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New)와 리트로(Retro)가 만나 생겨난 조어 뉴트로는 복고를 새롭게 즐긴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는 분명 새로움으로 느껴질 테죠. 하지만 뉴트로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이전, 시계에서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기계식 시계를 경험하지 못한 쿼츠 시계 세대들이 느끼는 기계식 시계나 아니면 좀 더 어린 스마트 워치 세대가 접한 기계식 시계야 말로 진정한 뉴트로입니다. 물론 기계식 시계에서 쿼츠 시계로 다시 기계식 시계로 이어지는 시계의 역사가 지닌 특수성이 작용한 영향도 적지 않습니다. 성능차이가 명확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전세대의 기술이 다시 주류를 형성하는 예는 매우 드무니까요.
시계로 범위를 한정한 뉴트로라면 회중시계, 즉 포켓 워치일 것입니다. 사실 손목시계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약 100년 전만 해도 남자들은 주머니에 시계를 넣고 다니다가 꺼내서 시간을 확인하는 포켓 워치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이후 사용의 편리함을 느끼고 손목시계를 착용하게 되었지만 유행에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남자들의 특성상, 손목시계를 받아들이는데 저항하는 기간도 적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손목시계의 시대입니다. 때문에 포켓 워치를 만드는 메이커는 많지 않습니다. 있다고 해도 소수의 컬렉터나 애호가를 위한 물건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리차드 밀 RM 020 투르비용 포켓 워치도 요즘 관점에서 보면 위와 같은 성격에 해당하는 물건이지만 과연 어떻게 해석했을 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가로 52.0mm, 세로 62.0mm로 핸드폰의 절반 정도되는 크기인 RM 020은 직사각형 케이스를 택했습니다. 회중시계 시대를 기준으로 본다면 그리 크지 않지만 손목시계에 익숙한 요즘 기준으로는 꽤 크다 싶은 사이즈입니다. 직사각형 케이스는 SIHH 2019에서 발표한 RM 16-01과 베이스 모델에 해당하는 RM 016로 소개된 적이 있으나 토노 케이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그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때문에 조금 낯설지도 모르나 케이스 측면을 보면 익숙한 디자인이 드러납니다. 가장 두꺼운 중앙부가 15.6mm이며 끝으로 향할수록 점점 두께가 줄어드는 형태로, 스피드 보트나 키(Key, 크라운 역할의 부품)를 체결하면 어뢰 같기도 한 유선형의 매력적인 실루엣입니다. 이것은 여느 리차드 밀의 케이스와 다름없는 구성에 따라 만들어 냈습니다. 베젤에 해당하는 어퍼 플레이트, 미들 케이스와 케이스 백으로 이뤄지며, 미들 케이스의 측면은 스크류가 들어갈 수 있도록 볼록하게 처리해 시각적인 자극을 주는데 이 역시 익숙한 디테일입니다.
스탠드 측면의 버튼 두 개를 누르며 케이스를 분리하는 방식이다
케이스는 어퍼 플레이트와 케이스 백은 화이트 골드지만 미들 케이스를 그레이드 5 티타늄으로 만들어 크기가 주는 시각적인 무게와 달리 체감은 제법 경감됩니다.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이며, 작업자가 꽤 고난을 겪었을 법한 가공수준을 보여주는 체인을 체결해도 무게는 크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시계 메이커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품화를 통해 전달합니다. 이는 요즘 보기 드문 회중시계에서도 읽을 수 있는 부분으로 사용방법의 제약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눈에 띕니다. 보베(Bovet)의 아마데오 컨버터블 시스템은 회중시계를 손목시계와 탁상시계의 세 가지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케이스 구조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담아냈습니다. RM 020은 회중시계로 접근한 만큼 손목시계는 배제했습니다. 대신 탁상시계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시계와 함께 제공되는 스탠드에 끼우기만 하면 됩니다. 마치 아이폰의 도킹 스탠드와 유사한 감각입니다. 다만 분리 시 스탠드 측면의 버튼 두 개를 동시에 눌러야 빠지는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습니다. 탁상시계로 사용하려면 키 역할을 하는 크라운을 끼워야 조작할 수 있으며, 회중시계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스탠드에서 분리하고 체인을 키 대신 끼워주면 됩니다. 케이스와 체인의 연결부는 키 역할을 겸하면서 케이스가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체결해야 하는 막중한 역할도 수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체결했다가 분리해 보면 사용자 편의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아니 헛웃음이 나올 만큼 손쉽게 체결과 분리를 할 수 있습니다.
