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퍼스로의 여행, 여덟번째
어느덧 여덟번째 오퍼스를 리뷰합니다. 올해 나온 오퍼스 12까지 이제 네개 남았군요. 올해안에는 다 리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인들에게 8은 럭키 넘버입니다. 재산이 불어난다는 發하고 음이 같아서 길하다고 생각한다는군요. 하지만 서양인들에게는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8은 길한 숫자라기 보다는 어딘가 슬쩍 불길한 냄새가 나는 숫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다리가 여덟개인 문어는 서양권 일부(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만 먹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마의 생물.. 같은 불길한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오퍼스 8의 제작자는 어딘가 문어를 닮은 프레드릭 가리노입니다.
[아티스트 분위기가 물씬 나는 프레드릭 가리노 아저씨]
프레드릭 가리노는 1971년생입니다. 저보다 어리다는게 충격이군여..-_-;; 나도 밖에 나가면 저렇게 보일거라고 생각하니 멘붕. 역시 머리카락은 소중하다는 걸 느낍니다. 요즘 탈모가 심한데.. 쿨럭..
오퍼스 10주년 행사에서 남긴 이 사진에는 오퍼스 6,7,8의 제작자가 한 샷에 담겨있습니다. 저번에 두더지라고 했던 안드레아 옆에서 배내밀고 있는 프레드릭 가리노가 보이는군요. 두더지와 문어라... 저 두사람이 부디 한글을 못 읽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냥 이미지가 그렇다는 거죠. -_-;;; 실제로는 존경하는 워치메이커들입니다. 사사사..사랑합니다.
프레드릭 가리노는 해군사관학교에서 이력을 시작해서(독특합니다. 역시.. 바다에서 온 문어랄까요..) 오데마 피게와 르노앤파피 공방을 거쳐 2005년에 독립사업체를 차린 디벨로퍼입니다. 자기 이름으로 시계를 만드는 길보다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무브먼트를 개발해주는 일들을 주로 하는 모양입니다. 구글링을 해봐도 만들었다는 시계는 오퍼스8 하나군요. 하지만 지금까지 시리즈를 쭈욱 주의깊게 읽어온 분이시라면 프레드릭 가리노의 이름이 낯설지 않으실겁니다. 어디서 보셨을까요??
네. 바로 비에니 할터의 괴작 오퍼스3를 실제로 움직이게 만든 해결사가 프레드릭 가리노죠. 꽤나 까다로웠을 트러블슈팅을 (그것도 비에니 할터의 작품을..)해낸 역량을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만든 오퍼스 8은 과연 어떤 시계인지 슬슬 기대가 되기 시작합니다.
[파격이라는 이름의 포스터, 사실은 파격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을 쓰고 싶었지만 너무 야해서리... ]
오퍼스 8을 리뷰하기에 앞서 먼저 던져드릴 키워드는 바로 "파격"입니다. 오퍼스 시리즈의 근간은 역시 막시밀리안 뷔세가 세워놓은 독립시계 장인과 해리 윈스턴의 유전자를 섞어서 전혀 새로운 시계를 만들어낸다..라는 것일겁니다. 하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오퍼스만의 어떤 공식 같은 것이 생겼지요. 이전에도 한번 썼던 적이 있습니다만 홀수는 전혀 새로운 혁신적인 시계, 그리고 짝수는 조금 보수적이고 화려하면서 뚜르비용이 들어간 시계다. 라는 공식이요.
이전의 오퍼스 7까지 제작자들은 이 공식에서 어긋나지 않는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문어 아저씨 프레드릭 가리노는 전혀 이런 공식에 어울리지 않는 확 깨는 시계를 시리즈의 여덟번째 작품으로 선보이고 맙니다. 바로.. 이것...
바젤 2008에 등장해서 충격을 안겨준 오퍼스 8입니다.
