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아롱이형입니다.
이번 리뷰는 "LACO PADERBORN Erbstück(라코 파더보른 에르브스튁)" 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는 이 시계를 들이기 전에 이미 5개의 파일럿 워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의 파일럿 워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계를 들인 이유는 제 시계 컬렉팅 스타일 때문인데요,
저는 특정 브랜드나 시계의 특정 요소들(다이버, 파일럿, 드레스,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다이얼 컬러 등의 기준들)에 따른 일관성 있는 컬렉팅을 추구하기 보다는, 기존의 컬렉팅에 없는 요소를 가진 시계를 하나씩 더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LACO PADERBORN Erbstück 를 들였을까요?
사실, 꼭 파일럿 워치여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원했던 '새로운 요소'는 '빈티지한 느낌의 올드 라듐 컬러, 즉 살구빛 인덱스와 핸즈를 가진 시계' 였으니까요.
이러한 시계에 대한 열망은 벌써 수 년도 더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위 모델은 슈타인하르트(Steinhart)의 에비에이션(Aviation ; 민간 항공)라인업 시계입니다.
Aviation Vintage 라는 이름의 이 시계는 검정 DLC 코팅에 ETA 2824-2 무브를 탑재하고, 제가 원하던 살구빛 인덱스와 핸즈를 가진 멋진 시계였습니다. 독특한 사각 케이스와 빈티지한 감성의 스트랩, 470유로의 가격 또한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죠. 다만, 이 시기에 다른 시계들을 몇 점 들인 상태였고, 44mm 사각 케이스의 체감 싸이즈에 대한 고민 등으로 구입을 유보하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마찬가지로 슈타인하르트(Steinhart)의 크로노그래프 파일럿 워치도 후보로 놓고 고민을 하게 됩니다.
가격대도 합리적이고,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으나, 이미 이 당시 제 유일한 파일럿 워치였던 포티스 플리거(Fortis Flieger)가 DLC 코팅이어서 이번에는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를 가진 파일럿 워치를 들이고 싶었습니다.
조금 더 지난 후에 눈에 띈 브랜드는 바로 벨 앤 로스(Bell & Ross)였습니다. 살구빛 인덱스를 가진 빈티지한 다이얼을 가졌고, 하나 같이 심플하면서도 예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으나 가격(절대적 가격의 높음, 상대적 가격의 불합리함)으로 인해 고민을 하다 영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몇 년 간 시계 생활의 휴식기를 거쳐 다시 빈티지 다이얼에 대한 열망을 부추긴 시계가 있었으니, 바로 크리스토퍼 와드(Christopher Ward)의 C65 Trident Vintage Edition 입니다. 원래 스쿠버 다이빙이나 물놀이를 좋아해서 방수 능력이 좋은 다이버 워치에 대한 선호도도 있었고, 이전에 C1 Grand Malvern Moonphase 구입으로 브랜드 품질에 대한 믿음이 있는데다, 적당한 싸이즈(38mm), 합리적인 가격(595유로)에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다른 시계들을 구입하느라 구입까지 이르지는 않게 됩니다.
<LACO PADERBORN Erbstück >
그렇게 '빈티지한 컬러의 시계'에 대한 열망을 이어 나가던 중 제 레이더망에 포착된 시계가 있었으니, 바로 이 리뷰의 주인공인 LACO PADERBORN Erbstück 입니다. 이 시계는 컬러 외에도 기존의 제 시계 컬렉션에 없던 많은 요소들을 충족시켜 주는 시계인데요, 과연 어떤 점들이 그러한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목 케이스와 내용물 여기저기서 볼 수 있듯이 라코는 1925년에 설립된 브랜드입니다. Frieda Lacher 와 Ludwig Hummel에 의해 가족 경영 형태로 운영되었고, LACO 라는 브랜드 네임은 설립자인 Frieda Lacher에서 따온 Lacher & Co.의 줄임말입니다. 7년만 더 있으면 설립 100주년이 되니까 나름 역사성이 있는 브랜드라고 할 수 있지요.
1차 세계 대전에서 시작된 공중전은 전쟁의 주요 카테고리가 되었고, 종전 이후 독일은 군수제한조치 하에서도 융커스, 매서슈미트와 같은 항공기술자들을 필두로 비행기 개발을 이어 나갔습니다.
독일 정부는 2차 세계 대전(1939년~1945년) 들어 더 중요해진 공중전의 필수 장비로서 엄격한 자체 기준에 부합하는 파일럿 워치인 B-Uhr(Beobachtungs-Uhr ; '관측 시계'라는 뜻, 단수형이 Uhr 이고, 복수형이 Uhren임)의 생산을 시계 업체에 의뢰했는데, 이 때 그 기준을 충족시키고 시계를 납품한 5개 회사가 바로 A.Lange & Söhne, IWC, Wempe, Stowa(Walter Storz), 그리고 Laco(Lacher & Company/Durowe)였습니다. LACO는 이러한 히스토리를 갖고 있는 브랜드답게 파일럿 워치가 라인업의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B-Uhr는 다이얼 형상에 따라 A타입과 B타입으로 나뉘어 지는데, 일반적으로는 A타입 다이얼의 시계가 주류였고, B타입 다이얼의 시계들은 1941년부터 종종 모습을 드러냅니다. 심플한 디자인의 A타입에 비해 B타입 다이얼은 두 개의 동심원으로 시간과 분을 구분하여 표시하여 분단위 시간 확인이 용이합니다. A타입은 1시간을 넘기는 작전에, B타입은 1시간 이내의 작전에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LACO의 파일럿 워치 라인업은 다양한 싸이즈(36,39,42,45mm)와 무브먼트(미요타 쿼츠, 미요타 오토매틱, ETA, 발그랑쥬) 옵션을 가진 A 타입 및 B 타입, 그리고 C타입(LACO는 크로노그래프를 탑재한 다이얼을 C타입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만, 전통적인 분류는 A타입과 B타입입니다) 다이얼로 나뉘는데, 다이얼 컬러, 다이얼 상에 브랜드 로고 포함 여부, 용두 모양, 스트랩 스타일 등으로 다양한 배리에이션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LACO는 시계 이름에 도시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대부분 독일 도시명이지만 미국 또는 중남미의 도시 이름을 딴 시계들도 종종 눈에 띕니다.), 이 리뷰의 주인공인 PADERBORN Erbstück 처럼 빈티지한 외관을 가지는 몇몇 모델들은 일반 모델과 같은 이름을 가지되, 이름 뒤에 Erbstück 이라는 단어를 붙여 뭔가 '스페셜'한 라인업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Erbstück 이 붙은 모델과 그렇지 않은 모델간에는 무브먼트(엘라보레급 ETA 무브먼트)나 스펙 등의 차이는 전혀 없고, 다만 빈티지해 보이는 외관 여부와 스트랩 정도 밖에 차이가 없는데, 가격은 두 배 내지는 다섯 배(980유로 vs1950유로, 미요타 무브먼트를 사용한 모델들은 340유로)까지 차이가 나는데요, 도대체 이런 가격의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Erbstück 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Erbstück 은 독일어로 '상속물' , '유물' 또는 '유산' 이라는 뜻입니다.