키(Key)
리차드 밀은 RM 020으로 과거로 회기하기로 마음먹고 키를 되살려 낸 듯합니다. 키는 크라운이 보급되기 이전 포켓 워치와 반드시 함께 가지고 다니던 부품이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태엽을 감거나 시간을 조정할 수 없었습니다. 케이스에 통합한 크라운이 등장하자 키는 역할이 사라지게 되어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었는데요. RM 020은 위에서 언급했던 체인과 케이스 연결부가 키 역할을 겸하도록 했고, 분리된 형태의 키는 탁상시계로 사용할 때에 요구됩니다. 키를 별도로 휴대하는 불편함과 분실을 염려한 모양입니다. 키는 다양한 피니시 기법으로 표면을 마무리합니다. 위 이미지에는 ‘Sapphire blasted’, ‘Circular brushed’ 같은 가공방법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체인의 연결부(키)인 작은 부품에도 복잡한 가공과 공정이 행해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의 피니시에서 확장해 케이스를 보면 표면의 대부분은 광택을 억제한 새틴 피니시가 차지합니다. 모서리 부분을 중심으로 유광의 폴리시 가공을 했고 이러한 패턴은 여느 리차드 밀의 손목시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투르비용 축의 엔드 스톤(End stone)은 루비가 아닌 지르코늄을 택해, 모노톤을 극대화했다
RM 58-01 투르비용 월드타이머 쟝 토드
RM 020의 심장은 칼리버 RM 020입니다. 수동의 10데이즈 파워리저브를 지닌 투르비용으로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와 기능 인디케이터를 갖췄습니다. 이것은 손목시계에서 RM 58-01 투르비용 월드타이머 쟝 토드와 같은 모델로 환생합니다. 10일 파워리저브의 투르비용에 월드타임 기능을 더한 베리에이션입니다. 칼리버 RM 020은 정사각형의 무브먼트로 가로, 세로 42.2mm로 작지 않은 면적입니다. 이것은 고온, 고압으로 성형한 카본 나노파이버 플레이트를 절개해 부품을 배치하고 여러 개의 ‘V’형 브릿지로 고정해 교량이나 철근 구조물이 주는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무브먼트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결정하는 V형 브릿지는 꺾인 부분으로 향하며 완만한 상승각을 그립니다. 이것의 높이로 인해 글라스와 카본 나노파이버 플레이트 중간에 삽입한 미닛 인덱스와 인디케이터 프린트를 넣은 사파이어 크리스탈 플레이트를 절개해야 했고 덕분에 입체감은 배가 됩니다. 다이얼 3, 9시 방향에는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배럴과 6시 방향에는 투르비용 케이지를 배치했습니다. 4시 방향에는 기능 인디케이터, 9시와 10시 방향에 걸쳐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를 두었습니다.
