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최초로 달에 착륙한 역사적인 해로 기억되는 1969년, 서로 다른 세 개의 무브먼트가 비슷한 시기에 출현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셋은 셀프와인딩과 크로노그래프의 결합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는 핸드와인딩 크로노그래프를 제치고 주류로 올라섰습니다. 오늘날 핸드와인딩 크로노그래프에 대해 호화로운 장식을 가미한 고급 무브먼트라는 인식이 팽배해진 반면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는 보다 친숙하고 대중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앞서 언급한 세 무브먼트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습니다. 허나 시계 산업의 저변 확대와 크로노그래프의 대중화에 셋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20세기 중반은 기계식 손목시계의 인기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습니다.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디자인, 자동화 및 대량 생산은 가파른 성장을 부채질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시계 업계는 새로운 가치에 눈을 떴습니다. 그것은 정확성과 편의성이었습니다. 궁극의 정확성에 대한 열망은 크로노미터와 고진동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고, 스스로를 파멸의 위기로 몰고 간 쿼츠 시계 등장에 빌미를 제공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정확성의 추구가 시계를 원리적 관점에서 바라본 결과였다면, 편의성에 대한 논의는 손목시계의 구조와 시대성에 뿌리를 뒀습니다. 18세기에 처음 알려진 셀프와인딩이 빛을 발하지 못했던 이유는 회중시계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손목시계는 셀프와인딩을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습니다. 종전 이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문명의 이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매일 크라운을 돌려 메인스프링을 감는 행위를 귀찮고 불편한 일로 치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셀프와인딩에 비하면 핸드와인딩은 촌스러운 구식이었습니다.
핸드와인딩 크로노그래프의 인기도 덩달아 시들해졌습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건 크로노그래프를 주로 제작하는 브랜드와 무브먼트 제조업체였습니다. 스위스 시계 산업 협회(FH)는 스위스 크로노그래프 협회(the Association of Swiss Chronograph)를 설립하는 한편 재정 지원을 통해 전통적인 핸드와인딩 크로노그래프의 우수성을 알리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요구를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위기의식은 발상의 전환을 재촉했습니다.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에 대한 개념이 등장한 건 바로 그 즈음이었습니다.
(왼쪽)샤를 에두아르 호이어와 (오른쪽)잭 호이어
브라이틀링(Breitling)과 호이어(Heuer)는 스위스 크로노그래프 협회의 대들보였습니다. 협회장은 윌리 브라이틀링(Willy Breitling), 부회장은 잭 호이어(Jack Heuer)였습니다.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호이어는 뷰렌(Buren)의 마이크로 로터 무브먼트에 크로노그래프 모듈을 추가했습니다. 하지만 완성된 무브먼트는 너무 두꺼웠습니다. 손목시계의 케이스 지름이 30mm 초에서 중반에 머물던 시절에 두꺼운 무브먼트는 전체적인 균형을 무너뜨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호이어는 무브먼트 상용화를 포기하고 맙니다.
-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11
뷰렌이 1967년 바젤 페어에서 더 얇은 무브먼트를 출시하면서 연구는 급물살을 탔습니다. 호이어는 뒤부아 데프라(Dubois Dépraz)까지 끌어들였습니다. 헌데 이번에는 개발 자금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뒤부아 데프라가 요구한 비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에 호이어는 브라이틀링을 설득해 무브먼트를 공동 개발하고 비용을 분담하기로 합의합니다. 프로젝트 99(Project 99)라는 코드명을 부여 받은 연구는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됩니다. 프로젝트 99의 개발팀은 크라운을 케이스 왼쪽, 다시 말해 두 개의 크로노그래프 푸시 버튼 사이가 아닌 맞은편에 설치했습니다. 무브먼트의 구조상 크라운을 원래 자리에 배치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1968년 여름 프로토타입 무브먼트가 완성되자마자 브라이틀링과 호이어는 테스트에 돌입합니다. 같은 해 뷰렌이 해밀턴(Hamilton)에 인수되면서 해밀턴이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참여했습니다.
