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은 그랜드 세이코(Grand Seiko)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해였습니다. 2010년 글로벌 런칭한 지 7년여 만에 세이코의 최상위 플래그십 라인에서 하나의 독립 브랜드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2017년은 또한 '그랜드 세이코 스타일'을 정립한 역사적인 모델 44GS가 탄생한지 정확히 50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독립 브랜드 선언 1년만에 그랜드 세이코는 현 컬렉션을 크게 헤리티지(Heritage), 엘레강스(Elegance), 스포츠(Sport) 세 갈래로 정비하고, 각각의 명칭에 어울리는 확고한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이번 타임포럼 리뷰를 통해서는 2017년 출시 모델인 기계식 하이비트 36000 GMT 모델(Ref. SBGJ201)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 2014년 출시한 하이비트 36000 GMT Ref. SBGJ001
각설하고 새로운 하이비트 36000 GMT 모델(Ref. SBGJ201)은 2014년 출시한 Ref. SBGJ001 모델의 리-디자인 버전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왜냐면 새로운 로고 디자인을 적용한 다이얼을 제외하면 기존의 스펙을 거의 그대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랜드 세이코가 2017년 단일 브랜드로 독립하면서 다이얼 상단에 세이코 로고 대신 이니셜 로고인 GS와 그랜드 세이코 풀네임 프린트로 일괄 통일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베스트셀링 모델은 예외 없이 다이얼 디자인만 변화를 주는 식으로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이전 레퍼런스인 SBGJ001 모델을 단종시키고 새로운 레퍼런스인 SBGJ201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기존 제품의 특징들을 수정하기 보다는 계승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도 이미 확립한 디자인적, 기술적 성취들이 충분히 좋은 반응을 얻은데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띠고 있는 자부심이 작용했을 터입니다.
- 2014년 출시한 하이비트 36000 GMT Ref. SBGJ005 (600피스 한정)
실제로 2014년 런칭 당시 앞서 보신 실버-화이트 다이얼 버전(Ref. SBGJ001) 외 600피스 한정으로 선보인 그린 컬러 다이얼 버전(Ref. SBGJ005)은 21세기 선보인 모던 그랜드 세이코 제품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모델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같은 해 제네바 시계그랑프리(GPHG)에서 ‘쁘띠 에귀유(Petite Aiguille)’ 부문을 수상한 것도 그 성공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 새로운 하이비트 36000 GMT Ref. SBGJ201
2017년 새롭게 바뀐 그랜드 세이코 하이비트 36000 GMT 모델(Ref. SBGJ201)을 이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리뉴얼 전 버전과 마찬가지로 1967년 탄생한 역사적인 모델 44GS의 케이스 디자인을 어김없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양 러그 쪽으로 갈수록 가파른 경사를 이루는 독특한 케이스 형태와 날카롭게 에지를 살린 프로파일, 원형의 베젤에서 케이스로 이어지는 곡선형 라인 등은 1960년대 말 당시 '그랜드 세이코 스타일'을 최초로 규정한 44GS만의 시그니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 1967년 다이니 세이코샤(第二精工舎, 현 SII)서 최초 제작한 44GS 오리지널 모델
44GS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세이코의 첫 시계 전문 디자이너인 다나카 타로(田中太郎)의 손끝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는 1964년 스와 세이코샤(諏訪精工舎, 현 세이코 엡손)가 제작한 57GS 일명 '셀프 데이터(Self-dater)' 모델을 디자인한 인물로서, 57GS에서 시작된 그랜드 세이코 라인을 위한 독창적인 케이스와 다이얼 디자인에 관한 실험을 44GS에서야 비로소 완성했습니다. 후대의 인터뷰 내용을 참고하면, 44GS를 스케치할 당시 다나카 타로는 스위스 여러 브랜드의 고급 클래식 시계 디자인을 참고하면서 일본적인 미학의 정수를 담고자 노력했다고 강조하는데요. 이를 위해 시계의 외형 뿐만 아니라 케이스 연마(研磨)에도 까다롭고 높은 수준을 요구했는데, 이는 후대에 '자랏츠 폴리싱(Zaratsu Polishing)' 혹은 칼날처럼 예리하다고 해서 '블레이드 폴리싱(Blade Polishing)'으로 불리는 그랜드 세이코 특유의 고급 연마 기술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실제 결과물로 탄생한 44GS의 케이스를 면면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일본 전통 도검인 가타나를 연상시킵니다. 거울처럼 유광으로 매끈하게 마감한 케이스 측면을 보면 일본도 특유의 아찔하면서도 섬세한 선과 면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자랏츠 폴리싱으로 흠잡을 데 없이 연마한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의 케이스 직경은 40mm,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남성용 시계 사이즈로는 딱 좋은 크기입니다. 케이스 두께는 14mm. 전면 글라스 소재는 안쪽 단면 반사방지 코팅 처리한 듀얼 커브 형태(흔히 돔형)의 사파이어 크리스탈을 사용했습니다. 한화로 1천만 원대 미만의 시계로는 가히 최상의 마감 상태를 보여주는 케이스 외 이 시계의 숨은 백미는 다이얼에 있습니다.
