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쉐론 콘스탄틴이 써 내려간 창조적인 시간 - 외흐 디스크레
바쉐론 콘스탄틴에게 2015년은 나름 의미가 깊은 해입니다. 단 한번도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260주년을 맞이한 해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시계인 ref. 57260을 발표하기도 했죠. 무려 57개의 컴플리케이션에 2800의 부품을 탑재한 회중시계로 그레고리언 달력과 히브리력을 비롯해 빅벤의 웨스트민스터 차임을 그대로 구현했고, 세계 최초로 밤시간 동안 무음 모드가 가능하도록 고안했습니다.
- 바쉐론 콘스탄틴의 ref. 57260 관련 TF 뉴스 참조: https://www.timeforum.co.kr/NEWSNINFORMATION/13340316
바쉐론 콘스탄틴은 의미 깊은 2015년, 브랜드에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여성 고객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9월 말 홍콩에서 열린 워치스앤원더스에서 외흐 크레아티브(Heures Créatives)라는 이름의 새로운 여성 주얼리 워치 컬렉션을 선보인 것입니다. 그대로 직역해보자면 '창조적인 시간'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외흐 로망티끄(Heure Romantique), 외흐 디스크레(Heure Discrète), 외흐 오다셔스(Heure Audacieuse) 세 가지 모델로 이뤄지는데, 각 모델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뚜렷한 개성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 왼쪽부터 외흐 로망티끄, 외흐 디스크레, 외흐 오다셔스
이번 리뷰에서는 이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외관을 지닌, 부채 모양을 한 '시크릿 워치 외흐 디스크레'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전에 바쉐론 콘스탄틴과 여성 고객이 오랜 세월 쌓아온 각별한 관계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볼까요?
- 외흐 크레아티브 중 외흐 디스크레
앞서 언급했다시피 바쉐론 콘스탄틴은 설립 초창기부터 여성들을 위한 시계들을 꾸준히 만들어왔습니다. 1810년 여성에게 헌정한 첫 레이디스 워치를 제작했는데, 디자인이나 장식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진정한 컴플리케이션이라 할 수 있는 쿼터 리피터 회중 시계였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그것도 여성 고객이 직접 주문한 것이었죠. 당시는 "여성이 왜 굳이 시간을 알아야 하지?"라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던 시기였지만 바쉐론 콘스탄틴은 남성용과 더불어 우아한 디자인의 여성용 시계 제작에도 몰두했습니다. 남성용 시계에 비해 크기가 작다 보니 미니어처 기술과 장식 공예에 있어 훨씬 섬세함이 요구되었죠. 인그레이버, 에나멜러, 기요세 장인, 주얼러, 젬세터 등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상상력과 기술력을 동원해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목걸이 펜던트 형태는 물론 허리 장식에 다는 형태, 브로치처럼 꽂는 형태 등 한계는 없었고, 이는 점차 높은 지위와 고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오브제로 자리매김합니다.
19세기 말에는 팔찌 형태의 일명 워치-브레이슬릿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이후 자연스럽게 손목시계로 이어졌습니다. 1889년 바쉐론 콘스탄틴은 오로지 여성 시계만을 위해 고안한 첫 무브먼트를 선보이기에 이릅니다. 와인딩하는 크라운 없이 베젤을 돌려서 와인딩과 시간 조정을 할 수 있는 흥미로운 시계로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시계에서 당시 미술 사조의 흔적을 그대로 엿볼 수 있습니다. 펜던트 시계, 커프 시계, 손목에 여러 번 감는 형태를 비롯해 실을 짜서 만든 링크, 새틴이나 가죽으로 제작한 리본 등 여성스러운 디테일도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실제 194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광고에서도 여성용 시계의 높은 인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 1940년대 바쉐론 콘스탄틴 여성 시계 광고 이미지
그럼 이제 다시 2015년으로 돌아와볼까요? 외흐 크레아티브는 각각 아르누보, 아르데코, 그리고 1970년대라는 미술사적으로도 큰 상징성을 지니는 세 개의 사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아르누보는 곡선미 넘치는 실루엣, 유기적인 선,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 등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요. 아르누보에서 영감을 받은 외흐 로망티끄는 유려한 곡선의 베젤이 마치 파도가 치는 듯한 형태로 다이얼을 감싸고 있습니다. 과한 장식은 덜어내고 오로지 부드럽고 유연한 곡선미에 의지를 했죠.
- 1916년 제작한 아르누보 사조에서 영감을 받은 여성 시계(왼쪽), 2015년 선보인 외흐 로망티끄(오른쪽)
자유를 얻게 된(!) 1970년대 여성들은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자유분방한 70년대에서 영감을 가져온 외흐 오다셔스는 흡사 벨트를 손목에 옮겨온 듯한 형태가 매우 아방가르드합니다. 여기에 스노 세팅(서로 다른 크기의 스톤을 빈틈없이 빽빽하게 세팅하는 기법) 기법이나 바게트 컷 다이아몬드를 세팅해 블랙 새틴 스트랩과 대조적인 화려함을 발산합니다.