시계 이름에 '유물' , '유산' 이 붙는 경우는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당장 생각하기에는 빈티지 시계가 떠오릅니다. 백여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세계 2차 대전 당시에 실제로 파일럿 워치를 납품했던 브랜드이기 때문에 빈티지 시계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시계는 ETA 무브먼트가 들어간 현행 시계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한 가지 가능성은 이 시계가 '복각 제품'이라는 것이겠죠. 복각 제품을 내놓는 것은 몇 년 전부터 시계 업계의 핫한 트렌드로서 각 브랜드가 가진 역사적인 시계들을 현행 제품으로 재해석 해서 내놓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사실, B-Uhr 시계 디자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지금까지 변형 없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라코 역시 실제 B-Uhr를 공급했던 역사적 배경을 자산으로 오리지널 디자인을 유지한 파일럿 워치를 주력으로 삼아 왔습니다. 위 사진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Erbstück 라인업이라고 해서 B-Uhr와 다른 디자인을 선보이지는 않고, 오히려 디자인 형태로만 보면 일반 라인업과 완전히 동일한 디자인입니다. 그렇다면 기존 라인업 자체가 역사적 디자인을 그대로 계승해 온 복각 제품들 뿐인데 LACO는 왜 Erbstück 이라는 이름을 중복적으로 붙인걸까요?
그 실마리는 이 시계의 구성물 가운데 하나인 작은 종이 조각에도 표시되어 있습니다.
2015년 IF 디자인 어워드 수상.
IF 디자인 어워드란, 레드닷, IDEA와 함께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로서, 1953년 독일 국제포럼 디자인이 주관하여 '디자인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국제 공모전입니다. 매년 8~9월에 접수를 시작하여 10월까지 등록을 마친 뒤 다음 해 3월에 수상작을 공개하며, 심사 분야로는 제품, 커뮤니케이션, 패키지, 인테리어, 건축, 전문컨셉 등으로 나뉘고 디자인, 소재, 혁신성 등을 평가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불가리(Bvlgari)가 2017년 발표한 옥토 피니씨모 오토매틱(Octo Finissimo Automatic)으로 IF 디자인 어워드 제품 분야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노모스(NOMOS)는 2017년에 탕겐테 네오마틱 블루로 IF 디자인상을 수상하기도 했었습니다.
Erbstück 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IF 디자인 어워드.
그 두 가지는 공통적으로 이 시계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에이징(aging)' 기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에이징(aging) 기법이란 단어 그대로의 의미처럼, 인위적으로 숙성시키는 작업을 뜻합니다. 이러한 에이징 작업을 위해 LACO에서는 별도의 전담팀을 만들어 시계 케이스를 녹슬어 보이게 하고, 찍힘을 만들고, 스크래치를 만들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핸즈와 다이얼에도 얼룩이나 금이 간 것 같은 처리를 하였습니다. 각각의 공정은 수 시간이 소요되는 완전 수작업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렇기에 완전히 동일한 시계는 단 한 점도 존재하지 않는 유니크(unique)한 시계가 되는 것입니다. 시계에 세월의 흔적을 덧입히는 작업, 그러한 에이징 처리를 한 시계이기에, 'Erbstück(유물)'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 이름은 단순히 빈티지스러워 보이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로 독일 공군에 납품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그 당시의 시계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디자인적 성취와 노력이 있었기에 IF 디자인 어워드측에서도 수상을 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의도적인 '에이징'은 요즘 트렌드인 '복각'과 맞물려 시계 업계에서도 종종 보이는 시도인데요, 대표적으로는 브론즈 케이스를 가진 시계에서 많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다만, LACO PADERBORN Erbstück 처럼 시계 자체의 빈티지한 외관과 더불어 역사적인 히스토리까지 더해진다면 그 시너지 효과는 더 크다 할 수 있겠죠.
시계 외적인 분야에서도 이러한 '에이징'은 낯선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취미로 삼고 있는 '디오라마'는 건프라(건담 프라모델)나 밀리터리 프라모델을 도색, 배경 설정 등으로 보다 사실에 가깝게 표현해 내는 것인데요, 시계의 '에이징' 역시 기본 베이스의 시계에 이러한 '디오라마'적 요소를 집어 넣어 마치 2차 대전 당시의 시계가 눈앞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세상에서 단 하나만 존재하는 시계를 만들어 내는 효과적인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간단히 언급한 것 처럼 PADERBORN Erbstück은 절반 가격인 일반 모델과 스펙상 차이가 거의 없는, 평범한 시계입니다. 42mm 지름과 13mm의 두께, 20mm의 러그를 가진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에 엘라보레급 ETA 2824-2 무브먼트를 탑재하고 있고, 전형적인 B-Uhr 의 B타입 다이얼 디자인을 따르고 있습니다. 50미터 방수를 지원하며, 내부 무반사 코팅 처리된 돔 사파이어 크리스탈 글래스가 이 시계를 더욱 빈티지해 보이게 합니다. 야광도료는 녹색 C3 수퍼루미노바를 사용하여 어두운 곳에서도 시인성을 보장하고 있고, 커다란 다이아몬드 용두와 케이스백의 시계 관련 정보 각인은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야광 도료가 발라진 불에 구운 검모양(sword) 블루 핸즈는 빛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다만 역사적인 B-Uhr B타입 디자인, '에이징'과 '스트랩'이 더해져서 이 시계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데요, 이러한 요소들을 포함해서 시계 이모저모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B-Uhr B타입 디자인의 다이얼입니다.
