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랑팡 르 상티에 매뉴팩처(좌)와 르 브라쉬스 매뉴팩처(우) 전경 ⓒ Blancpain
스위스 파인 워치메이킹의 요람으로 불리는 발레드주(Vallée de Joux, 주 계곡)가 품은 두 이웃 마을 르 브라쉬스(Le Brassus)와 르 상티에(Le Sentier)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의 워치메이커들의 매뉴팩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터줏대감격인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와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를 비롯해,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과 불가리(Bulgari)의 하이엔드 워치 워크샵도 위치하고 있으며, 최근 주목받고 있는 로맹 고티에(Romain Gauthier)와 다비드 칸도(David Candaux) 같은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젊은 인디펜던트 워치메이커들의 작업실도 있습니다.
그리고 르 브라쉬스와 르 상티에 양쪽 모두에 매뉴팩처를 운영하고 있는 블랑팡(Blancpain)을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난 세기 이 지역의 하이엔드 무브먼트 제조사로 명성이 높은 프레드릭 피게(Frédéric Piguet)를 인수함으로써 스와치 그룹의 유산으로 편입된 이 역사적인 공간에서 블랑팡은 지난 십수 년간 수많은 주목할 만한 시계들을 배출했고, 그중에는 오직 블랑팡이기에 가능한 전통적이면서도 유니크하고, 고도로 복잡하면서도 예술적인 시계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 유니크 피스 Ref. 00232-3631-55B
이번 타임포럼 공식 리뷰에서는 국내 매체를 통해선 그동안 한번도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는(어쩌면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은) 블랑팡의 숨겨진 마스터피스 한 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Le Brassus Carrousel Minute Repeater)가 바로 그 주인공으로, 단 한 피스만 제작된 유니크 피스(Unique Piece)입니다.
블랑팡의 다른 아티스틱한 시계들과 마찬가지로 유니크 피스임에도 브랜드 카달로그에 등장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블랑팡에서 이러한 특별한 시계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자, 다른 하나는 이러한 모델을 기반으로 고객이 원하는 새로운 디자인의 시계를 언제든지 커스텀 주문 제작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특히 무브먼트나 다이얼 면에 스페셜한 인그레이빙 혹은 장식이 추가되는 유니크 피스들은 기능이나 외적인 사양은 이전 모델과 흡사해 보여도 똑같은 모델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레퍼런스만 공유함). 하이엔드 세계에서 최고의 가치는 아무나 쉽게 소유할 수 없는 엄청난 희소성에 있습니다. 블랑팡은 하이 컴플리케이션부터 타임온리 형태의 메티에다르풍 아트 피스에 이르기까지 몇 종의 흥미로운 선택지를 구체적인 모델과 함께 제시하면서 자신만을 위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시계 제작이 가능함을 어필한다는 점에서 다른 경쟁 하이엔드 시계제조사들과도 차별화된 행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블랑팡의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 레드 골드 버전 유니크 피스(Ref. 00232-3631-55B)에는 블랑팡이 자랑하는 총 3종류의 컴플리케이션 메커니즘이 녹아있습니다. 하나는 투르비용과 비슷한 이점을 갖지만 구조적인 차이를 보이는 블랑팡 고유의 카루셀(Carrousel)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차임으로 알려주는 전통적인 미닛 리피터(Minute repeater, 프랑스어 표기는 Répétition Minutes), 그리고 마지막은 작은 무빙 피규어가 스트라이킹 메커니즘 활성시 함께 작동하며 움직이는 오토마타(Automata, 기계식 자동인형을 뜻하는 오토마통의 복수형)가 그것입니다. 보통 타 제조사에서는 이 정도의 기능 조합을(보통 3가지 이상의 메인 컴플리케이션의 조합을) 가리켜 그랑 컴플리케이션이라 칭하는데, 블랑팡은 굳이 이러한 수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 블랑팡 르 브라쉬스 매뉴팩처 하이 컴플리케이션 아뜰리에 모습
