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기술 혁신의 촉매제가 되기도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인류는 항공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뤄냅니다. 많은 모험가들이 창공을 누비며 기술의 발전을 독려했습니다. 이후 근대적 비행 장치와 기술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본격적인 항공 시대의 막이 오릅니다.
- 아버지 가스통 브라이틀링의 뒤를 이은 윌리 브라이틀링(Willy Breitling)
수완이 좋은 사업가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브라이틀링 가문의 후계자로 가업을 물려받은 윌리 브라이틀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브라이틀링은 크로노그래프의 새로운 장을 연 개척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이들은 회중시계에서 넘어온 싱글 푸시 크로노그래프에서 스타트/스톱과 리셋 기능을 분리한 메커니즘을 선보였는데, 이는 현대식 크로노그래프 시계의 효시가 됐습니다.
1938년 윌리 브라이틀링은 파일럿 워치와 조종석 기기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브라이틀링 휴이트 항공(Breitling HUIT Aviation) 부서를 신설합니다. 프랑스어로 숫자 8을 의미하는 휴이트는 파워리저브가 8일인 조종석 시계에서 착안한 것이었습니다. 시계와 각종 기기는 조종사가 속도나 고도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충격, 진동, 자세 및 온도 변화, 자기장 등 비행 중에 발생하는 변화와 거친 환경에도 끄떡없는 정밀한 성능이 뒷받침 되어야 했습니다. 휴이트 항공 부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고도의 정밀함과 정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철저한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또한 내습성이 뛰어난 검은색 무광 다이얼, 야광 물질을 칠한 커다란 바늘과 숫자 인덱스를 조합해 가독성을 높였습니다. 브라이틀링의 파일럿 워치와 조종석 기기는 곧 영국을 비롯한 공군의 간부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후 브라이틀링은 크로노맷과 내비타이머 등 굵직한 파일럿 워치를 연이어 출시합니다. 크로노그래프 전문가는 그렇게 하늘마저도 지배하게 됐습니다.
- 브라이틀링 휴이트 항공 부서가 제작한 (위)8일 파워리저브 기내용 크로노그래프 Ref. 640와 (아래)파일럿 워치 Ref. 768. 모두 내비타이머 8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올해 1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브라이틀링의 신제품 출시 행사에 뜨거운 관심이 쏠렸습니다. CEO로 부임한 조지 컨의 첫 번째 프로젝트인데다가 변화를 예고한 브라이틀링에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최근 몇 년 간 브라이틀링은 라트라팡테, 크로노웍스, B55 커넥티드 같은 성취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밑바탕이 되는 주요 컬렉션은 정체된 느낌이었고, 대중과의 접점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브라이틀링은 과거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찾은 단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컬렉션을 완성합니다. 바로 휴이트 항공 부서가 만든 조종석 시계와 빈티지 파일럿 워치에서 영감을 얻은 내비타이머 8입니다.
이번 리뷰를 통해 소개하는 내비타이머 8 B01 크로노그래프 43은 내비타이머 8 컬렉션의 대표 모델입니다. 지름 43mm, 두께 13.97mm의 케이스에서 가장 먼저 시선이 향하는 곳은 베젤입니다. 규칙적으로 홈을 낸 베젤은 브라이틀링 파일럿 워치의 전통입니다. 경사를 따라 60개의 홈을 비스듬히 판 건 브라이틀링 빈티지 파일럿 워치의 양식과 유사합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하게 돌아가는 양방향 회전 베젤의 12시 방향에는 삼각형 표시가 있습니다.
케이스는 마감을 달리해 입체감을 살렸습니다. 러그 전면과 케이스 측면은 새틴, 베젤 전면과 러그의 경사면은 브러시드로 처리했습니다. 러그 모서리가 살짝 날카로운 걸 제외하면 전체적인 마감은 훌륭합니다. 크라운에는 브랜드를 상징하는 로고를 새겼습니다.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는 안쪽과 바깥쪽 모두 무반사 코팅처리를 했습니다. 방수 능력은 100m입니다.
다이얼은 기존 제품과는 다소 결이 달라 보입니다. 전체적인 균형은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처음 소개할 때만 하더라도 로고와 브랜드 이름 아래 부분이 비어 허전했지만 크로노미터 내비타이머라는 문구를 삽입해 깔끔하게 공백을 메웠습니다. 짙은 파란색의 선레이 다이얼은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30분과 12시간까지 측정하는 크로노그래프 카운터와 스몰 세컨드의 배치는 안정적입니다. 원형으로 무늬를 새긴 세 개의 서브 다이얼은 선명한 색의 대비를 보여줍니다. 다이얼 4시와 5시 사이에는 날짜 창이 있습니다. 날짜는 자정이 되면 순간적으로 빠르게 넘어갑니다.
