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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CI의 근황

알라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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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CI(Académie Horlogère Des Créateurs Indépendants)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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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CI의 공동설립자 스벤 앤더슨(Svend Anderson)


우리나라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소개되었던 초기에는 독립시계사협회로 불렸는데 위를 보면 협회보다는 학회가 더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AHCI 1984년 덴마크 출신의 스벤 엔더슨과 이탈리아 태생의 빈센트 칼라브레제가 공동으로 설립합니다. 설립 취지는 대량생산 시계에서 잃어버린 수공 예술의 순수성과 가치를 알리기 위한 단체랄까요. 같은 뜻을 지닌 이들과 하나의 소리를 내면 더욱 큰 소리가 날테니까요.

 

현재 멤버 리스트에는 36명으로 되어 있으나 고인이 된 조지 다니엘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식 멤버가 되기 위한 후보자가 7명이고, 후보자는 5년에 걸쳐 3번의 작품을 선보이는 것을 통해 최종 승인을 얻어야 AHCI의 명예로운 멤버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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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드 청. 시계가 몇 개냐고 물어보니 은행 금고와 집안 사방팔방 흩어져 있어서 알 수 없다고 말한 컬렉터의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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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F Jwrly Machine

  

ACHI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드러날 수 있었던 계기는 단연 인터넷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싱가폴의 퓨리스트나 미국의 타임존과 같은 시계 전문 사이트에서 주목을 받게 됩니다. 코어 컬렉터가 특히나 많은 싱가폴에서 AHCI의 시계는 상당히 어필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싱가폴 출신의 의사이자 여러 개의 클래닉을 경영하면서, 세계적인 컬렉터이기도 한 베르나르 청(Bernard Cheong)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싱가폴 컬렉터들은 한 브랜드의 핵심 모델을 모은 뒤, 다른 브랜드의 모델을 모으는 방식으로 단계적인 업그레이드를 한다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했다는 건지, 싱가폴 컬렉터들이 전부 그렇게 한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죠. 돈이 몰리는 나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돈을 쓸 곳이 없어서라는 모 메이커의 지사장의 분석도 있습니다. 집값, 자동차가 세계에서 비싸기로 1,2위를 다투기 때문에 그 돈이 시계로 몰린다는 거죠. 일리는 있지만 코어 컬렉터에게는 해당사항은 없어 보입니다. 베르나르드 청만 해도 열차의 옆좌석에서 노트북으로 보여준 사진에는 포르쉐 옆에 부인과 서있거나 토요타 RAV4로 전투기 사출좌석을 사무실로 옮기고 있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사출좌석은 뭐에 쓸거냐니까 의자 대용으로 쓰던가 장식할거라 해서 좀 허탈했죠) 베르나르 청은 워치 어워드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는 사람이니 이런 컬렉터들이 대량 생산 시계에서 더 이상 만족감이 올리가 없죠. MB&F Urwerk 같은 메이커가 먹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이들처럼 메이커의 틀을 갖추고 컬렉터에 접근하기 전의 시기라면 AHCI의 시계가 그 역할을 했을 겁니다.

 

실제로 뛰어난 워치메이커였던 프랑소와 폴 쥬른 같은 사람이 메이커를 세우기 이전 독립제작자로서 활동하던 시기, 너무나 뛰어났지만 그만큼 높은 가격 때문에 섣불리 살 수 없었던 시계를 사준 것이 싱가폴 컬렉터들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독립제작자들에게는 자신의 시계를 구매한 고객이면서 높은 이해도를 넘어 인간적인 교류까지 이어지는 컬렉터들이 자발적인 즐거움에서 인터넷에 포스팅 한 글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면서 AHCI는 설립 취지에 걸 맞는 시각이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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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리시티. 브리지 모양과 매크로 이미지만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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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 보틸라이넨의 고전적인 무브먼트

 