디자인을 먼저 살펴보면 케이스의 상하에 자리잡은 저 유서깊은 모양은 해리 윈스턴의 전통적인 오퍼스 시리즈가 다시 돌아온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시계를 보자니.. 어딘가 모르게 해리윈스턴이 아니라 카시오나 세이코가 만든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군요. 재미있습니다. 뚜르비용이 들어간 것도 아닌듯 하고 전통적인 시계와도 모습이 다르니 이거야말로 파격적인 오퍼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레트로한 느낌을 줍니다. 착용샷을 보면 알수 있듯이 흔히 볼 수 있는 전자시계같은 비주얼이죠. 시간과 분을 나타내는 디스플레이는 왼쪽이 시간과 오전 오후를 나타내는 디스플레이이고 오른쪽의 분또한 5분 단위로 현재의 시간을 표시해줍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평평한 모습이고 오른쪽에 있는 스위치를 올려야만 비로소 시간과 분이 나타나는 구조인 모양이네요. 시계라는 물건이 정확한 시분초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시계 또한 기존의 오퍼스와 마찬가지로 그닥 쓸모없는 물건입니다. 하지만 꽤나 재미있는 시계군요.
뒷면에도 여러가지 정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선 디스크 형태로 돌아가며 시간과 분을 나타내고 오전과 오후, 파워리저브까지 나타낸다고 하는군요. 언뜻보면 회로기판처럼 생긴 게 재미있습니다. 시계를 돌려차는 구조도 아닌데.. 왜 뒷면에 이런 것을 넣었는지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무브먼트의 제작 과정입니다. 보이지 않는 구석 구석까지 세심하게 가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시계와 달리 쓰여진 부품수며 보석수도 상당히 많습니다. 총 437개의 부품과 44개의 보석이 사용되었다고 하니 일반적인 시계의 두배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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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스의 소재는 백금이며 사이즈는 45.8밀리*33.5밀리 라는 다소 변태적인 사이즈입니다. 뭐 딱히 정해놓은 사이즈가 있는 건 아니지만.. 쩜몇하고 떨어지는 건 이 시계가 처음이네요. 공산품이 아니니 그러려니 합니다. 오퍼스 8은 전부 50개가 제작된 한정판입니다.
오퍼스8의 최초 이미지 스케치입니다. 어딘가 스타트렉같은 70년대 SF영화에 등장할 것 같은 비쥬얼이군요. 왠지 멋집니다만.. 이런 비쥬얼은 이미 오퍼스 5에서 펠릭스 바움가트너가 한번 보여줬던 거죠. 아쉽습니다. 파격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서 보면 볼수록 파격과는 조금씩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이랄까요.
오퍼스 8의 개발단계에서 사용된 이미지 보드를 보면 이 시계의 성격을 보다 정확하게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략적인 이미지의 나열에서 보듯이 오퍼스 8의 개발에 사용된 이미지들은 주로 디지털 디스플레이와 팝아트, 그리고 픽셀로 이뤄진 예술작품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위에 보시다시피 시간과 오전 오후를 나타내는 앞쪽의 디스플레이는 뒤에서 구동되는 장치가 핀을 밀어올려 현재의 시간을 나타내는 구조입니다. 이런 것은 새로 나온 개념이 아니죠. 기존에도 존재하던 핀아트라는 장난감 혹은 예술 작품입니다.
[예술 혹은 외설]
사람이나 물체의 모양을 그대로 표현해줄 수 있는 이런 디스플레이는 꽤나 재미있습니다.
재미있는 장난감정도로 치부되던 이런 디스플레이 방식을 시계로 옮겨올 생각을 하고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런 혁신적인 디스플레이를 해내다니.. 그리고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다니 오퍼스 8은 정말 대단한 작품이죠???
고개를 끄덕이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시장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자료를 찾아본 모든 모델중에서 가장 인기없는 모델이 아니었나 싶네요. 이미지도 관련 기사도 리뷰도 가장 형편없이 적습니다. 이거 한정판 50개라던데 실제로 다 팔리기는 했는지 그것마저 의문스러울 정도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08년 바젤에서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가진 최초의 기계식 시계의 타이틀을 거머쥔건 오퍼스 8이 아니라 드 그리소고노사의 메카니코 디지였습니다. 오퍼스 8도 물론 기계식 시계이고 디지털 디스플레이 방식입니다만.. 메카니코 디지에는 한수 뒤진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죠.
[드 그리소고노의 메카니코 디지, 최초의 디지털 디스플레이 방식을 도입한 기계식 시계]
메카니코 디지는 듀얼타임 시계입니다. 상단과 하단이 따로 따로 움직이면서 시간을 표시해주죠. 오퍼스8이 5분단위의 시간을 나타내주는데 비해 이녀석은 현재 시간과 분을 정확하게 나타내 줍니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군요.