아라비안 숫자 인덱스는 슈퍼루미노바를 칠해 봉긋하게 솟아있습니다. 다이얼 외곽의 삼각형 표시나 서브 다이얼과 인접한 사각형 표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역시 과거로부터 넘어온 겁니다. 폭이 넓은 시침과 분침은 뛰어난 가독성을 제공합니다. 화살표 모양으로 장식한 크로노그래프 초침의 끝 부분은 전체적인 톤을 고려해 흰색으로 처리했습니다.
- 새로운 로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브라이틀링의 옛 광고
새로운 로고는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입니다. 날개와 닻을 없애고, 복고적 감성을 자극하는 디자인으로 바꿨습니다(브라이틀링이 과거에 사용한 로고를 살짝 다듬은 것으로 보입니다). 기존 로고는 파일럿 워치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물론 브라이틀링의 역사와 유산 대부분이 파일럿 워치에 기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한 선입견을 갖게 만든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변화가 절실한 상황에서 조지 컨은 브라이틀링의 이미지가 파일럿 워치로 굳어지는 걸 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실제로 그가 부임한 뒤로 브라이틀링은 영국의 모터사이클 제조 업체인 노튼 모터사이클(Norton Motorcycles), 미국의 해양 환경 보호 단체인 오션 컨버전시(Ocean Conservancy)와 파트너십을 맺었습니다. 이는 파일럿 워치가 전부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향후 전략을 위한 포석으로 풀이됩니다.
스크루 다운 크라운을 풀면 수동으로 메인스프링을 감을 수 있습니다. 메인스프링의 저항은 조금 강한 편입니다. 2단에서는 날짜를 조작할 수 있습니다. 특정 시간에 날짜 조작을 금하는 보통의 시계와 달리 아무 때나 날짜를 변경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크라운을 한 번 더 잡아당기면 바늘을 돌려 시간을 맞출 수 있습니다. 이때 초침은 정지합니다. 두 개의 푸시 버튼은 크로노그래프 작동을 담당합니다. 크로노그래프 버튼의 조작감은 무겁습니다.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초침이 부드럽게 출발합니다. 크로노그래프 분침은 1분이 지날 때마다 한 칸씩 앞으로 전진합니다.
두툼한 흰색 스티치로 장식한 악어가죽 스트랩은 핀 버클과 짝을 이룹니다. 특이한 점은 스트랩 크기가 23/20mm라는 겁니다. 내비타이머 8 컬렉션의 다른 모델도 동일합니다. 케이스 지름이 43mm인 내비타이머 1에는 22/20mm 스트랩을 사용합니다. 적절한 균형과 비율을 위해 러그 사이의 간격을 미세하게 넓혔을 수 있지만 이로 인해 다른 스트랩과의 호환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생겼습니다.
브러시드 처리한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백 너머로 보이는 셀프와인딩 무브먼트는 2009년에 출시한 브랜드 최초의 매뉴팩처 칼리버 B01입니다. COSC 인증을 받았고, 70시간 파워리저브를 제공합니다. 진동수는 시간 당 28,800vph(4Hz), 보석 수는 47개입니다. 크로노그래프는 컬럼 휠과 수직 클러치 방식을 따릅니다. 볼 베어링을 사용한 양방향 와인딩 로터는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와인딩 효율을 높였습니다. 밸런스에는 에타크론 레귤레이터를 채택했고, 나사를 돌려 오차를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자세 변화와 충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이스케이프먼트 휠에 설치한 키프의 충격 흡수 장치도 눈에 띕니다.
내비타이머 8 B01 크로노그래프 43은 스테인리스스틸 케이스를 사용한 블루, 블랙, 실버 다이얼과 18K 로즈골드 케이스의 브론즈색 다이얼까지 총 네 가지 버전으로 출시합니다. 이중 베젤에 인덱스를 새긴 실버 다이얼 모델은 1000개 한정 생산합니다. 블루와 블랙 다이얼 모델은 브레이슬릿 버전으로도 구입할 수 있습니다. 리뷰 제품의 가격은 878만원입니다.
내비타이머 8과의 첫 만남은 조금 낯설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브라이틀링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계를 기획한 의도를 파악하고 브라이틀링이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어색함을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내비타이머 8은 대중 지향적인 시계입니다. 전문가나 진지한 마니아를 위한 역할은 내비타이머 1이나 다른 시계에 양보한 채 새로운 여정에 동참할 모험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크로노그래프와 파일럿 워치라는 브라이틀링의 빛나는 유산이 숨쉬고 있습니다.
시계자체로는 예쁘지만 ㅠ
예전 브라이틀링의 느낌이 더 좋았던거같아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