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신념을 지킨다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숱한 위기와 좌절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모습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워치메이킹의 역사에서도 초지일관의 자세를 버리지 않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남긴 정신과 유산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회자됩니다. 160년의 역사를 간직한 매뉴팩처, 미네르바의 이야기입니다.
상티미에(Saint-Imier) 계곡의 작은 마을 빌르레(Villeret)는 오늘날까지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여러 워치메이커가 태동한 스위스 시계 산업의 중심입니다. 찰스 이반 로버트(Charles Ivan Robert)와 이폴리트 로버트(Hyppolite Robert) 형제는 1858년 이곳에서 회사를 설립합니다. 로버트 형제는 공방을 오가며 작업을 중계하거나 직접 조립한 에보슈 무브먼트를 판매했습니다. 이폴리트가 떠난 뒤 찰스 이반은 홀로 회사를 이끌어 갑니다.
1885년 벨기에 앤트워프 국제박람회에 회중시계를 출품해 메달을 수상한 것을 기점으로 회사의 평판은 서서히 높아졌습니다. 사업에 탄력을 받은 찰스 이반은 회사를 대표하는 브랜드를 창안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1887년의 미네르바(Minerva)였습니다. 미네르바라는 이름은 고대 신화 속 지혜와 전쟁의 여신에서 유래했습니다. 미네르바를 상징하는 화살촉 모양의 트레이드마크도 바로 이때 태어났습니다.
찰스 이반의 세 아들인 조지-루이(Georges Louis), 찰스-오귀스트(Charles-Auguste), 이반(Ivan)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회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1902년 파브리크 데 파브르즈 로버트 프레르(Fabrique des Faverges Robert Frères)로 사명을 변경한 회사는 실린더 이스케이프먼트를 장착한 18리뉴 칼리버를 완성하며 매뉴팩처의 길을 걷습니다.
-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19/9CH가 들어간 회중시계
무브먼트 제작을 본격화하기 위해 건물을 증축하고 공정을 기계화하는 한편, 케이스 제조부터 도금과 조정처럼 복잡한 작업까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설을 완비합니다. 1908년에는 핸드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19/9CH를, 1909년에는 첫 번째 손목시계용 무브먼트를 완성한 이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10여 개의 무브먼트를 개발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합니다.(미네르바의 역사적인 무브먼트가 궁금한 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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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노그래프와 스톱워치용 에나멜 다이얼
1911년 미네르바는 시침과 분침 없이 중앙의 커다란 바늘로 1/5초까지 측정할 수 있는 스톱워치를 개발했습니다. 주로 스포츠 경기 기록 계측에 사용된 스톱워치는 그 쓰임새가 워낙 다양해 폭넓은 분야에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초기에는 실린더와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를 혼용했습니다. 전자는 저렴한 모델에, 후자는 고급 모델에 적용했습니다. 미네르바는 스톱워치를 꾸준히 연구한 끝에 많은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잦은 작동으로 인해 고장 나기 쉬운 플랫 스프링 대신 내구성이 뛰어난 와이어 스프링을 도입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1/10초부터 1/100초까지 측정할 수 있는 고진동 스톱워치도 개발했습니다.
- 미네르바는 머큐어보다 1년 늦게 태어났지만 높은 인기를 누리며 회사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사진 상단의 RFV는 미네르바로 사명이 바뀌기 이전의 로버트 프레르 빌르레(Robert Frères Villeret)를 의미합니다.
회사는 1918년부터 미네르바의 이름을 새긴 시계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머큐어(Mercure), 헤르타(Hertha), 아리아나(Ariana), 트로픽(Tropic) 같은 브랜드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낙점을 받은 건 미네르바였습니다. 1923년에는 사명에 미네르바를 추가했고, 1929년에는 미네르바 SA 빌르레(Minerva SA, Villeret)로 완전히 개명하면서 이 같은 전략에 힘을 실었습니다.
- 칼리버 13/20을 탑재한 초창기 손목시계
- 칼리버 19/9CH를 사용한 군용 시계
같은 해 미네르바는 칼리버 13/20을 발표하며 크로노그래프 스페셜리스트의 입지를 다집니다. 아울러 공군 조종사나 장교를 위한 군용 시계와 장비를 개발해 명성을 날렸습니다.