얕게 밀알 모양으로 촘촘하게 돌려가며 팬 듯한 특유의 방사형 패턴은 세이코 인스트루먼트(SII) 산하의 워치 매뉴팩처이자 그랜드 세이코 시계가 제조, 조립되는 요람인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Shizuku-ishi Watch Studio, 雫石高級時計工房)가 위치한 모리오카 시의 주산인 이와테(Iwate, 岩手) 산의 눈 내린 능선에서 디자인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일전에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당시에도 느꼈지만 주변 자연 경관이 정말 아름다웠는데요. 이와테 산을 가리켜 현지 주민들은 제2의 후지 산 혹은 옛 지명인 '남부(南部)'를 본 따 '남부 후지'로 부를 만큼 예부터 수려한 풍광과 청정 자연 지구로 이름이 높다고 합니다. 스위스 제조사들이 곧잘 알프스에서 제품 디자인의 영감을 얻는 것과도 어쩌면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섬세하게 특유의 결이 살아있는 다이얼은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시계에 은은한 캐릭터를 더합니다. 시계를 측면에서 보면 다이얼의 깊이감과 질감이 제법 도드라지는데요. 다이얼 외곽 실버 챕터링과 그 안에 위치한 각면 아워 마커(인덱스), 그리고 이와테 산에서 영감을 얻은 잔잔한 패턴 다이얼이 층층이 레벨을 이루며 다이얼에 입체감을 더합니다. 가타나 검처럼 길쭉하게 뻗은 각 핸드의 배치 또한 층을 이루며 조화로운 다이얼 디자인에 기여합니다.
다이얼에 사용된 스틸 소재의 아워 마커(인덱스)의 가공과 연마에도 케이스 못지 않은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바통형 인덱스는 이전 세대의 그랜드 세이코 모델들이 그러했듯 다면으로 모서리를 커팅하고 전체를 유광으로 폴리싱 마감했으며, 접착제를 이용해 단순 부착한 것이 아니라 인덱스 뒤쪽에 두 개의 다리가 있어 다이얼의 구멍에 통과시킨 다음 고정한 형태라서 외부 충격에도 쉽게 떨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각 인덱스와 핸즈는 어느 각도에서나 최상의 가독성을 보장하며, 세이코의 다른 스포츠 모델들처럼 루미브라이트(Lumibrite)와 같은 특수 야광 도료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세월에 의해 훼손되지 않는 클래식한 가치를 추구하는 그랜드 세이코의 철학을 반영한 것입니다.
한편 열처리한 블루 스틸 핸드는 챕터링에 프린트한 24시 눈금을 가리켜 세컨 타임존(GMT) 시각을 확인하는데 이용됩니다. 그랜드 세이코의 여느 GMT 모델처럼 크라운을 2단까지 뺀 상태에서 GMT 핸드를 조작해 원하는 홈 타임의 시간을 맞출 수 있고, 로컬 타임은 크라운 1단에서 시침만 1시간 단위로 개별 조정해(앞뒤로 조정 가능) 간편하게 맞출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날짜 역시 함께 연동 변경되고요.