AHCI는 이제 설립 25년이 넘어서 30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간 스타 제작자들도 숱하게 등장했죠. 대표적인 인물이 단연 필립 듀포입니다. 공중파에 나온 덕을 톡톡히 봤지만 그 전부터 이미 매니아 사이에서는 수공, 전통을 대변하는 궁극적인 시계 심플리시티로 유명했고, 그와 비슷한 타입이 핀란드 태생의 카리 보틸라이넨입니다. NOS 푸조 무브먼트를 베이스로 고전적 아름다움을 지닌 시계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사실상 독립제작자 타이틀을 쓸 수 없는 인물도 여럿 나왔습니다. 프랑소와 폴 쥬른, 브랑크 뮬러, 안토니오 프레지우소는 이미 스스로의 이름을 건 메이커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AHCI의 활약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드러납니다. 메이커의 의뢰로 개발한 스페셜 피스를 설계하거나 제작하기도 하는데, 설계에서 유명한 인물이 비트 할디만, 젋은 시절의 프랑소와 폴 쥬른이 있고 공동 설립자의 한 사람인 빈센트 칼라브레제는 블랑팡의 플라잉 투르비용과 까루셀의 설계자이며 고 조지 다니엘스는 오메가 코-액시얼의 아버지입니다. 묵묵히 자신만의 세계관을 지켜가는 멤버도 물론 존재하고, 손목시계에 비해 주목도가 높지 않은 클락 제작을 하는 멤버도 여럿입니다. AHCI이 설립된 이래 멤버가 조금씩 늘었고 그들의 활약으로 위상도 높아졌지만 요즘은 예전과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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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얼라이언스. 타임 이온 얼라이언스

 

창립자의 한명인 빈센트 칼라브레제가 캐리어 막바지에 이르러 블랑팡에 취직을 하면서 독립시계사의 타이틀을 더 이상 공식적으로 쓸 수 없는 입장이 됩니다. AHCI의 로고가 들어간 넥타이를 늘 메고 있는 스벤 앤더슨이 AHCI를 홀로 대표해야 할 처지가 되었고, AHCI의 부흥을 이끌었던 장본인들이 이탈(?)하게 됩니다. 필립 듀포, 해리윈스턴 오푸스3의 비아니 할터, 카리 보틸라이넨, 그루벨 포시의 그루벨과 포시가 타임 이온이라는 새로운 단체를 세우게 됩니다. 독립제작자 역시 인간관계로 어우러져 있는지라 이탈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전에 없던 변화가 일어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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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스키아 마이케 브비에와 그녀의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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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루베와 그녀의 시계


 

세상을 떠나거나 다른 시각을 가진 멤버가 있다면, 새로운 피도 있습니다. 아마 AHCI 최초의 여성 멤버가 되지 않을까 싶은 사스키아 마이케 브비에(Saskia Maaike Bouvier). 현재 후보자의 한 명으로 2004년부터 자기 이름의 브랜드를 설립했습니다. 여성적인 시계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다이얼에 8개의 달이 있는 the 8 moons 모델이 흥미로워 보입니다. 스위스 출신으로 시계 학교에서 복원을 전공했군요. 다른 한 명은 독학으로 시계를 배운 중국인 큐 태 유에 이은 동양권 멤버인 키쿠노 마사히로(Kikuno Masahiro)입니다. 시계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재미있는데 자위대에 취직했다가 선배가 차고 있던 시계에 반해서 나도 한번 만들어 볼까라고 했다군요. 시계학교를 졸업하고 자신만의 시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조금 투박해 보이기는 하지만 투르비용, 퍼페츄얼 캘린더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손과 머리에 의한 시계라는데 의미가 클 것 같습니다. 역시 후보자이고 다른 동양인 후보자로 중국인인 슈 지아바오가 있는데 클락 쪽이라 자료가 거의 없근요. 후보자 중 한 명에 여성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에바 루베(Eva Leube)로 독일 태생이며 역시 시계학교를 거쳐 롤렉스에 일한 경력이 있습니다. 2007년부터 자기 이름의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커벡스 스타일이 특징입니다. (https://www.timeforum.co.kr/4135631 <-링고님 컬럼에도 그녀의 시계가 등장합니다)

 

이번 컬럼은 시간이 좀 오래 걸렸습니다. 썼던 내용을 지웠다가 새로 쓰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되었지만 이쪽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에는 좀 우울한 내용이었던지라) 컬럼의 발단은 https://www.timeforum.co.kr/3614852 <- 이 게시물을 쓰면서인데, AHCI의 창설자인 스벤 앤더슨과 잠시 이야기하면서입니다. 어두운 자주색에 AHCI의 로고가 반복적으로 들어간 넥타이를 늘 메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게 유독 촌스러워 보이더군요. (원래 세련된 색깔은 아니었긴 하지만)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무언가가 있어서 풀어보려고 했다가 AHCI의 근황을 보여주는 정도로 다시 담아두기로 했습니다. 언젠가 풀어도 될 날이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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