- 테크니컬 오피스에서 작업중인 자크 페로
전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의 여파로 맹렬했던 기세는 한풀 꺾이고 맙니다. 로버트 가문으로부터 경영권을 이어받은 자크 페로(Jacques Pelot)와 찰스 하우세너(Charles Haussener)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잡고 사업 정상화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미네르바는 1936년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을 통해 재기의 날개를 펼칩니다. 대회의 타임키퍼였던 뮌헨의 시계상이자 제조 업체 안드레아스 후버(Andreas Huber)는 미네르바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미네르바는 기록 계측을 위한 크로노그래프 회중시계와 전자 장비로 화답했습니다. 여기에는 밸주(Valjoux)의 무브먼트를 수정한 스플릿 세컨드도 포함됐습니다.
- 안드레 프레이의 칼리버 48을 탑재한 손목시계
이후 미네르바는 본격적으로 계측용 크로노그래프 및 스톱워치와 손목시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자크 페로의 조카 안드레 프레이(André Frey)는 기존 무브먼트를 개량하는 동시에 새로운 무브먼트를 개발해 미네르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데 일조했습니다.
1950년대부터 스위스 시계 업계에는 생산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는 산업합리화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다른 경쟁자들처럼 미네르바도 효율적인 생산 공정을 구축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자동화와 대량 생산으로 몸집을 키우는 데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인간의 손길이 깃든 시계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한다는 철학을 고수했습니다. 이들의 고집은 전통적인 제조 기술과 노하우를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1990년대까지 독립 기업으로 살아남은 원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 미네르바는 1966년 프랑스 랭스(Reims)에서 열린 포뮬러 1 대회의 공식 타임키퍼로 활약했습니다
손목시계의 활황이 이어진 1960년대, 경영진은 모든 제품에 미네르바의 이름을 넣기로 결정합니다. 미네르바는 독일, 영국, 이탈리아에서 인기를 끌었고, 미국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울러 중국, 싱가포르, 일본에도 시계를 공급했습니다. 규모가 큰 브랜드와 비교해 제한적인 마케팅과 광고 활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미네르바는 견고한 네트워크를 앞세워 꾸준한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규모 행사에 참가하기보다는 각국의 에이전트와 돈독한 유대 관계를 구축하며 영향력을 넓혀갔습니다. 이처럼 미네르바는 급격한 변화와 놀랄 만한 성공 대신 작지만 내실 있는 기업으로 남으려 했습니다. 한정적인 수량, 작은 기업, 가족 경영, 충실한 직원, 신뢰 관계, 철저한 재정 관리는 미네르바를 지탱한 원칙이었습니다.
쿼츠 시계의 등장과 기계식 시계의 몰락으로 어둠이 짙게 드리운 시대에 미네르바를 구해낸 건 스톱워치였습니다. 스톱워치는 틈새시장이었지만 미네르바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습니다. 곡선계(corvometer)와 측량 장비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미네르바는 쿼츠 시계를 생산하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네르바는 위태로운 지경에 몰립니다. 외부에서의 지원이 절실했던 그때, 미네르바는 이탈리아 기업 호파(Hopa)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2006년, 미네르바는 결국 리치몬트 그룹에 인수되었고, 다음해 몽블랑의 자회사로 편입되면서 독립 기업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2007년 미네르바는 몽블랑의 고급 시계를 생산하는 빌르레 매뉴팩처로 탈바꿈합니다. 몽블랑은 미네르바의 흔적을 애써 지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네르바를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몽블랑은 빌르레 1858 컬렉션을 개설해 미네르바가 남긴 유산을 보존하는 한편 워치메이킹 무대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는데 집중했습니다.
- 빌르레 매뉴팩처에서 제작한 (위)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와 (아래)헤리티지 크로노메트리 엑소투르비용 라트라팡테(Heritage Chronométrie ExoTourbillon Rattrapante)
크로노그래프, 엑소투르비용, 메타모포시스와 같은 컴플리케이션은 몽블랑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몽블랑이 모두가 주목하는 워치메이커로 부상한 데에는 미네르바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오늘날 빌르레 매뉴팩처는 연간 250여 개의 시계를 생산합니다. 이곳에서는 플래그십에 해당하는 엑소투르비용을 비롯해 미네르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크로노그래프가 만들어집니다. 많은 게 달라졌지만 시계를 대하는 자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부품 제작부터 마감과 조립까지 모든 작업이 장인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게다가 오직 소수에게만 허락된 밸런스 스프링 제조 능력까지 갖췄습니다. 지난해부터 몽블랑은 타임워커, 스타 레거시, 1858 컬렉션을 재정비하며 미네르바의 정신을 강조하고 나섰습니다. 빌르레 매뉴팩처라는 타이틀은 잠시 뒤로 하고 미네르바를 전면에 내세운 겁니다. 지금도 그 이름이 유효한 이유는 지난 160년간 지켜온 신념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