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고전의 아름다움 (part 1)
고전의 아름다움
(part 1)
2011년 6월 15일
소고지음
“야. 대충봐, 대충봐. 국사 배워서 어디다가 쓰겠냐? 응? 사실 그렇게 따지면 어느 과목이든 열심히 공부 할 필요가 있겠냐마는 미륵사지 석탑이 무슨수로 우리의 앞길을 열어주겠어?”
학창시절 목소리 큰 친구들에게 한번쯤은 들어보신 말 아니신가요? 저런 말.. 제가 하고 다녔습니다. 학창시절의 저는 자연계열을 공부했고 나중에는 반드시 멋진 공학도가 되어 의사, 판사, 변호사보다 힘이 센 공학자의 세계를 만들어보자고, 역사 따위는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어 보이겠다는.. 그런 말을 입에 올리던 녀석이었습니다. 철이 없어도 한참 없었죠. 물론 위의 대사 속에는 같이 시험을 보는 친구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 조금이라도 제가 높은 석차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자 했던 연막작전이 포함되어있기도 했었지만(미안하다 친구들아. 그때 내가 7개 틀렸다고 화내면서 집에 간 적 있었잖아 사실 나 3개밖에 안틀렸어.) 한편으론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던게 사실입니다. 학창시절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이 물론 그거 하나만은 아니었지만(엄마, 내 동생은 어디서 나오는거에요? 선생님, 도덕은 왜 배워야 하는거죠? 야, 무슨 주기율표를 외우고 그래. 그럴시간에 너희 부모님 생신이나 외우고다녀라 등등..) 비록 저는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L. 랑케의 역사관을 열심히 비교하며 암기해야 하는게 본분이었지만 그 이유나 가치에 대해서 납득하기 전에는 전력을 다해 공부하지 않았었던 지조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성적이요?
부진했습니다.
역사? 그게 뭐죠? 먹는겁니까? 홍길동 정도면 많이 아는거 아닌가요?
사실 대학생이 되고나서도 부족한 저의 역사지식을 후회했던 적은 (솔직히)한번도 없었습니다. 여자 동기들의 환심을 사기에는 ‘역사가 어쩌느니 정치가 어쩌느니’라고 하는 것 보다는 열심히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차라도 한 대, 그게 아니면 별다방에서 커피라도 한 잔 사주면서 아이패드라도 드래그하고 앉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유일한 지식인인양 가오를 잡는 것이 훨씬 쉬운 방법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기의 학문은 과거의 사례를 통해 미래를 배우는 ‘역사학적 접근’보다는 비선형적인 사회를 수학적으로 접근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비선형적 접근’이 각광을 받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역사나 사회참여는 등한시해도 사람들이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굉장히 안정되어있는 시기여서 ‘~시위’, ‘~운동’이라는 말은 사학과 애들이나 이상한 명분에 휩싸여 돌아다니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죠. 제 주변 공학도들도 대부분 비슷한 그라운드를 공유하며 자랐기에 역사, 사회 참여적 마인드는 제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사회적으로 부당한 일을 시켜도 고분고분 잘 해낼 것만 같은 세대라고나 해야 할까요? 아마도 제 친구 녀석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TF 회원님들과 시계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제가 가장 크게 부딪치고 숨이 턱턱 막히며, 요즘 들어 뼈저리게 그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는 그런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이 바로 ‘역사’입니다. 책상 위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라 암기만 해야 했던 그때 그 시절의 역사는 바로 이 바로 사회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생존 필수품’이었던 것임을 이제와서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부모님 몰래 가입한 아이디로 감상하고 계시는 60만 예비 TF 학생회원님들께서는 싫어도 역사 열심히 공부하셔요. 후회합니다.
-
이 시계와 AP Wempe edition 중 하나의 시계만 구매하실 수 있다면 여러분은 감히 알랭씨의 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엥? 그럴 수 있다구요? 제정신이십니까 지금?