오리지널리티를 살리기 위해 브랜드 로고를 새겨 넣지 않은 검정색 다이얼은 바깥쪽 큰 동심원과 안쪽 작은 동심원으로 양분되고 있는데, 바깥쪽 테두리에는 분단위 바(bar)인덱스와 함께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시계들이 1부터 12까지의 시간 표시 아라비아 인덱스를 사용하는 반면, 이 시계는 5부터 55까지의 5분 단위 아라비아 인덱스를 사용하였고 12시 방향에는 숫자 0(또는 60) 대신 위로 향하는 삼각형 모양의 화살표로 표기한 것이 특징입니다. 반면, 내부의 작은 동심원에는 1부터 12까지의 시간 표시 아라비아 인덱스 외에 동심원 상에 점(dot)을 찍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디자인은 시간과 분을 분리 표시하여 비행 시 특히 중요한 '분단위' 확인을 보다 용이하게 한 것입니다. 빈티지한 다이얼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센터 부분 주위로 그라데이션을 주었고, 인덱스는 제가 그토록 원했던 살구빛 올드 라듐 컬러입니다. 인덱스 컬러는 동일하지만, 5, 15, 25, 35, 45, 55분 인덱스만 약간 밝은 톤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이는 군데 군데 빛이 바랜 다이얼의 느낌을 표현하여 심심한 모노톤 다이얼에 포인트를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밝은 톤의 분 인덱스는 야광 도료가 발라져 있지 않아 가뜩이나 복잡해 보이는 B타입 다이얼의 야광을 다소 단순하게 만들어 줍니다.
짧고 토톰한 소드(sword, 대검) 모양 시침은 내부 동심원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고, 길고 얇은 소드 분침은 바깥쪽 동심원의 분을 가리킵니다. 초침은 바깥쪽 동심원에 닿을만큼 긴 일자형 센터 초침입니다.
시침과 분침 모두 테두리는 불에 굽는 방식으로 열처리한 블루핸즈라서 빛에 따라 다채로운 블루 컬러를 선보입니다.
핸즈 및 인덱스에 도포된 C3 야광은 평상시에는 살구빛 올드 라듐 컬러를 띄나, 어두운 곳에서는 녹색을 띕니다. 밝은 톤의 분 인덱스 및 내부 동심원 안의 시간 단위 아라비아 인덱스에는 야광을 바르지 않았는데, 이는 야광을 단순하게 만들어 순간 시인성을 높이기 위한 선택으로 보여집니다. 대신, 시간 단위 아라비아 인덱스 둘레의 내부 동심원상의 점(dot) 및 12시 방향의 화살표 인덱스에 야광 도료를 발라 어두운 곳에서 시각 확인을 직관적으로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참고로, B-Uhr의 A타입 다이얼에서는 12시 방향에 삼각형과 그 위의 두 개의 점이 있고 역시 야광처리 하였는데, 이는 B-Uhr만의 디자인적 특성입니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B타입 다이얼 디자인이나 점(dot) 인덱스에 야광처리를 하는 것은 실제로 몇몇 비행기 칵핏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디자인이라는 것인데요, B 타입 다이얼 디자인은 기내 압력 및 외부 대기와의 압력차를 표시해 주는 여압 게이지에, 점 인덱스 야광 표시는 기내 온도 조절 장치 인덱스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운데 동심원 주위의 그라데이션 처리도 빈티지한 Erbstück의 다이얼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물론 B-Uhr의 다이얼 디자인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수송기인 융커스 JU-52의 칵핏 계기에서 따온 것이기는 하지만, 현대형 비행기 칵핏 디자인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면 B-Uhr의 다이얼 디자인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실리를 추구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디자인은 밀리터리 워치, 그 중에서도 특화된 파일럿 워치에 알맞는 디자인이며, B-Uhr 가 독일에서 만들어진 시계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바우하우스 양식으로 대표되는 독일만의 심플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이 파일럿 워치에서도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침과 분침을 채운 야광 도료에는 군데 군데 의도적으로 얼룩을 만들어 시간의 흐름을 표현했습니다.
에이징 작업으로 인해 하나하나의 시계가 전부 디테일이 다르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어떤 시계는 야광 도료에 금이 가거나 심지어는 떨어져 나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실제 빈티지 시계들 중에도 종종 목격되는 현상입니다.
다음은 케이스입니다.
케이스는 42mm 너비, 13mm 두께, 20mm 러그의 균형 잡힌 싸이즈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오리지널 B-Uhr는 시인성 확보를 위해 55mm 의 싸이즈를 요구했지만, 그것은 당시 전쟁 특성상 요구되던 실용적인 스펙일 뿐이고 일반 생활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LACO는 배리에이션에 따라 다양한 싸이즈(36,39,42,45mm)를 마련해서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있고, 몇 해 전에는 실제 B-Uhr와 동일한 55mm 싸이즈의 한정판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Erbstück은 42mm 와 45mm 싸이즈로 나옵니다.
