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캐링 암 방식의 파텍 필립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CH 29-535 PS와 (아래)제니스 엘 프리메로
크로노그래프는 배럴에서 생성된 동력을 기어트레인에서 크로노그래프 메커니즘으로 어떻게 전달하고 차단하느냐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 번째는 많은 애호가들이 추종하는 캐링 암(carrying arm)입니다. 수평(horizontal) 혹은 래터럴(lateral) 클러치라고도 불리는데 심미적 관점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기계식 크로노그래프의 정통성을 계승한 적자라는 프리미엄도 있습니다. 단점은 크로노그래프가 작동 시 톱니바퀴와 톱니바퀴가 얽히면서 크로노그래프 초침이 튀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 이 과정에서 동력이 손실되는 바람에 밸런스 휠의 회전각이 줄어들고 그 결과 시계의 정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 롤렉스 칼리버 4130에 들어가는 버티컬 클러치 부품
두 번째는 현대 고급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의 표준이 된 수직 클러치입니다. 일찍이 그 가능성을 내다본 것은 스위스가 아닌 일본의 세이코였으나 프레드릭 피게의 칼리버 1185를 기점으로 오늘날 매뉴팩처 기반을 갖춘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설계를 차용할 만큼 우수한 성능을 인정 받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캐링 암의 부족함을 극복했지만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 바닥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로터라도 달려 있으면 캐링 암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과 아름다움은 깨끗이 포기해야 합니다. 캐링 암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두꺼울 수 밖에 없는 구조 때문에 시계의 두께도 함께 증가하는 것도 단점입니다.
- 호이어가 고안한 오실레이팅 피니언
마지막은 오실레이팅(oscillating) 혹은 스윙잉(swinging) 피니언입니다. 톱니바퀴의 축과 피니언만 남겨놓은 것처럼 생긴 부품을 사용합니다. 기본적인 원리는 캐링 암과 동일하다 보니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비슷한 문제를 겪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신 커다란 톱니바퀴를 수평으로 늘어뜨린 캐링 암 보다 간결한 구조 덕분에 공간에 여유가 있고, 제조와 조립이 비교적 용이한 것이 장점입니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범용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의 맹주 자리를 놓치지 않은 밸주 7750이 오실레이팅 피니언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무브먼트입니다.
- 버티컬 클러치를 적용한 태그호이어 칼리버 호이어 02(태그호이어 너마저...)
캐링 암은 값비싼 수동 크로노그래프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고급 시계의 궁극적인 가치는 보여지는 것. 결국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달려있기 때문에 볼거리가 많은 캐링 암이 선택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최신 자동 크로노그래프의 주류는 고전적인 칼럼 휠과 현대적인 수직 클러치를 병치해 보는 즐거움과 전통, 그에 상응하는 훌륭한 성능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오실레이팅 피니언은 이도 저도 아닌 듯 포지션이 애매해 보입니다. 캐링 암보다 화려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직 클러치보다 월등하지도 않습니다. 오실레이팅 피니언을 개발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닌 태그호이어 조차 칼리버 호이어 01에서 칼리버 호이어 02로 넘어가면서 오실레이팅 피니언에서 수직 클러치로 선회했습니다. 그렇게 어중간한 존재감을 발산하던 오실레이팅 피니언은 어찌된 일인지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전 리차드밀(Richard Mille)은 RM 72-01 라이프스타일 인하우스 크로노그래프(RM 72-01 Lifestyle In-House Chronograph)라는 신작을 발표했습니다. 인하우스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시계는 브랜드 최초의 인하우스 칼리버 CRMC-1을 탑재했습니다. 지난 20여년 간 오데마 피게 르노 파피(APRP)와 같은 컴플리케이션 스페셜리스트의 도움을 받았던 리차드밀은 이를 계기로 자력 갱생의 의지를 불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캐링 암이나 수직 클러치가 아닌 오실레이팅 피니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리차드밀이 하이엔드와 스포츠 워치를 양수겸장하는 브랜드라는 것을 미루어봤을 때 캐링 암이나 수직 클러치가 적합해 보이는데 도리어 오실레이팅 피니언을 사용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는 캐링 암이든 수직 클러치든 오실레이팅 피니언이든 상관 없이 하나의 클러치를 가집니다. 하지만 칼리버 CRMC-1에는 클러치가 하나 더 있습니다. 즉, 오실레이팅 피니언이 두 개라는 뜻입니다. 하나의 오실레이팅 피니언은 기어트레인에서 크로노그래프 초침으로 동력을 전달하고, 두 번째 오실레이팅 피니언은 동력을 배럴로부터 직접 받아 크로노그래프 분침으로 전달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의 오실레이팅 피니언을 사용하는 것보다 손실되는 에너지를 줄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시계의 정확성도 높아집니다.
클러치를 중복으로 설치하려면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캐링 암이나 수직 클러치를 연달아 설치하는 것은 구조나 공간에 제약이 많았을 겁니다. 리차드밀이 오실레이팅 피니언을 사용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상대적으로 오실레이팅 피니언은 다른 두 방식보다 구조가 단순하고 공간을 덜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크로노그래프의 아름다움은 유지하면서 수직 클러치보다 얇게 제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체형 설계와 오실레이팅 피니언의 이점을 살린 칼리버 CRMC-1의 두께는 6.05mm, 시계의 두께는 11.68mm입니다. 동사의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모델 대부분이 두께가 16mm대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얇아진 겁니다. 과연 라이프스타일 인하우스 크로노그래프답습니다.
- (위) 모노푸셔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 온리 워치와 (아래)라인스포트 크로노그래프 모노푸셔 라트라팡테
리차드밀보다 조금 앞서 오실레이팅 피니언에 주목한 브랜드가 있습니다. F.P 주른(F.P. Journe)입니다. 2018년에 출시한 라인스포트 컬렉션의 크로노그래프 모노푸셔 라트라팡테(Chronographe Monopoussoir Rattrapante)에서 오실레이팅 피니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모델의 모태는 2017년 온리 워치(Only Watch) 경매를 겨냥해 단 하나만 제작한 모노푸셔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입니다. F.P. 주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컴플리케이션과 화려한 피니싱으로 주목을 받은 이 제품은 115만 스위스프랑이라는 거액에 낙찰됐습니다. 이듬해 이 시계는 기능과 디자인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채 스포티한 성능을 가미한 라인스포트 크로노그래프 모노푸셔 라트라팡테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 (위)칼리버 1517과 (아래)칼리버 1518
두 제품의 무브먼트는 대동소이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온리 워치에 들어간 칼리버 1517에는 전통적인 캐링 암 방식을 적용했다면 라인스포트 크로노그래프 모노푸셔 라트라팡테의 칼리버 1518에는 락킹 피니언(rocking pinion)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클러치를 시도했습니다. 락킹 피니언. 단어는 생소하지만 다른 층에 위치한 기어트레인의 4번 휠과 크로노그래프 휠을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오실레이팅 피니언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F.P 주른에 의하면 락킹 피니언은 캐링 암의 고질병인 크로노그래프 초침이 튀는 현상을 방지한다고 합니다. 무브먼트의 아름다움은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크로노그래프 작동 시 발생하는 문제점을 제거한 겁니다.
태그호이어가 오실레이팅 피니언을 개발한 게 1887년입니다. 그 뒤로 밸주 7750에 사용되며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의 대중화에 기여한 오실레이팅 피니언은 이제 몇몇 고급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고 있습니다. 가장 저렴하고 흔한 (기계식)크로노그래프와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고가의 크로노그래프가 동일한 해법을 제시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하는 구석이 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