시계의 구조와 무브먼트에 민감한 팬들은 이처럼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좀더 기계적으로 확실하게 구현한 메카니코 디지의 손을 들어준것 같습니다. 덕분에 오퍼스 8은 왠지 시장에서 쓸쓸히 외면받는 신세가 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딱히 메카니코 디지의 존재때문에 오퍼스 8이 묻혔다는 얘기는 반만 맞는 얘긴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퍼스 8이 인기가 없는 이유는 단순히 못생겼기 때문, 혹은 시대착오적인 발상때문일지도 모르지요.
70불이면 살 수 있는 이 탁상 시계는 두개의 건전지로 움직입니다. 오퍼스 8보다 훨씬 보고있기에 재미있는 시계죠. 핀아트의 개념을 확실히 구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유지 보수 비용도 적고 고장이 나면 부담없이 버릴수도 있습니다.
디지털 디스플레이 시계의 최강자 지샥은 어떻습니까? 유지 보수가 쉽고 정확한 것은 물론이요. 물이며 충격 먼지에도 강합니다. 값은 100불도 안되죠. 40만불짜리 오퍼스 8이 지
샥과 비교되는 것은 어쩌면 말이 안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세대는 이미 지샥이라는 시계의 존재를 뇌리에 깊게 새겨놓은 디지털 세대입니다.
35만불짜리 메카니코 디지도 물론 돈이 무한정으로 많다면야 하나 들이고 싶습니다만...
아나디지 시계가 가지고 싶다면 차라리 이쪽을 사는게 낫지 않을까요?? 결국 하이엔드 시계의 영역은 부자들의 도락이고 그 성감대(?)를 얼마나 정확하게 누르는가가 인기의 관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퍼스 8은 상당히 헛다리를 짚은 셈인 것 같구요.
이제 슬슬 글을 마무리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파격이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용두사미라는 사자성어로 끝난 느낌의 오퍼스 8을 보며 어떤 기계 장치 하나를 떠올립니다.
휴고라는 영화에 등장한 자동인형 오토마톤이지요.
브레게 시대 이후로 거듭 개량에 개량, 연구 개발을 거친 오토마톤은 로봇의 원형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람이 하는 것들을 흉내내는 오토마톤은 등장했던 시대에는 최고의 부자, 권력자들이 향유할 수 있는 장난감이었습니다. 일종의 기표였다고 보셔도 될것 같네요.
그당시에 생산된 오토마톤을 복원하고 전시하는 공간은 있지만 지금에 와서 집집마다 하나씩 들여놓으라고 오토마톤을 만드는 회사는 없습니다. 채산성이 안맞기 때문이죠. 저렴한 가격에 같이 놀아주고 학습하는 로봇 강아지가 있는 세상에 글쓰고 그림 그리는 오토마톤이 왜 필요하단 말입니까? 조만간 가정부 로봇이 나올 시대에 오토마톤은 시대착오적인 물건입니다. 오직 역사의 일부로써 그 의미가 있을 뿐이겠지요.
오퍼스 8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공이 들어간 장난감. 이제는 시장이 원하지 않는 하나의 기표.
제 리뷰와는 달리 오퍼스 8은 어쩌면 무지하게 인기가 있고 실제로는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는 물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2008년을 기점으로 함디 챠티가 몽블랑으로 옮겨간 걸 보면 해리 윈스턴에서도 해당 시리즈에 대한 문책성 인사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부분에 대해서는 수동칠님이 직접 함디 챠티를 인터뷰한 적도 있으시니 관련 정보를 보충해 주셨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습니다.
사실 수집가와 시장, 일반적인 시계 팬들의 눈에는 딱히 마음에 차지 않는 물건일지도 모르겠지만 저에게 오퍼스 8은 그 자체로 파격의 아이콘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호감이 갑니다. 그 돈 들여 저걸 사겠느냐?? 고 묻는다면 고개를 흔들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한 워치 메이커의 용기와 도전이 묻어있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요. 꼭 에베레스트를 올라야 맛인가요. 중간에 내려와도 지향점이 높았다면 인정은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다음에는 오퍼스 9을 함께 살펴 보시지요. 에릭 지로와 장 마르크 비더레흐트가 등장하는 재미있는 리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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