케이스 디자인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바로 LACO만의 '일자형 러그'인데요, 여타 시계들처럼 러그가 손목을 향해 아래로 커브진 것이 아니라, 짧은 길이의 얇은 러그가 수평 방향으로 쭉 뻗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LACO B-Uhr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큼지막한 용두는 양파형 용두가 아니라 살짝 둥그스름한 다이아몬드 용두인데, 용두를 넣은 상태에서도 마치 용두를 뽑았을 때처럼 목부분이 얇고 길게 나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용두 반대편 케이스 측면에는 B-Uhr임을 표시하는 FL23883이라는 번호가 새겨져 있는데, 'FL'은 'Flying number'(혹은 'Flieger', 즉 독일어로 파일럿이라는 주장도 있음), '23'은 'Device for flight monitoring'(혹은 'navigation watch' 즉 항법 시계라는 주장도 있음), '883'은 'Assigned by German Testing Office for Aeronautics'를 뜻합니다. 이러한 케이스 측면 각인은 미요타 무브를 사용한 LACO의 저가형 모델에는 없으며, STOWA는 따로 추가금을 받고 각인 써비스를 진행하거나 한정판에만 새기고 있습니다. 이는 B-Uhr를 상징하는 각인이니만큼, 오리지널리티를 중시하는 분들께는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2차 대전 당시에는 유리를 통해 무브먼트를 들여다 보는 씨스루(transparent backcase)케이스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지만, STOWA와 같은 브랜드에서는 보는 재미를 위해 씨스루백을 채용한 B-Uhr 모델을 발매하고 있습니다. 실용성을 중시한 파일럿 워치 본연의 오리지널리티에 충실하자면, 항자성을 생각해서 케이스백은 막혀 있는 솔리드백이 맞습니다. LACO 역시 저가 라인업에서는 씨스루백을 선보이는 경우가 있으나 PADERBORN Erbstück을 포함한 상위 라인업에서는 솔리드백을 적용하고 있으며, 케이스백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 Beobachtungsuhr(B-Uhr, 관측용 시계)
▷ Bauart(시계 타입) : FLIEGER(파일럿 워치)
▷ Gerat-Nr(생산 번호) : 127-560
▷ Werk-Bez(무브먼트) : LACO
▷ Anforderz(주문 번호) : FL.23883
▷ Hersteller(제조사) : LACO
이러한 스펙 기재는 군 장비에 일반적으로 기재되는 형식이고,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B-Uhr에도 이러한 형식의 스펙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케이스백의 각인은 B-Uhr가 단순히 시계가 아니라 전쟁에 있어 중요한 장비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줍니다.
여기서 무브먼트가 'LACO'로 표시된 것을 볼 수 있는데요, LACO에서는 ETA 무브먼트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LACO 무브먼트 넘버링을 해서 표시하고 있습니다. PADERBORN Erbstück의 경우 LACO24 무브먼트를 사용했고, 엘라보레급 ETA 2824.2를 베이스로 한 오토매틱 무브먼트입니다.
<LACO B-Uhr의 무브먼트 Durowe cal.5>
아래에서도 따로 언급하겠지만, COSC 기준을 상회하는 무브먼트 정확성을 요구했었던 B-Uhr의 역사와, LACO가 B-Uhr 납품 5개 브랜드 중 그러한 요건을 충족하는 '자사 무브먼트'를 탑재하였던 유이한 독일 브랜드였다는 점에서 무브먼트에 대한 것은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PADERBORN Erbstück은 일반 모델과 달리 케이스에도 '에이징' 기법이 적용되었습니다. 사실, LACO 하면 샌드 블라스트 처리된 짙은 회색 케이스가 특징처럼 언급되곤 하는데요, 이러한 기본 바탕 위에 세월의 흔적을 표현해 놓았습니다. 케이스는 에이징 기법에 의해 녹으로 얼룩져 있고, 또 어떤 부분은 닳아서 반짝거립니다. 군데군데 불규칙한 찍힘(dent)과 긁힘(scratch)도 보입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말로 하기 보다는 사진으로 보여 드리는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다음은 스트랩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ETA 무브먼트를 탑재한 일반 모델과 Erbstück 모델의 차이점은 '에이징' 외에도 '스트랩'에 있습니다. 일반 모델의 스트랩이 일반적인 핀버클 스트랩인데 비해, Erbstück의 스트랩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B-Uhr의 스트랩의 형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이는 독일 공군의 B-Uhr 주문제작서 도면에도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부드러운 재질의 브라운 컬러 스웨이드 스트랩 끝 쪽에는 빈티지한 시계와 잘 어울리도록 파티나가 생성된 브론즈 재질 리벳이 한 쌍 씩 박혀 있고, 리벳 아래쪽에는 B-Uhr의 오리지널리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LACO 브랜드를 희미하게 각인해 놓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스프링바 형태가 아니라, 러그에 스트랩 바를 용접으로 붙인 후 스트랩으로 바를 감싸고 리벳으로 고정시키는 형태였습니다. 스프링바를 사용하는 현재는 리벳에 이러한 기능적 요소는 없고 장식적 의미만 남아 있지만, 파일럿 워치 디자인의 상징적인 요소인만큼 많은 브랜드에서 리벳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트랩의 형태를 살펴 보면, 두겹으로 갈라지는 긴쪽 스트랩의 끝부분만 리벳으로 고정시켜 중간에 롤러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짧은쪽 스트랩의 끝부분에는 롤러형 버클을 달아서 두개로 갈라진 긴 스트랩 안쪽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디자인은 당연히 지극히 실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당시 파일럿들은 높은 고도와 빠른 속도로 인한 추위를 이기기 위해 두툼한 방한 쟈켓을 입어야 했고, 시계의 스트랩 역시 쟈켓 위에 착용할 수 있도록 매우 길어야 했습니다. B-Uhr의 스트랩은 단순히 길 뿐만 아니라, '시계가 절대로 손목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일반적인 핀버클 스트랩의 경우 줄길이 조절을 위해서는 스트랩을 풀러야 하는데, 비행기 안에서는 진동이 심하고 어둡기 때문에 시계가 손목에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시계에 충격이 가해져 고장나거나 오차가 커질 수도 있고, 다행이 멀쩡하더라도 시계를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그러할진데, 언제 급박한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전시 상황에서는 이러한 위험은 최대한 방지하는 것이 좋았겠죠.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독일 공군은 긴 길이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손목에서 떨어지지 않는 롤러형 스트랩을 개발한 것입니다. 이러한 스트랩은 손목에서 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핀버클 형태이기 때문에 손목에 걸쳐 놓은 상태에서 줄길이 조절까지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는 현대의 '디버클'의 안전함과, '핀버클'의 편리함을 합친, 매우 실용적이고 혁신적인 스트랩이었습니다. 덕분에 B-Uhr 를 찬 파일럿들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더 안전하고, 더 빠르고, 더 쉽게 줄길이를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실제 B-Uhr를 착용한 모습>
이렇듯, PADERBORN Erbstück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B-Uhr를 그대로 소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B-Uhr의 파일럿 워치 디자인은 철저히 기능성 위주였고, 빼낼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이미 완성된 디자인이었기에, LACO 로서는 그 디자인 위에 세월의 흔적을 입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LACO의 노력은 IF 디자인 어워드를 통해 인정 받았고, 일반 모델과 Erbstück 모델의, 어찌 보면 불합리한 두 배의 가격차는 순전히 이러한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의 차이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민간 항공을 대표하는 아이코닉한 시계로는 브라이틀링 네비타이머, 로렉스 GMT 등 몇몇 디자인의 시계들이 떠오르지만, 전투기로 대변되는 '파일럿 워치'라고 한다면 너무나 당연히 B-Uhr 디자인이 떠오릅니다.