블랑팡의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 시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시계 제조 역사를 잠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모던 다이버 워치의 효시로 통하는 피프티 패덤즈(Fifty Fathoms)의 산파이자 1950~60년대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끈 장-자크 피히터(Jean-Jacques Fiechter)가 회사를 떠난 후 쿼츠 위기 시절 위태롭게 표류하던 블랑팡은 1971년 SSIH(스와치 그룹의 전신)의 일원이 되었고, 1983년에는 라빌-블랑팡(Rayville-Blancpain)이라는 이름과 상표권을 당시 피게를 이끌던 프레드릭 피게의 아들 자크 피게(Jacques Piguet)에게 팔게 됩니다. 그리고 자크 피게는 SSIH 출신의 장-클로드 비버(Jean-Claude Biver)를 경영진으로 영입하고 르 브라쉬스 지역에 새로운 워크샵을 오픈하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걸쳐 브랜드 역사의 전환점이 될 중요한 시계들을 다수 선보이게 됩니다. 케이스 두께가 5.5mm 정도에 불과한 울트라-슬림 모델을 필두로, 문페이즈를 포함한 풀 캘린더, 퍼페추얼 캘린더, 당시 세계서 가장 얇은 두께의 스플릿-세컨즈 크로노그래프, 세계 최초의 플라잉 투르비용 모델 등 컴플리케이션의 성찬을 이어가던 블랑팡은 1987년 마침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작고 얇은 두께의 기계식 자동 미닛 리피터 무브먼트(칼리버 35)와 이를 탑재한 시계(빌레레 미닛 리피터)를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지금이야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없고, 설혹 어두운 환경이라도 루미너스, 즉 야광도료를 덧칠한 핸즈나 인덱스를 가진 시계는 조금만 축광을 하면 시간을 확인하는데 지장이 없지만, 전기도 루미너스도 발명되지 않았던 17~18세기 유럽에서는 시간을 소리로 알려주는 미닛 리피터 포켓 워치가 귀족층, 부유층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차임을 내는 기계식 스트라이킹 메커니즘 자체가 매우 정교하고 상당한 기술력과 제조 노하우를 요구하기 때문에 일부 고급 시계제조사들만이 이를 실현할 수 있었고, 1740년대부터 발레드주 지역에 정착한 몇몇 워치메이커들과 그 후손들은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통했습니다. 현대에는 미닛 리피터 시계의 효용성 자체가 무의미해졌음에도 여전히 여러 고급 시계제조사에서 미닛 리피터를 선보이는 이유는 미닛 리피터가 스위스 파인 워치메이킹의 영혼을 담은 정수이자, 특히 발레드주 지역의 매우 상징적인 컴플리케이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면 블랑팡이 1987년 브랜드 첫 미닛 리피터 손목시계를 출시한 이유도 어렵지 않게 어림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의 본향인 빌레레를 떠나 르 상티에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블랑팡이 그저 기록상에 남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브랜드라는 화석화된 영광에만 머무르지 않고 발레드주의 파인 워치메이킹 전통을 잇는 실력있는 제조사임을 제대로 다시 증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닛 리피터 시계를 선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직경 23.9mm, 두께 4.85mm의 매우 아담한 사이즈의 자동 무브먼트 안에 총 360개의 부품과 39개의 주얼, 그리고 각기 다른 3가지 노트의 소리를 내는 2개의 커씨드럴 공과 해머로 미닛 리피터 기능을 구현한 칼리버 35는 기계식 시계가 본격적으로 부활하기 시작한 시점보다 훨씬 이전인 1980년대 중반에 이미 완성된 것이기에 더욱 그 가치를 더합니다.
- 첫 미닛 리피터 오토마타 칼리버 332를 탑재한 현행 빌레레 미닛 리피터 유니크 피스 Ref. 6635-3642-55B
그리고 1992년 SMH 그룹(스와치 그룹의 전신)에 합류하게 된 블랑팡은 이듬해인 1993년 빌레레 라인에 기존의 수동 미닛 리피터 베이스(칼리버 33)에 처음으로 오토마타 기능을 추가한 332 칼리버와 이를 탑재한 시계를 선보이게 됩니다. 당시 세계 최초의 미닛 리피터 오토마타 손목시계로 기록되었으며, 무엇보다 쇼킹(?!)했던 점은 클래식한 다이얼면과 대조적으로 케이스백에 노출한 에로틱한 피규어들의 기묘한 포즈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류의 기계식 손목시계가 흔치 않았던 시절인데다(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지만) 그 테마 역시 노골적으로 섹슈얼한 것이었기에 당시의 시계애호가들에게는 매우 신선하게 와닿았을 터입니다(단, 몇몇 고객들의 요청으로 19금이 아닌 노멀한? 버전도 함께 선보였음).