씨스루 백을 통해 보는 칼리버 RM 020은 다이얼이 주는 느낌과 사뭇 다릅니다. 메인 플레이트와 중앙의 브릿지, 좌우 대칭의 배럴로 크게 나뉘며 전체는 흑백의 모노톤이며, 샌드 블라스트로 표면을 처리해 미묘하면서 고급스러운 광택을 발합니다. 다이얼이 구조물 같은 느낌이라면 이쪽은 상공에서 바라본 유럽식 정원 같기도 합니다. 물론 그에 어울리도록 생동감 있는 색상을 넣어야겠지만 말이죠. 중앙부의 브릿지는 ARCAP이라고 하는 동, 니켈, 아연 합금으로 철을 포함하지 않아 내자성과 물리적, 화학적 내성을 지니는 소재입니다. 우르베르크 EMC가 같은 소재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조형미를 드러내기 위해 메인 플레이트를 포함 브릿지는 입체적인 형태를 갖췄고, 투르비용 케이지를 고정하는 축과 지르코늄 소재의 엔드 스톤을 지지하는 부품은 꽃이나 리볼버 권총의 탄창 같기도 합니다. 가까이서 보면 매우 높은 수준의 피니시 기법을 사용했고, 여섯 개의 스크류 또한 세심하게 피니시 했습니다. 배럴 부분 역시 마찬가지로 활짝 핀 꽃과 같은 디테일을 넣었고, 다이얼과 달리 이쪽의 주얼은 샤톤(Chaton)에 끼우고 세 개의 스크류로 고정하는 디테일. 요즘이라면 랑에 운트 죄네를 위시한 독일 디테일로 인식하는 주얼 고정 방식을 택했습니다. 다이얼은 구조가 형성하는 아름다움, 케이스 백은 조형미라는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이는 칼리버 RM 020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키를 본체에 끼우면 조작을 할 수 있습니다. 크라운을 당기면 기능 인디케이터가 현재의 크라운 포지션을 표시합니다. N은 어떠한 조작도 입력되지 않는 중립 포지션, W는 와인딩, H는 시간 조정입니다. 키의 지름이 큰 덕분에 별다른 저항감 없이 매끄럽고 빠르게 와인딩 할 수 있습니다. 동력의 축적은 9시 방향의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로 확인 할 수 있으며, 오버 와인딩을 방지하기 위해 토크 리미트 크라운을 채택했습니다. 수동 무브먼트는 일반적으로 풀 와인딩이 되면 메인스프링이 배럴 측면의 홈에 걸리고, 동시에 사용자에게도 걸리는 느낌을 크라운에 전달해 와인딩을 멈추도록 합니다. 간혹 이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가 무리하게 와인딩하다가 메인스프링을 손상시키는 경우가 있어, 이를 방지하는 메커니즘이 토크 리미트 크라운입니다. 사용자에게 풀 와인딩의 신호를 내보는 게 아니라, 크라운이 직접 개입해 오버 와인딩을 차단합니다. 키의 지름이 크고 체결된 상태에서 유격이 있기 때문에 작은 지름의 크라운에 비해 섬세한 조작이 어렵습니다. 손에 익기 전까지는 크라운 포지션을 가늠하기가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기능 인디케이터로 확인할 수 있어 큰 문제는 아닙니다.
체인은 케이스와 체결하면 전갈의 꼬리 같기도 하다. 체인의 버클은 간단하게 체결할 수 있도록 했고, 쉽게 풀리지 않는다. 버클은 토노 케이스의 실루엣을 띈다.
리차드 밀의 리퍼런스 넘버는 RM 001에서 시작해 숫자가 커집니다. RM 16-01처럼 베리에이션인 경우 베이스 모델의 RM 016에 -1, -2를 붙이는 식입니다. RM 020은 리퍼런스를 보면 비교적 초기에 발표한 모델에 해당합니다. 덕분에 케이스 백을 통해 볼 수 있는 디테일 일부는 RM 001과 공통되기도 합니다. 브랜드로 성장하면서 제품 볼륨을 확장하는 상황인 현재의 라인업은 작품과 제품이 혼재되어 있지만, RM 020이 출시되었을 때는 기계식 시계의 본질을 탐미하는 성향이 더 짙었고 실제로도 그 점이 뚜렷하게 확인됩니다. RM 020은 포켓 워치라는 손목시계와 다른 형식을 리차드 밀이 어떻게 해석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소수의 예이기도 합니다. 손목시계와 다른 사용법, 손목시계의 소형화가 이행되기 전의 제작 접근법 같은 부분을 들 수 있겠습니다. 전자는 포켓 워치와 탁상시계 두 개로 사용할 수 있는 투 웨이(Two way) 용도의 제시로 확인되었고, 후자는 포켓 워치의 큰 케이스에 어울리는 여유로운 무브먼트 면적을 활용해 포켓 워치 형식에서도 특유의 세계관을 그려냈다는 인상과 키의 부활로 확인됩니다. 좀 가벼운 감상이라면 리차드 밀이라는 독특한 하이엔드 메이커가 선보인 뉴트로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주목할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느 리차드 밀처럼 하이엔드의 본질, 아름다움의 극한을 보여주겠다는 점에서 RM 020도 예외는 아닌 듯 합니다.
포토그래퍼 : 권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