로렉스의 서브마리너가 다이버 워치 디자인의 원형이라면, 현재 파일럿 워치 디자인의 원형은 B-Uhr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장 제가 가지고 있는 포티스(Fortis) 플리거나 진(Sinn) 556만 하더라도, B-Uhr A타입 다이얼의 디자인을 답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B-Uhr를 납품했던 브랜드(A.Lange, IWC, WEMPE, STOWA, LACO)들의 현재 상황은 어떨까요?
다섯 개 업체 중 A.Lange만이 유일하게 현재 B-Uhr를 생산하고 있지 않습니다. 랑에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B-Uhr 생산 때문에 군수시설로 간주되어 폭격을 당해 많은 피해를 입은 바 있어 B-Uhr를 브랜드 헤리티지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고, 현재 랑에는 리치몬드 그룹에서 파텍 필립에 대항하는 고급 드레스워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파일럿 워치를 생산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파텍 필립도 몇 년 전부터 파일럿 워치 라인업이 생겼고, 여타 브랜드에서도 파일럿 워치를 포함한 밀리터리 라인업을 강화해 나가는 경향이 있어, 추후 A.Lange의 무브먼트를 탑재한 B-Uhr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WEMPE는 시계 유통업에 힘을 쏟다가 최근 들어 B-Uhr 시계를 재발매하였습니다.
IWC는 빅파일럿과 마크 씨리즈를 통해 B-Uhr를 생산해 오고 있는 대표적인 브랜드이고, STOWA와 LACO도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며 B-Uhr 디자인의 파일럿 워치를 꾸준히 생산해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B-Uhr의 오리지널리티에 열광하고, 시계 브랜드들은 B-Uhr의 디자인을 본딴 파일럿 워치들을 쏟아 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 그 이전에 B-Uhr는 두 차례에 걸쳐 세계 대전을 일으켜 많은 인명 피해를 일으킨 추축국(樞軸國, Axis-Powers,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중심이자 패전국인 독일의 시계인데, 정의의 편이자 승전국인 연합국(聯合國, Allied- Powers,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의 파일럿 워치들은 왜 전쟁의 승패와는 반대로 현재 파일럿 워치의 왕좌를 B-Uhr에게 내주게 된 것일까요?
그럼, 2라운드를 시작하겠습니다.
신기하게도, 너무나 유명한 B-Uhr에 비해 승전국인 연합국의 파일럿 워치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럼, 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의 파일럿들이 사용한 아이코닉한 시계들에 대해 먼저 알아 보겠습니다. (WWW, A-11, 오메가 CK2129, 제니스 순서)
■ The British W.W.W.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대하여 영국은 독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이로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아래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2차 세계 대전 당시 시계는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전쟁 도구였는데요, 영국의 시계 제조업체들로는 영국군의 시계 수요를 전부 감당할 수 없어 영국 국방부(the British Ministry of Defense)는 중립국인 스위스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영국 국방부의 요청을 받은 스위스의 12 업체는 영국군을 위한 군용 시계를 생산하게 되는데, 이 12 업체가 소위 'Dirty Dozen'이라 불리우는 Buren, Cyma, Eterna, Grana, Jeager-LeCoultre, Lemania, Longines, IWC, Omega, Record, Timor, Vertex 입니다.
<Dirty Dozen>
영국 국방부가 제시한 스펙은 방수가 될 것, 야광 핸즈를 가질 것, 크로노미터 수준의 정확성을 가진 무브먼트일 것, 전장의 혹독한 환경을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지닐 것 등이었는데요, Wrist. Watch. Waterproof 의 약자를 따서 the British W.W.W. 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W.W.W.는 사실 파일럿을 위한 전용 시계는 아니었지만, 영국군 파일럿들도 종종 착용하곤 했습니다. 이 시계는 32~37mm의 싸이즈를 가지고 있었고, 12시 인덱스 아래에 브로드 애로우(broad arrow)라 불리우는 화살 모양 인덱스가, 대부분 6시 방향에 서브 세컨드 다이얼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각 제조사의 로고는 12시 인덱스 아래, 브로드 애로우 위에 새겨 넣었습니다. W.W.W. 중 IWC 가 만든 시계가 마크10(Mk.X)이었고, 이후 마크10은 마크 11, 12, 15, 16, 17을 거쳐 현재는 마크18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각각 서양, 동양에서 불길하게 여기는 숫자라서 13, 14는 생략됨).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크10은 IWC 역사상 최초의 군납 시계이자 2차 세계 대전에 실제로 사용된 유일한 마크씨리즈이지만, 파일럿 워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진정한 의미의 파일럿 워치는 마크11(Mk.XI)부터 시작됩니다. 비록 전후인 1948년부터 생산되었지만 대표적인 연합국 파일럿 워치 디자인이라 볼 수 있는 마크 11의 디자인은 마크 15까지 이어지다가, 마크 16부터는 B-Uhr의 디자인이 도입되면서 명맥이 끊기게 됩니다.
