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시계 브랜드라 하면 우리는 군용 파일럿 워치로 매니아층을 형성한 뽈리옷(Poljot)이나 군용 다이버 워치로 유명한 보스톡(Vostok), '조커' 시리즈로 이름을 알린 독립 시계제작자 콘스탄틴 샤이킨(Konstantin Chaykin) 정도만 떠올리게 됩니다.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라케타(Raketa, 러시아 표기는 Paкéтa)라는 시계 브랜드도 러시아 현지에서는 제법 인지도가 있는데요. 이번 뉴스를 통해 간략하게나마 라케타에 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 표트르 1세
라케타의 기원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4대 황제인 표트르 1세(Peter the Great)가 1721년 설립한 임페리얼 페테르고프 팩토리(Imperial Peterhof Factory)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후 20세기 들어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의 도시인 페트로드보레츠에 위치한 시계 회사라는 뜻에서 페트로드보레츠 워치 팩토리(Petrodvorets Watch Factory)로도 널리 불렸는데요. 차르 시절에는 아름답고 진귀한 테이블 클락 내지 포켓 워치를 만들던 왕실 직속 회사였지만, 볼셰비키 혁명 이후로는 국유화해 붉은 군단(Red Army)을 위한 밀리터리 손목시계를 납품하는 회사로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미 매뉴팩처링 수준은 스위스 제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높은 편이어서 무브먼트 및 시계를 구성하는 모든 부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의 지리적인 요건 또한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 유리 가가린
페트로드보레츠 워치 팩토리는 제2차 세계대전 즈음부터 서브 브랜드를 운용하기 시작했는데, 이오시프 스탈린이 직접 개입해 이름까지 지어준 파베다(Pobeda, 러시아 표기는 Победа)라는 브랜드가 대표적입니다. 파베다는 러시아어로 승리, 위업을 뜻하는 단어로 당시의 정세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 라케타 매뉴팩처 시설 및 어셈블리 워크샵 내부
이후 1961년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Vostok) 1호의 우주 비행 성공을 기념해 페트로드보레츠 워치 팩토리는 '우주 로켓(Space rocket)'을 뜻하는 러시아 단어에서 착안해 새로운 서브 브랜드인 라케타를 런칭하게 됩니다. 라케타는 또한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에 헌정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지요. 소비에트연방(구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라케타는 1960~70년대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심지어 母회사를 추월할 만큼 소비에트연방 내에서는 대중적으로도 널리 이름이 알려지게 되지요. 하지만 1980~90년대 들어서 쿼츠 시계의 유행과 구 소련의 급변하는 정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공장은 완전히 문을 닫게 됩니다. 그리고 21세기 중엽에 들어서야 어떠한 배경에서인지 다시 새롭게 부활해 과거 생산된 자사 무브먼트를 복각해 탑재한 일련의 컬렉션을 구축하며 다시금 대량생산이 가능한 매뉴팩처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 바이코누르 워치
라케타의 모던 컬렉션 중에서 가장 최신의 주력 라인업은 바이코누르(Baikonur)로, 러시아의 중요한 로켓 발사 기지(1961년 유리 가가린이 탑승한 보스토크 1호를 쏘아 올린 장소)에서 이름을 땄습니다. 바이코누르 워치 시리즈는 24시 다이얼이 특징적인데요. 1970년대 소비에트 극지 탐험가들에게 제공한 자사의 역사적인 손목시계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었습니다(참고로 24시 다이얼 시계는 낮/밤 시간대를 파악하기 힘든 극지방의 특성을 고려해 제작되었다). 바이코누르 워치는 또한 아직까지 생존하는 러시아의 우주비행사 세르게이 크리칼레프(Sergei Krikalev)와의 협업으로 탄생했다고 브랜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트랩 종류로 분류한 레퍼런스 넘버 0245(실리콘 스트랩), 0246(가죽 스트랩), 0247(스틸 브레이슬릿) 총 3가지 버전은 공통적으로, 직경 43mm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의 배럴형 케이스에 양방향 회전하는 티타늄 소재의 베젤을 갖추고 있습니다. 스크류-다운 크라운과 케이스백을 적용해 200m 방수 사양을 보장하고, 매트한 블랙 다이얼에는 쓰리 핸즈로 시분초를 표시합니다.
오리지널 24시 다이얼 시계들처럼 타사와는 조금 차별화된 아라비아 숫자 표기를 더하고, 베젤의 알루미늄 인서트에는 방위기점을 확인할 수 있는 스케일이 추가됐습니다. 또한 화이트 아라비아 숫자/바 인덱스 및 핸즈 중앙에는 수퍼루미노바를 코팅해 어두운 곳에서도 충분한 가독성을 보장하고요. 전면 글라스 소재는 사파이어 크리스탈, 시스루 형태의 케이스백에는 미네랄 크리스탈을 각각 차등 적용했습니다.
- 칼리버 2624A
무브먼트는 24시 단위로 시를 표시하는 인하우스 자동 칼리버 2624A를 탑재했습니다(진동수 2.5헤르츠, 파워리저브 약 40시간). 소비에트연방 시절 제작된 옛 NOS 무브먼트의 설계를 기반으로 수정한 형태로 내구성에 중점을 둔 당시의 무브먼트들이 그렇듯이 구조는 단순하고 스위스 제조사들 특유의 근사한 코스매틱도 생략돼 있습니다. 그럼에도 '날 것' 그대로의 무브먼트를 노출하기 보다는 브릿지 및 로터 상단에 컬러 래커 스탬핑으로 별자리와 우주비행사의 모습을 추가하는 등 나름대로 멋을 부렸습니다.
바이코누르 워치 시리즈의 리테일가는 0245(실리콘 스트랩)와 0246(가죽 스트랩) 버전이 1천 200 유로, 0247(스틸 브레이슬릿) 버전이 1천 350 유로(EUR)로 각각 책정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