- 오토마타 기능을 갖춘 빌레레 미닛 리피터 중 좀 더 노골적인 버전의 유니크 피스
이렇듯 블랑팡 컬렉션에서 미닛 리피터와 오토마타의 결합이 먼저 선행되었고, 21세기 들어서는 손목시계로는 처음으로 응용된 카루셀 메커니즘이 일련의 모델을 거쳐 미닛 리피터 & 오토마타와의 결합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 브랜드 최초의 원 미닛 플라잉 카루셀 자동 칼리버 225를 탑재한 2008년 출시 플래티넘 한정판 모델 Ref. 00225-3434-53B
불어로 '회전목마'를 뜻하는 카루셀은 원래 덴마크 태생의 영국 워치메이커 반 보닉센(Bahne Bonniksen, 1859~1935)이 브레게의 투르비용 원리를 응용 발전시켜 1892년 특허를 획득한 중력 상쇄 레귤레이팅 메커니즘입니다. 하지만 보닉센 사후 완전히 잊혀진 카루셀을 블랑팡이 새삼 주목하게 되었고, 저명한 독립 시계제작자인 뱅상 칼라브레제(Vincent Calabrese)와의 협업을 통해 마침내 2008년 5일간(120시간)의 파워리저브를 자랑하는 원 미닛 플라잉 카루셀 자동 무브먼트(칼리버 225)와 시계가 완성되기에 이릅니다. 이후 5일 파워리저브의 원 미닛 플라잉 카루셀 무브먼트는 문페이즈, 캘린더 기능의 추가와 함께 몇 종의 베리에이션으로 이어져 상용화되었고, 급기야 2013년에는 투르비용과 카루셀을 하나의 무브먼트 안에 융화한 르 브라쉬스 투르비용 카루셀을, 2015년에는 스포티-아방가르드 버전인 엘-에볼루션 투르비용 카루셀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 블랑팡 카루셀 미닛 리피터 칼리버 233의 작동 원리를 3D 영상으로 소개한 공식 필름
한편 2011년 첫 카루셀 미닛 리피터 수동 무브먼트(칼리버 233)가 개발되었고, 이내 스켈레톤 가공한 독특한 인상의 자동 베리에이션(칼리버 235)이 이어졌고, 2013년에는 플라이백을 지원하는 크로노그래프 모듈까지 추가한(칼리버 2358)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그랑 컴플리케이션 사양의 모델을 플래그십인 르 브라쉬스 라인업에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추가된 것이 바로 이번 리뷰의 주인공인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입니다. 이름은 기존의 233(수동) or 235(자동) 칼리버를 사용한 빌레레 버전의 카루셀 미닛 리피터와 동일하지만 기존 모델과 달리 오토마타 메커니즘이 추가되어 리피터가 작동할 때마다 케이스백을 통해 피규어의 에로틱한 움직임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 첫 카루셀 미닛 리피터 수동 칼리버 233을 탑재한(오토마타 기능 X)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 젬 세팅 버전 Ref. 0233-6232A-55B
서론이 조금 길었습니다.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가 블랑팡 컬렉션에 갑자기 등장한 시계가 아니라 지난 30여 년간의 지속적인 성장 배경 속에서 하나씩 특징적인 기능과 요소들이 조합되면서 형성된 모델이기에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 유니크 피스(Ref. 00232-3631-55B)는 45mm 직경의 폴리시드 가공한 레드 골드 케이스로 선보입니다. 빌레레 컬렉션에서 시작된 블랑팡 특유의 더블 스텝 베젤이 특징적인 케이스에 순백의 다이얼은 일반 래커 마감한 것이 아닌 800도 이상 고온의 가마에서 구워 완성한 그랑 푸 에나멜(Grand feu enamel)을 사용하여 한층 특별함을 더했습니다. 다이얼 하단면에는 블랑팡의 창립자 예한 자크 블랑팡(Jehan-Jacques Blancpain)의 이니셜을 형상화한 JB 로고가 얕게 스템핑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고 루페를 이용해야 잘 보이는데, 블랑팡은 자사의 그랑 푸 에나멜 다이얼 모델에만 이렇게 미묘한 스페셜 스템핑을 추가해 여느 레귤러 버전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블랑팡의 위트가 돋보이는 숨은 디테일이라고나 할까요?! 한편 다이얼에 사용된 로만 인덱스와 리프 모양의 핸즈는 도금된 것이 아닌 케이스와 동일한 18K 레드 골드 소재입니다.