■ The American A-11
다음으로는 A-11 이 있습니다. A-11이란 미국 시계 제조업체였던 Elgin, Bulova, Waltham, Hamilton에 의해 2차 세계 대전 시작부터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장병들에게 보급된 군용시계로서, 특정 시계 모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때 보급된 시계의 제작 기준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그 기준이란 방진, 방수가 되는 케이스, 내열성, 일오차 +-30초 이내의 정확성을 지닌 30~56시간 파워리저브를 가진 튼튼한 무브먼트 를 가질 것 등이고, 이러한 기준은 현재 생산되는 군용 시계의 기준 척도이기도 합니다. A-11은 32~36mm의 싸이즈를 가졌고, 검정 다이얼, 아라비아 인덱스, 야광 핸즈, 그리고 센터 초침을 특징으로 합니다. A-11 역시 파일럿 워치라고 할 수는 없고 보병 및 엔지니어에게까지 보급된 일반 군용 시계였지만, W.W.W.과 마찬가지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수많은 파일럿들이 A-11 시계를 착용하고 싸웠습니다. 연합국의 수많은 장병들이 착용했기 때문에 '2차 세계 대전을 이기게 한 시계(The Watch That Won World War II)'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 The Omega CK2129
오메가는 위 언급한 W.W.W. 시계를 공급한 열 두 업체 중 하나였지만, W.W.W. 외에도 영국 공군(Royal Air Force)에 다른 형태의 파일럿 워치를 공급하기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초반인 1940년, 영국 국방부는 파일럿 워치에 회전 베젤을 두어 파일럿들이 작전 중 시간 체크를 할 수 있기를 원했고, 이에 오메가는 CK2129 2000개를 공급하였습니다. CK2129는 크림색 다이얼에 블루 핸즈로 시인성을 확보하였고, 오메가의 튼튼한 무브먼트인 23.4SC를 사용하여 센터 초침을 제공하였습니다. 영국 국방부의 요구대로 회전 베젤을 달았으며, 3시 방향의 용두는 시간 조정 및 와인딩을 위해, 4시 방향의 크라운은 회전 베젤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잠금 용두를 따로 둔 것은, 좁은 칵핏 안에서 움직이다 보면 베젤이 부딪혀서 원래 셋팅해 놓았던 위치와 달라지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얼마 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에도 영국군 스핏파이어 파일럿역으로 나온 톰 하디가 오메가 CK2129를 차고 나와서 화제가 됐었는데요, 비행기 연료통을 관통당한 톰하디는 연료 계산을 위해 이 회전 베젤을 사용하여 시간 체크를 함으로써 실제 사용 예를 보여줍니다.
이렇듯 오메가 CK2129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공군 파일럿들이 가장 많이 착용한 시계였고, 이러한 회전 베젤 및 잠금 용두는 전쟁 이후 세계 최초의 24시간 베젤을 탑재한 글라이신(Glycine)의 에어맨(Airman) 모델에도 이어지게 됩니다.
■ The Zenith Special
비행기의 칵핏 대쉬보드 시계를 생산해 오던 제니스는 1939년 이를 본따서 Type 20 Montre d'Aeronef 라는 파일럿 워치를 생산하였고, 중립국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추축국과 연합국 양쪽에 공급하였습니다. 이 시계는 커다란 아라비아 인덱스와 캐씨드럴 핸즈로 시인성을 확보하였고, 시간 측정을 위한 빨간 마크가 있는 코인 베젤과 일체형 러그, 3시 방향의 길쭉하고 커다란 양파 용두가 특징입니다. 센터 초침이 아닌, 6시 방향 서브 세컨드 모델로 출시되었습니다. 커다랗고 개성 있는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와 캐씨드럴 핸즈, 양파 용두는 현재까지도 제니스의 파일럿 워치 컬렉션에 계승되고 있습니다.
<2018년 출시된 론진 헤리티지 밀리터리 복각 제품>
이밖에도 연합국에서 사용된 파일럿 워치는 많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시계들 위주로 살펴 보았습니다. 연합국 파일럿 워치 중에도 아이코닉한 모델들이 눈에 띄고, 승자의 관점에서 쓰여진다는 역사의 특징을 고려할 때, 이들 시계가 파일럿 워치를 대표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게 없어 보입니다. 실제로, 많은 중저가 브랜드에서 W.W.W.나 A-11의 오마쥬 모델들을 출시하고 있고, 제니스도 몇 해 전부터 파일럿 워치 라인업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론진도 얼마 전 영국 공군(Royal Air Force)에 납품된 역사적인 센터 세컨드 파일럿 워치를 원형에 가깝게 재현한 론진 헤리티지 밀리터리 워치를 선보인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파일럿 워치 = B-Uhr' 라는 공식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B-Uhr가 파일럿 워치의 정점에 서게 되었는지, B-Uhr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B-Uhr(Beobachtungsuhr(B-Uhr, 관측용 시계)란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공군의 요청으로 5개 업체(독일 업체인 A.Lange, WEMPE, STOWA, LACO 및 스위스 업체인 IWC)에 의해 생산 및 공급 된 독일군의 파일럿 워치로서, 다음과 같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 55mm 케이스 싸이즈
▶ 센터 초침
▶ 검정 다이얼
▶ 인덱스 및 핸즈에 야광 물질 도포
▶ 브레게 헤어 스프링 사용
▶ 무브먼트 오차: 현재의 COSC 기준(일오차 -4/+6초 이내)을 상회하는 기준
▶ 항자성 : 연철 내부 케이스를 사용
▶ 핵(hack) 기능 : 용두를 뽑아 초침을 멈출 수 있음
▶ 큰 싸이즈의 양파 또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용두일 것
▶ 항공 점퍼 위에 체결할 수 있도록 긴 스트랩과 리벳
독일 공군들은 왜 이러한 요건들을 요구했는지, 실용성의 측면에서 하나씩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시인성 확보
대부분 알고 계시다시피 55mm의 큰 싸이즈는 일상 생활을 가정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 전쟁 시 파일럿(또는 항법사)이 쉽게 시각 확인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큰 싸이즈의 케이스 덕분에 시간 인덱스와 핸즈도 덩달아 싸이즈가 커졌고, 항공기 자체의 진동과 전투시의 순간적인 기동에도 불구하고 조종사는 한눈에 시각 확인이 가능해졌습니다. 검정 다이얼에 하얀 인덱스를 사용한 것도 시인성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센터 초침의 채택으로 시인성을 높였는데, 초침과 초 인덱스가 작아서 직관적이고 순간적인 초 단위 시각 확인이 힘든 서브 다이얼 초침 시계의 단점을 보완한 것입니다. 요즘에야 센터 초침이 서브 다이얼 초침보다 일반적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센터 초침은 서브 다이얼 초침을 베이스로 해서 추가 부품을 통해 축을 이동시키는 작업이 수반됩니다. 즉, 큰 차이는 없지만 기술적으로도 센터 초침이 좀 더 복잡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타 군용시계들과 마찬가지로 B-Uhr 역시 인덱스와 핸즈에 야광 물질을 도포하였고, 다이얼과 핸즈의 크기가 커진만큼 야광 도료도 많이 도포되어 야간 시인성 및 순간 시인성 역시 비약적으로 상승했을 것입니다.
