이 시리즈는 배경은 주로 전통적인 에나멜 방식으로, 주인공인 동물은 정교한 인그레이빙을 통해 입체적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올해는 계묘년(癸卯年), 토끼의 해를 맞아 두가지 버전의 메티에 다르 레전드 오브 차이니즈 조디악 토끼의 해(Métiers d’Art The legend of the Chinese zodiac - Year of the rabbit) 시리즈가 이미 나와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다이얼 가운데 떡하니 자리잡은 토끼 장식은 각 케이스 소재에 따라 플래티넘 또는 핑크 골드로 조각했습니다. 각 미니어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자세부터 털 한올한올까지 정교하게 표현한 덕분에 금방이라도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습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앞선 수많은 작품을 완성한 마스터 인그레이버를 가리켜 ‘빛의 예술가’라고도 합니다. 인그레이빙으로 구현한 금속의 음영이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기 때문입니다. 메종의 마스터 인그레이버는 “하이 워치메이킹에서 인그레이빙은 시계에 작은 포인트를 더하는 예술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해 작품에 어떤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2D를 3D로 바꾸는 마법 같은 이 기법을 수백년에 걸쳐 갈고 닦아 왔습니다. 메종의 마스터 인그레이버는 오늘도 세대를 거쳐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작품을 빚습니다. 기계의 도움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술혼이 깃든 조각칼 하나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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