- 1970년대 제작한 바쉐론 콘스탄틴 여성 시계(왼쪽), 2015년 선보인 외흐 오다셔스(오른쪽)
자, 그럼 드디어 주인공인 외흐 디스크레를 만나보시겠습니다. 기하학적인 대칭미와 정갈한 실루엣으로 정의할 수 있는 아르데코에서 영감을 가져왔습니다. 한눈에 봐도 딱 부채입니다. 실제로 바쉐론 콘스탄틴은 1919년 당시 유행하던 부채(fan) 모양을 본 딴 펜던트 워치를 선보인 바 있는데, 거의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이것이 손목 시계가 된 것입니다.한편으로는 로 웨이스트 드레스, 깃털과 반짝이는 시퀸 장식 드레스 등 일명 '광란의 20년대'를 풍미했던 드레스를 연상시키기까지 합니다.
- 2015년 선보인 외흐 디스크레
외흐 디스크레는 나머지 두 모델과 달리 시크릿 워치로 제작되었습니다. 부채를 슬며시 열면 다이얼이 나타나며 시간을 보여줍니다.
독특한 외모에 가장 큰 일조를 하고 있는 부채 모양 케이스부터 살펴볼까요? 사이즈는 36.6 x 48mm로 마치 레이스 부채를 연상시키듯 섬세하게 디자인한 점이 눈길을 끕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부채 부분의 일부를 오른쪽으로 밀면 작은 다이얼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뚜껑(!)을 한쪽으로 밀거나 여는 형태의 시크릿 워치는 사실 많이 접하긴 했는데, 실제 부채살이 접히듯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열고 닫히는 형태의 시크릿 워치라,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부채처럼 유연한 소재가 아닌, 골드와 다이아몬드로 이렇게 부드럽게 열리도록 디자인했다는 점에서 말이죠. 실제 꽤 부드럽게 밀려서인지 저도 모르게 자꾸 계속 밀어보게 되더군요. 밀리는 부분은 약간 높이를 두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다이얼에 스크래치를 내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생각보다 부채 모양이 커서 착용을 했을 때 손목에 걸리는 부분에서 좀 불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실제로 부채가 유선형의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다가 두께도 6.07mm라 걸리는 곳 없이 부드럽고, 오히려 큰 부채 사이즈가 좀 더 우아한 느낌을 주는 듯 했습니다. 마치 팔찌를 찬 것처럼 말이죠. 시계와 주얼리 두 개의 역할을 하는 일석이조의 제품이라고나 할까요? 아래에서 보시다시피 부채 옆 부분에도 촘촘하게 스노 세팅으로 반짝임을 더해 마무리했습니다.
다이얼을 살펴보면 아무런 인덱스 없이 브랜드 로고, 시침, 분침만을 놓아 '다이아몬드 부채'의 화려함이 더욱 부각되도록 했습니다. 시침 끝 부분은 스켈레톤 처리해 시침과 분침을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다이얼이 부채 모양을 따라 20도 가량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다이얼 위 12시 방향도 살짝 기울어져 있습니다. 다이얼 위 마치 부채살의 일부처럼 직선 형태의 패턴을 새긴 점도 눈에 띄네요(위에서 보실 수 있듯이 케이스백에도 브랜드 로고와 함께 부채살을 연상시키는 스트라이프를 넣었습니다). 크라운 역시 부채 모양 때문에 오른편에는 적당한(!) 자리가 없어서인지 시계 케이스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카보숑 컷을 세팅해 넣었습니다.
외흐 크레아티브는 수동 무브먼트 칼리버 1055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15.7mm라는 작은 사이즈 덕분에 자연스럽게 케이스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타임온리' 기능으로 시계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데, 시계 자체의 디자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30m 방수 기능을 갖추고 있고, 바쉐론 콘스탄틴의 말테 크로스 모양에서 영감을 가져온 버클에까지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섬세함도 엿보입니다.
국내에는 블랙 새틴 스트랩 버전과 브레이슬릿까지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초호화 버전이 까르네로 들어왔습니다. 새틴 스트랩 버전은 차분하고 단아한 느낌, 다이아몬드 브레이슬릿 버전은 화려함을 극치를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블랙 새틴 스트랩 버전이 다이아몬드 부채의 매력을 부각시킨다는 느낌이 들긴 했습니다. 아래는 새틴 스트랩 버전을 착용한 모습입니다.
사실 최근 몇 년간 많은 브랜드들이 여성 고객들을 각별하게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남성 시계에서 사이즈를 줄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독자적으로 여성을 타깃으로 한 새로운 컬렉션을 런칭하는 식이었죠. 바쉐론 콘스탄틴의 외흐 크레아티브 컬렉션 역시 여성을 위한 심미적인 측면과 더불어 기계식 시계로서의 매력도 살포시(!) 느낄 수 있는 제품들로 구성한 점이 눈길을 끕니다. 외흐 디스크레나 외흐 오다셔스처럼 독특한 디자인, 그리고 외흐 로망티끄처럼 누구에게나 어울릴 수 있는 상대적으로 무난한(!) 디자인을 적절하게 믹스해놓아 좀 더 폭넓은 여성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고려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흐 크레아티브 컬렉션은 12월 초부터 부티크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하니, 궁금하신 분은 바쉐론 콘스탄틴 부티크를 방문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촬영 협조:
포토그래퍼 김두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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