■ 정확성
전쟁에 있어 정확한 시각 및 시간 확인은 작전 수행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시간 계획에 의한 전쟁은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처음 시도되었고, 전장 상황은 시간 단위로 나뉘어 작전과 전술이 수립되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들어서는 공중전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됐는데, 이는 전투기의 공중전 뿐 아니라 폭격기에 의한 폭격도 포함되는 개념이었습니다. 파일럿은 유사시 연료 계산 및 비행기 기동, 기타 제원 계산 등을 위해, 폭격 항법사들은 폭격에 필요한 정확한 시간 및 거리 계산을 위해 매우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독일 공군은 B-Uhr에 현재의 COSC 기준(일오차 -4/+6초, COSC는 1973년에 설립, 제정된 개념임)을 상회하는 엄격한 오차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브레게 오버코일 헤어 스프링'을 사용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가공 기술 및 신소재 개발로 인해 플랫한 형태의 헤어 스프링도 성능이 좋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플랫한 형태의 헤어스프링보다는 끝부분을 꺾어 올린 브레게 오버코일 헤어스프링이 오차가 훨씬 적었습니다.
<WEMPE - Thommen cal.31>
<STOWA - Unitas cal.2812>
<IWC - cal.52T S.C>
<A.Lange - cal.48>
<LACO - Durowe cal.5>
이에 B-Uhr를 납품한 다섯 업체는 위 기준에 맞는 무브먼트를 사용하였는데, WEMPE는 Thhommen cal.31, STOWA는 Unitas cal.2812라는 스위스 무브먼트를, 스위스 업체인 IWC 는 자신의 회중시계 무브먼트를 센터 초침으로 수정한 cal. 52T S.C 라는 무브먼트를 사용했습니다(S.C 는 Second Center 를 의미하며, IWC의 이 52T S.C 모델이 바로 형행 빅 파일럿의 원조격이 되는 B-Uhr 워치입니다). A.Lange는 자사 무브먼트인 cal.48을 사용했고, LACO 역시 자사 무브먼트인 Durowe cal.5를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 B-Uhr 납품 업체 중 자사 무브먼트를 사용한 것은 IWC, A.Lange, LACO 정도가 되겠고, 그 중 독일 자사 무브먼트를 사용한 것은 A.Lange 그리고 LACO 두 업체 뿐입니다.
이렇듯 B-Uhr는 당대 최고 수준의 무브먼트와 조정 기술을 통해 매우 적은 오차를 가졌지만, 전시 상황이라는 것이 기본적인 오차 외에도 역동적인 움직임과 잦은 충격, 자기장, 급격한 온도 변화 등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고 일오차는 계속해서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오차 조정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독일군은 해군 라디오 시보에 맞춰 자신의 시계 오차를 조정하곤 했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기능이 바로 시간 조정을 위해 초침을 멈출 수 있는 기능, 즉 핵(hack)기능입니다. 핵기능이 없는 시계의 경우 태엽이 다 풀려 멈추지 않는 이상 초단위 시간까지 맞출 수가 없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매일 바뀌는 오차를 일일히 기억하기도 힘들 뿐더러, 일오차를 기록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필기구는 연필 또는 만년필이 보통이었는데(볼펜은 종전 이후 상용화 됨)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한 상태에서 종이 역시 공급 부족 상황이었고,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이 심이 부러지기 쉬운 연필이나 잉크가 필요한 만년필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초단위 시간까지 정확해야 하는 전쟁 상황에서 핵기능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기능이었습니다.
이렇듯 B-Uhr는 거친 전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차가 적고 정밀한 조정을 거친 무브먼트에 매일 시보와 핵기능을 통해 시간 조정을 함으로써 오차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조정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장' 이었습니다. 사실 프로펠러나 제트 엔진을 사용한 비행기 내에서 자기장은 발생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된 문제이긴 했지만, 2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에서 '레이다(RADAR)'를 발명하여 활용하게 되면서부터 자기장 문제는 크게 대두됩니다. 기계식 부품으로만 이루어진 기계식 시계 역시 부품이 자성을 띄게 되면 서로 달라 붙어 오차가 커지곤 했는데, 문제는 이러한 자성이 가만 놔두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죠. 따라서 아무리 정확한 무브먼트에 매일 일오차를 조정한다해도 시계가 자성을 띄게 되면 작전 수행에 있어 매우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에 독일 공군은 B-Uhr 업체들에게 연철(soft iron) 내부 케이스를 사용한 항자성을 띈 시계를 주문함으로써, 자기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게 됩니다. 이러한 연철 내부 케이스는 종전 이후 IWC의 마크11(Mk.XI)에서도 이어지게 되고 파일럿 워치의 아이덴터티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됩니다.
■ 편의성
B-Uhr를 비롯한 여러 파일럿 워치, 밀리터리 워치의 특징 중 하나로 커다란 용두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는데, B-Uhr 역시 커다란 싸이즈의 다이아몬드 혹은 양파 용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1923년에 영국인 John Harwood에 의해 세계 최초로 개발된 자동 와인딩(automatic winding) 기능을 탑재한 시계가 1928년 스위스 시계 업체 포티스(Fortis)에 의해 이미 선보인 상태였지만, 당시까지는 오토매틱은 수동에 비해 공정의 복잡함, 비용 증가, 내구성 감소 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군용 시계들은 수동 와인딩 방식이었고, 이는 B-Uhr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파일럿들의 복장을 보면 두툼한 방한 점퍼에 방한 장갑, 모자를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도가 증가함에 따라 온도는 일정한 비율(300m, 즉 1000ft 당 2℃씩)로 떨어져서 높은 곳에서는 영하의 기온이 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파일럿들은 시계의 태엽을 감아 주어야 했고, 때로는 시보에 맞춰 오차 조정을 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 두툼한 방한 장갑을 낀 상태에서 시계의 용두를 빼서 돌릴 수 있도록 커다란 싸이즈의 용두가 필요했고, 잡기 쉽게 양파 또는 다이아몬드 형태를 띄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시계를 점퍼 위, 또는 아래에 바꿔가며 착용할 필요가 있었기에 B-Uhr는 매우 긴 스트랩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줄길이를 조절 시 떨어뜨리지 않도록 한 스트랩 형태를 고안하여 제시하였고, 이는 위 PADERBORN Erbstück 리뷰 부분에서 이미 자세히 언급하였습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연합군 측에도 수많은 파일럿 워치와 밀리터리 워치가 있었지만, B-Uhr는 시인성, 정확성, 편의성 등에 있어 여타 다른 시계들과 차별화 되는 극한의 실용성을 가진 전쟁 도구였습니다. 이러한 압도적인 실용성을 바탕으로 한 심플하면서도 아이코닉한 디자인과 역사성은 전쟁 이후에도 B-Uhr를 파일럿 워치의 대명사로 군림하게 만들었고, 이는 쿼츠 및 GPS 시계가 등장한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B-Uhr의 압도적인 실용성과 디자인은 수많은 시계 및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B-Uhr는 전범 국가인 독일에 의해 만들어지고, 독일군에 의해 실제 사용된 시계입니다. 그렇다면 B-Uhr의 오리지널리티를 이야기할 때, '역사적 평가와 시계 자체를 분리해서 평가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겨우 시계를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냐는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여태껏 살펴본 바와 같이 B-Uhr는 단순한 시계가 아니라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재산을 파괴한 전쟁에 있어 '고도의 정밀 장비'로서 큰 역할을 수행하였기에, 오히려 역사적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생각한다면, 세계적 규모의 전쟁을 일으킨 독일이 만들고 실제 사용한 아이코닉한 시계라는 점에서 B-Uhr 및 그 디자인을 따르는 시계들은 터부시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우리야 독일의 직접적인 공격권 밖에 있어서 크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전쟁 당시 독일군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유럽 여러 나라들에 있어서 B-Uhr는 곱게 볼 수 없는 시계임에 분명할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의 첫 피해국인 된 폴란드의 국민들, 극단적으로는 나찌에 의해 인종 청소를 당한 유태인들에게 전쟁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전범국의 시계가 달갑게 여겨질리 없겠죠.