서문이 길었습니다. 사실 오늘 할 이야기는 정말 지루하면서도 꼭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야 요즘 한창 뜨고 있는 MB&F나 AHCI, 제랄드 젠타, 알랭 실버스타인 같은 정신나간 사람들(?)의 정신없는 정신세계를 조금이라도 즐겁게 이해시켜드릴 수 있는 초석과도 같은 이야기가 될것이기 때문이죠. 비록 제가 이렇게 허풍을 크게 쳐놓고 어떻게 그 뒷감당을 해내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친님께 한번이라도 “시계 좋아한다더니 교양있게(?) 돈지랄을 하고있는 것 같네?”라는 칭찬을 들어보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볼 법한 이야기나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갑니다.
그러니까.. 클래식(Classic)이란 무엇일까요? 오늘도 저는 옆구리를 스치며 수도 없이 지나가는 스포츠카를 동경하며 마티즈 안에서 바나나 맛 우유를 빨고 있고, 환상적인 오피스를 꿈꾸면서 한 평 남짓한 파티션 벽을 여행지의 아름다운 사진들로 도배해놓고 있는데. 그런 저의 빠듯하고 가난한 세계에 ‘클래식’이 존재나 하긴 하는 걸까요? (타임포럼 모더레이터이신 ‘어떤 분’을 디스하는게 절대로 절대로 아닙니다. 여기서 ‘클래식’은 그냥 ‘클래식’일 뿐이란 말이죠. 흠흠.) 정답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입니다. (자자, 던지시려던 돌 잠깐 내려놓으시고 조금만 더 제 얘기를 들어봐주세요.) 우리는 먼저 클래식(Classic)이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합니다. 클래식의 어원은 ‘Superb Class(최고의 자격)’이라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책을 옆구리에 끼고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자면, 고대 로마 시민들은 모두 6계급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 최상의 계급이 바로 클라시쿠스(Classicus)라는 계급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은 바로 이 시대의 클라시쿠스 족(왕, 귀족, 기타 돈 많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클래식이란 바로 이 사람들이 누리던 문화, 사회양식을 지칭하는 단어였습니다. (사회지도층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사회지도층’에서 ‘대한민국 이등병’으로 전락한 현모 군의 모습이 잠시 스처지나는군요. 잠깐만요. 눈물 좀 닦고요.)
ㅠㅠ
사실 클래식에도 ‘넓은 의미로서의 클래식’과 ‘좁은 의미로서의 클래식’이 존재합니다. 넓은 의미로서의 클래식은 ‘시대사조로서의 클래식.’ 그러니까 ‘옛 것’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단어로서의 클래식이고, 좁은 의미로서의 클래식은 그 문화와 양식이 오늘날까지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르네상스 시기(A.D 14~16)부터 시작하여 바로크(A.D 17)를 지나 로코코(A.D 18) 예술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범위를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먼저 좁은 의미로서의 클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클래식 내부에 존재하는 있는 사조들에 대하여 설명을 시작할까 합니다.
르네상스 이전 시기의 미술은 오로지 신을 경배하고,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주기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존재하던 예술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
복잡한 개념인 르네상스를 이렇다 한 마디로 쉽게 정리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르네상스는 중세와 근대 사이를 이어주는 교두보적인 시기에 일어났던 인간 해방적 예술을 칭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고전 명화’로 알고 있는 여러 미술작품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탄생하기에 이르죠. 르네상스 이전 시대의 서양 예술은 전적으로 신(神) 중심적 예술이었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은 신을 인간에 비유하여 작품을 표현해보기 시작하고, 예전에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신 이외의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죠. 르네상스 이전 예술가들이 오로지 미술을 신(神)을 그리는 도구로서 사용했다면 르네상스는 그러한 미술에서 탈피해, 신 이외의 것들-인간이나 자연물, 자연현상, 인간의 문화 등-에 예술을 적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Birth Venus, Bottiecelli
하지만 르네상스가 들불처럼 퍼져 하나의 사조로 자리 잡게 되고난 뒤부터 과거의 예술은 급격한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신화(神話)에 나오던 신들의 모습이 신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한 명의 인간의 모습에 가깝게 묘사되기 시작하고, 신화 속 인물들이 '사람처럼' 감정을 가지고 갈등을 겪게되는 이야기들과 그러한 것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쏟아지기에 이릅니다.
