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 전 스쿠터를 다시 질렀습니다. ‘다시’라는 단어는 처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꼴랑 두 번 쨉니다. ㅎㅎㅎ)
50cc 스쿠터로 편하게 다녔지만 제법 먼 거리로 이사한 후로는 50cc의 작은 심장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가혹할 정도로 긴 거리를 달려야 했기에, 제법 정이 들었지만 다른 좋은 주인을 만나게 해줘야 했습니다. 시계를 새 주인 만나게 해 줄 때의 짠한 기분이 다시 들더군요. (요즘은 시계 시집 보낼 때 아무 느낌도 없슴다. 옛날에 그랬다는 말이죠)
왕복 40km에 달하는 거리인지라 자주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거리를 달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안정된 스쿠터를 찾았지만, 예전부터 눈 여겨 보고 있던 그 녀석을 결국 낙점했습니다. 안전하고 안정된 라이딩을 하기 위한 성능 좋고 별 말썽 없는 마치 그랜드 세이코와 같은 일제 스쿠터들이 즐비 했습니다만, 제 감성을 자극한 유일한 녀석은 이탈리아제 ‘베스파(Vespa)’ 였습니다.
제가 50cc를 넘길 때처럼 제게 자신의 말벌(베스파)을 넘기며 아쉬워하던 전 오너의 조작 설명을 들으며,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내려 쬐던 휴일 오후였음에도 단숨에 걸리지 않는 시동, 조금만 자신과 함께하지 않으면 근처 바이크 샵으로 가서 점프를 해야 하는 배터리. 바이크 왕국 일본의 무던한 바이크와 달리 성격이 무지 까칠합니다. 하지만 시동을 걸자 카랑카랑하게 들리는 엔진 음과 보면 볼 수록 매력적인 자태는 당장 안장위로 올라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고작 125cc의 바이크도 아닌 스쿠터를 타면서 이러한 글을 쓰는 것이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만 말이죠.
안전 운행을 하기 위해 바이크 헬멧을 구입했습니다. 매력적인 스쿠터는 옳지 못한 욕망을 참지 못한 자들의 표적이 되는지라 바이용 체인도 구입을 했지요. 헬멧은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지만 또 감성 운운하며 혹하게 된 이탈리아제 헬멧. 보기만 하면 멋진데 막상 쓰면 헬멧이 커서 텔레토비 같습니다. 솔직히 헬멧을 받아 들고 5분 정도 후회했습니다. 머리가 콩알만한 서양애들이나 어울릴 헬멧을 사다니…라고요. 그리고 헬멧 자체의 성능은 가격에 비해 그저 그렇다고 합니다. 대신 체인은 믿을 만한 독일제를 샀습니다. 바이크 동호회에서 가장 안전한 체인의 하나라고 하더군요.
요즘 포럼에 부는 파네라이 열풍에 마음이 흔들려 다시 파네리스티가 되려고 했습니다. 무브먼트는 별 볼일 없는 시계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성보다는 또 감성이 앞선 것이죠. 처음 파네라이를 보았을 때는 저런 시계를 왜 사야 하느냐고 강한 이성이 스스로를 통제했지만 보면 볼수록 감성의 힘이 강해져 결국은 손목 위에 파네라이를 손목 위에 올려놓고 말았죠.
도대체 이탈리아인들의 DNA에는 뭐가 들어있길래 이렇게 마음을 흔드는 물건들을 쏟아내는 것일까요?
베스파, 구입한 헬멧, 파네라이.
합리적으로 따져 보면 그것들을 선택하기에는 다른 대체품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대체품들을 하나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탈리안 테이스트.
비록 지금 제 손목 위에는 유압식 절단기로 덤벼야 잘라질 독일제 체인과 같은 우직한 시계가 올라가 있지만 언젠가 또 다시 한번 맛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