B-Uhr의 이야기가 남의 나라 이야기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기에, 우리에게 좀 더 와닿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위 시계는 독일과 함께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樞軸國, Axis-Powers) 중 하나였던 일본이 실제 전시에 사용한 파일럿 워치 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카미카제(神風)라는 이름의 자살 특공대에게 채워준 시계죠. 시계를 만든 것은 세이코샤, 즉 현재의 세이코입니다. 회전식 다이얼과 센터 초침, 큰 용두, 큰 싸이즈, 좋은 시인성 등 기능적으로 나름 뛰어난 파일럿 워치로 보입니다. 이 시계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일본의 직접적인 지배를 당했던 우리 입장에서는 당연히 치가 떨릴만한 시계입니다. 이는 카미카제의 직접적인 표적이 되었던 미국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죠. 다행이도 아직까지 세이코에서는 이 모델의 복각판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럽 등 일본의 직접적인 공격을 당하지 않은 지역의 시계 매니아들 중에는 이 시계의 복각 제품 출시를 요구하는 경우가 지속적으로 있어 왔고, 실제로 스페인의 세이코 매니아들이 자체적으로 마이크로 브랜드에 의뢰하여 카미카제 워치의 복각 제품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이들에게 일본의 카미카제 파일럿 워치는 매력적인 디테일을 가진 밀리터리 워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B-Uhr에 대해 느끼는 감정 역시 별반 다르지 않겠지요. 하지만 직접적인 독일의 침략을 받은 사람들에게 B-Uhr는, 우리에게 있어서의 카미카제 워치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는 상대적인 것이고, 수용 한도를 미리 정해 놓지 않으면 끝도 없는 비판이 가능한 영역이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의 시계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주제가 세이코, 씨티즌 등 일본의 시계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갑론을박이 이어져 극단적으로는 일본 제품을 아예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오긴 하지만, 대부분은 시계는 시계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분위기로 마무리되곤 합니다. 이는 B-Uhr, 더 나아가서는 독일 시계에 대한 논의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독일의 침략을 받은 유럽 국가들은 아직까지 독일에 악감정을 품고 있는 경우도 많겠죠. 그들은 독일 시계의 소비를 중단해야 한다고 외칠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는 중립국이라는 위치를 사용해서 독일군에 시계를 공급한 스위스의 시계 업체들(대표적으로는 B-Uhr를 공급한 IWC)에 대한 보이콧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이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세계 시계 시장은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거나 그에 동조한 국가들인 스위스, 독일, 일본이 주름잡고 있습니다. 범용적으로 사용되는 무브먼트 역시 마찬가지죠. 따라서, 수용 범위를 정하지 않은 무제한적인 역사적 비판을 한다면, 우리 같은 시계 매니아들은 시계 생활 자체를 즐길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의 시계들>
자, 이제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시계를 한 번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대부분 스위스, 독일, 일본의 시계들일 것입니다. 혹여 그렇지 않더라도 그 시계들이 품고 있는 심장인 무브먼트는 대부분 그 세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겠죠.
시계가 어떻게 보이시나요?
역사적 판단에 대한 의견은 많은 논란을 낳을 수 있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의견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물건을 연결지어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물건은 물건 자체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 역시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흔히, 역사적 배경과 히스토리를 품은 물건에는 특별한 오리지널리티가 생기기 마련이고, 이는 우리 같은 시계 매니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리지널리티에는 반드시 역사적 평가가 동반됩니다.
시계에 있어서의 오리지널리티. 그것이 생성되기까지는 수많은 사건과 평가와 해석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B-Uhr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계라는 취미는 나 자신이 즐기는 것이고, 내 삶 역시 내가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시계 자체가 가진 오리지널리티도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그러한 오리지널리티를 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추종보다는 자신만의 재해석 과정이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시계는 온전히 나만의 시계가 되고, 재해석된 오리지널리티 위에 나만의 기록과 역사를 덧입혀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LACO의 B-Uhr는 역사적인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시계입니다.
그리고 PADERBORN Erbstück 은 '에이징'이라는 작업을 거쳐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나만의 시계이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이 시계와 함께 나만의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새겨 나갈 것입니다.
Fin.
※ 하나의 리뷰가 작성되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네요. 사진 찍기, 특징 파악, 자료 수집, 컨셉 잡기, 스토리 라인 잡은 후 초고 및 퇴고의 반복되는 작업.. 이번 리뷰 역시 저번 스쿠알레 온다 우바 리뷰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추천은 포스팅을 하는 힘이 됩니다. 즐겁게 읽으셨다면, 주저 말고 추천을 눌러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