- 그랜드 세이코 인하우스 하이비트 칼리버 9S86
무브먼트는 2009년 데뷔한 하이비트 자동 칼리버 9S85를 베이스로 GMT 기능을 추가한 9S86 칼리버를 탑재했습니다. 하이비트라는 수식에 부합하게 초당 10진동(시간당 36,000회)하며, 파워리저브는 약 55시간을 보장합니다. 2014년 첫 하이비트 36000 GMT 라인업에 탑재돼 선보일 당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고 이미 충분히 검증된 칼리버인 만큼 무브먼트만은 새롭게 업그레이드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입니다. 기존의 그랜드 세이코 하이비트 칼리버와 마찬가지로 탄성이 강화된 고발트-니켈계 합금 메인스프링 소재인 스프론(Spron) 530과 자성 및 충격에 높은 저항성을 지닌 인하우스 헤어스프링 스프론 610을 사용했으며, 이스케이프 휠과 팔렛 포크는 반도체 제조 기술에 응용되는 미세전자기계시스템(Micro Electro Mechanical Systems, MEMS) 기술을 응용하여 1/1,000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고도로 정밀하게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소재 자체의 경도를 높여 내구성을 강화하고, 팔렛 포크의 경우 일반적인 부품에 비해 최대 25% 가량 무게를 경량화해 작동 안정성 및 정확성에 기여합니다.
사파이어 크리스탈 케이스백을 통해 독자적인 무브먼트를 감상할 수 있으며, 글라스 안쪽에 흐릿하게 그랜드 세이코를 상징하는 앞발을 든 사자 엠블럼을 프린트해 모던 그랜드 세이코 컬렉션의 숨은 디테일한 특징들을 이어갑니다. 케이스 방수 사양을 100m까지 지원하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 클래식한 디자인을 앞세운 모델임에도 실용적인 방수 사양과 메탈 브레이슬릿의 채택으로 활동적인 현대 남성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감안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랜드 세이코의 하이비트 칼리버가 여느 기계식 9S와 쿼츠 9F 칼리버 제품들에 비해 더욱 특별한 점은 헤어스프링의 조정 단계에서 브론즈 마이스터 이상의, 다시 말해 십 수년 넘게 워치메이커로 일해온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 최고 베테랑들의 손길을 거친다는 사실입니다. 일반 제품보다 훨씬 더 정밀하고 까다로운 기준으로 조정을 거치고, 이렇게 완조립된 무브먼트는 다시 매뉴팩처 자체적인 17일간의 엄격한 작동 안정 테스트를 거치게 됩니다. 3가지 다른 온도에서의 작동 테스트와 6가지 다른 포지션에서의 작동 테스트를 거쳐 스위스 공식 크로노미터 인증 기준(-4 ~ +6초)보다 까다로운 일 허용 오차 -3 ~+5초 범위 내로 자체 조정을 거듭한 뒤 이를 증명하는 그랜드 세이코 품질 인증서를 받아야만 최종적으로 출하될 수 있습니다.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미려하게 브러시드 & 폴리시드 가공된 스틸 브레이슬릿 역시 시계를 착용한 이에게 즐거움을 주는 요소입니다. 케이스에서 브레이슬릿으로 이어지는 러그부의 단차와 약간의 유격은 이전 그랜드 세이코 모델부터 지적된 사항이지만 시계의 전체적인 우아함을 저해할 만큼 눈에 거슬리진 않습니다. 각 링크의 연결이 견고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매끄럽게 마감된 브레이슬릿은 손목 위에서 탁월한 착용감을 약속하고, 상단에 GS 로고를 양각한 디테일한 설계의 폴딩 버클 역시 시계에 품격을 더합니다.
- Ref. SBGJ203 (스틸)
- Ref. SBGJ211 (티타늄)
- Ref. SBGJ213 (티타늄)
- Ref. SBGJ227 a.k.a '피콕(Peacock)' (스틸, 700피스 한정)
- Ref. SBGJ225 아시아 리미티드 에디션 (스틸, 250피스 한정)
그랜드 세이코는 현재 컬렉션 내에 몇 종의 컬러 다이얼을 적용한 스틸 버전(한정판 포함)과 티타늄 버전도 함께 선보이고 있으니 하이비트 36000 GMT 시리즈에 특별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품 촬영:
권상훈 포토그래퍼
여유만 있으면 하나 갖고싶은 그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