이제 시계 이야기를 해볼까요. 14~16세기의 서양미술을 주도했던 르네상스 예술과는 다르게 최초의 휴대용 시계의 등장은 르네상스 시기 끝물인 16세기에나 등장하게 됩니다.(아래사진 참조) 그러니까 르네상스의 중심에 ‘시계’가 있을 수는 없었지만 ‘시계’의 중심에는 이미 르네상스가 촉촉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시계의 데커레이션 파트에 있어서는 르네상스 양식이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그 기반이 튼튼한 상태였습니다. 자연물을 형상화한 데커레이션과 도구로의 역할 뿐만이 아닌 예술적 의미를 가진 개인용 장신구의 등장은(유일신 사상이 확고했던 당시 서양세계에서 개인 액세서리의 등장은 유일신 사상에서 벗어나 인간 전반적인 문화를 모두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시계들이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09년 SIHH에서 발표한 Jaeger LeCourtle의 ‘Enamel work’중 Venus(좌)
16세기 말 르네상스 시기에 제작된것으로 추정되는 포켓워치 (우)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예술로 넘어가기까지 16세기와 17세기 사이에, 서양 문명은 다양한 사건을 겪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은 바로 태양왕(Sun King)으로 불리는 루이 14세의 등장이었죠. 아시다시피 루이 14세(1643~1715)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전제군주입니다. 루이 14세 이전에는 왕의 권한이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힘보다는 법의 힘이, 법의 힘보다는 교황의 힘이 훨씬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에 왕권을 잡았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루이 14세의 즉위 당시 나이는 5살. 당시 프랑스의 재정적인 상황은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인해 굉장히 피폐한 상황이었습니다. 국민들은 틈틈이 반항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파리고등법원은 국민의 입장을 대표한다는 빌미로 왕권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태양왕 루이 XIV
'짐이 곧 국가이니라.'
여기에 귀족들의 불만이 겹쳐 ‘프롱드의 난’까지 일어나게 되었고, 프랑스 전역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루이 14세는 파리를 떠나 이곳저곳으로 유랑을 하는 고난의 시기를 겪게 됩니다.(이때의 기억은 루이 14세에게 상당히 불쾌한 기억으로 남게 되어 나중에는 파리에 있던 궁전을 베르사유로 옮기기에 이르죠.) 이후 백부를 주축으로 혼란을 제압하기에 나선 루이 14세는 백부의 노환으로 인한 사망으로 그 정권을 이어받아 자신이 직접 회의를 주재하며, 파리고등법원의 칙령심사권(오늘날로 말하자면 ‘왕 내부감사’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을 박탈하고 법원을 단순한 ‘재판소’의 역할만 할 수 있도록 그 권한을 대폭 축소해버립니다. “짐(朕)은 곧 국가이다.”라는 루이 14세의 유명한 이 말이 등장하게 되는 첫 순간이었죠. 그리고 바로크 예술은 이러한 시기에 루이 14세의 영광을 기리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절정으로 치닫기에 이릅니다...
part 2에 계속...
타임포럼 뉴스 게시판 바로 가기
인스타그램 바로 가기
유튜브 바로 가기
페이스북 바로 가기
네이버 카페 바로 가기
Copyright ⓒ 2024 by TIMEFORUM All Rights Reserved.
게시물 저작권은 타임포럼에 있습니다. 허가 없이 사진과 원고를 복제 또는 도용할 경우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