- (위)브라이틀링 크로노-매틱 내비타이머와 (아래)호이어 모나코
- 해밀턴 크로노-매틱 광고
1969년 3월 3일, 브라이틀링, 호이어, 해밀턴은 제네바의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11을 공개했습니다. 같은 시간 지구 반대편, 뉴욕 맨해튼의 팬암 빌딩에서도 칼리버 11 출시를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약 한 달 뒤에 열린 바젤 페어에서 브라이틀링과 호이어는 칼리버 11을 넣은 시계를 전시했습니다. 특히 호이어는 오토매틱 오타비아와 까레라 외에 방수 성능 갖춘 최초의 사각시계이자 아이코닉 모델인 모나코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브라이틀링이나 해밀턴과 달리 호이어만 칼리버 11을 넣은 시계에 크로노-매틱 대신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라고 표기했는데, 이는 영국 및 미국에서 인기가 높았던 호이어가 고객들이 시계의 특징을 빨리 이해하는데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 제니스 칼리버 5011K
한편 스위스 르 로클에서도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천문대 크로노미터 경연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제니스(Zenith)는 1962년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3년 뒤인 1965년, 그러니까 브랜드 창립 100주년이 되는 해에 맞춰 새로운 시계를 출시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습니다. 제니스의 목표는 프로젝트 99와 같았으나 접근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제니스의 경영진과 개발자들은 뛰어난 성능을 검증 받은 기존 무브먼트에 크로노그래프 모듈을 추가하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엔진을 개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셀프와인딩과 크로노그래프를 한 데 묶는 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 칼리버 3019 PMC
제니스는 1965년을 겨냥한 당초의 계획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별개로 제니스는 시간당 진동수를 36,000vph(5Hz)로 끌어올린 고진동 무브먼트 개발에도 열을 올렸습니다. 뛰어난 정확성을 보장하는 고진동 무브먼트는 1960년대 시계 업계를 관통한 화두였습니다. 제니스는 이스케이프 휠 표면을 이황화 몰리브덴으로 특수 코팅 처리해 고진동 무브먼트의 치명적 단점인 빠른 마모에 대응했습니다. 고진동을 정복한 제니스는 대담한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지난하게 이어진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에 고진동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투입한 겁니다. 결국 제니스는 무브먼트의 설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 제니스 엘 프리메로
1969년 1월 10일, 제니스는 르 로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체형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시계, 엘 프리메로(El Primero)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스페인어로 첫 번째를 의미하는 엘 프리메로라는 이름에는 최초의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를 두고 펼쳐진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던 제니스의 자신감이 녹아 있었습니다. 엘 프리메로에 들어간 칼리버 3019는 복잡한 구조와 뛰어난 성능을 가진데 비해 적당한 크기를 갖췄습니다. 지름과 두께는 각각 29.33mm와 6.5mm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 날짜 기능까지 보유했습니다. 이마저도 부족했는지, 제니스는 문페이즈와 트리플 캘린더를 더한 베리에이션까지 동시에 선보이며 압도적인 기술력을 과시했습니다.
- 세이코 5 스피드-타이머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각축전에 뛰어든 건 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천문대 크로노미터를 제패하며 스위스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 세이코(Seiko)는 1967년에서야 뒤늦게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를 위한 개발팀을 꾸렸습니다. 세이코의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6139는 지름이 27.4mm, 두께가 6.5mm인 조밀한 무브먼트였습니다. 30분 카운터와 크로노그래프 초침만 설치해 간소화하는 한편 날짜와 요일 기능을 덧붙여 실용성을 강조했습니다. 로터는 매직 레버(magic lever)에 의해 어느 방향으로 회전하든 메인스프링을 감아줬습니다.
- 칼리버 6139(사진 출처:Watchtime)
칼리버 6139가 브라이틀링, 호이어의 칼리버 11이나 제니스의 엘 프리메로와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건 동력을 크로노그래프 메커니즘에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세이코는 칼리버 6139에 최초로 수직 클러치를 도입한 선구자였습니다. 세이코는 셀프와인딩 무브먼트를 출시한 첫 해에는 자국에서 한정된 수량만 판매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극적인 정책을 펼친 건 특유의 조심성과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세이코는 다음 해 세계 각지에 수출하기 전까지 소소한 기계적 결함을 개선할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세이코의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는 경쟁자들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졌습니다. 칼리버 11을 탑재한 시계의 절반 정도에 불과할 만큼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 때문이었습니다.
- 제니스 엘 프리메로 50주년 기념 트릴로지 세트
올해는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가 세상에 나온 지 꼭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세계 최초로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를 출시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브랜드들이 어떤 시계를 내놓을 지 궁금합니다. 스와치그룹의 이탈로 허전해진 바젤월드가 그래도 기다려지는 이유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