옛 고급 포켓 워치 페이스를 연상시키는 고풍스럽고 정갈한 다이얼은 6시 방향을 원형으로 오픈 워크 가공해 블랑팡 고유의 카루셀 케이지를 노출합니다. 그리고 다이얼 쪽에는 눈금을 표시해 케이지의 움직임과 함께 초의 흐름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과거 리뷰를 통해서도 투르비용과 카루셀의 차이점을 소개한 바 있지만 다시 한번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블랑팡 카루셀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자료 이미지 ⓒ Blancpain
투르비용은 동력이 단방향의 싱글 기어 트레인을 따라 이스케이프먼트와 케이지(밸런스)에까지 이어진다면, 카루셀은 3번째 휠에서 보완적인 기어 트레인이 추가됩니다. 이로써 하나의 기어 트레인은 이스케이프먼트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인터미디어트(Intermediate wheel)을 통해 케이지 휠의 회전(분당 1회전)을 관장하게 됩니다. 인터미디어트 휠로 분할된 양방향의 기어 트레인이 하나는 이스케이프먼트를, 다른 하나는 케이지의 회전 속도를 직접 제어하기 때문에 카루셀은 이론적으로는 더욱 효과적인 파워 트랜스미션(동력 전달) 체계를 갖게 되고, 진폭의 불규칙성도 개선되어 등시성 유지 면에서 장점이 있다는게 블랑팡 측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투르비용에 비해 기어 트레인이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고(몇몇 특수한 부품도 추가되고), 플라잉 케이지 휠 안에 밸런스 세트를 조립 및 조정하기가 더욱 까다롭기 때문에 블랑팡의 르 브라쉬스 컴플리케이션 워크샵 내 경력 많은 워치메이커들 중에서도 숙련된 극소수만이 이를 다룰 수가 있습니다.
- 블랑팡 인하우스 칼리버 232
시계 안에 탑재된 인하우스 수동 232 칼리버는 첫 카루셀 미닛리피터 칼리버인 233을 바탕으로 오토마타 메커니즘을 추가한 것입니다. 무빙 피규어를 작동하는데만도 상당한 토크가 손실되는데다 이를 리피터 기어 트레인과 맞물리면서도 서로의 기능을 방해하지 않도록 설계해야하기 때문에 리피터와 오토마타의 조합은 상당한 기술적인 노하우가 요구됩니다. 리피터와 오토마타의 결합이 여느 하이 컴플리케이션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주류이기도 하지만, 스위스 파인 워치메이킹 업계에서도 이러한 종류의 시계를 선보일 수 있는 제조사(블랑팡, 율리스 나르당, 자케 드로 등)가 극소수인데는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 다른 버전의 케이스백. 각각이 유니크 피스이기 때문에 기본 모델을 바탕으로 변화를 줄 수 있다.
칼리버 232는 또한 앞서 기술했듯, 1993년 선보인 브랜드 첫(동시에 세계 최초의) 미닛 리피터 오토마타 무브먼트인 칼리버 332를 계승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더불어 1990년대 블랑팡을 단숨에 컬트적인 존재로 부상시킨 에로틱 피규어도 동시에 컴백한 것입니다. 직경 32.8mm, 두께 10mm 크기의 무브먼트 안에는 총 417개의 부품과 47개의 주얼, 브레게 오버코일 타입의 헤어스프링과 골드 스크류를 더한 글루시듀르 프리 스프렁 밸런스가 사용되었으며, 비록 무브먼트를 감상할 수는 없지만 전체 로즈 골드 플레이트 마감한 무브먼트의 각 브릿지 상단에는 아름다운 빗살무늬 장식을 더해 하이엔드 무브먼트의 격을 품고 있습니다. 기존의 233 베이스에 오토마타 컴플리케이션을 위한 독자적인 모듈이 추가되었는데 그 두께 차이가 2.6mm 정도에 불과한 것도 기술력을 보여주는 숨은 요소입니다. 카루셀, 미닛 리피터, 오토마타의 조합 특성상 필연적으로 무브먼트 및 케이스 두께도 볼륨감이 더해질 수 밖에 없음에도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 유니크 피스의 케이스 두께는 돔형의 사파이어 크리스탈과 케이스백 쪽의 무빙 피규어 세트를 포함하고도 16.55mm 정도로 생각보다 그렇게 볼드하지 않습니다.
싱글 배럴임에도 65시간의 제법 긴 파워리저브를 보장하며(리피터를 작동하지 않은 평상시 기준), 강화 스틸로 제작된 두 개의 커씨드럴 공과 해머는 케이스 좌측면 슬라이딩 레버 조작과 함께 스트라이킹 메커니즘 활성시 3개의 각기 다른 노트로 시간을 알려줍니다. 첫 로우 노트로는 시를, 다음 이어지는 띵-동-띵-동 울리는 하이 노트로는 쿼터(15분 단위)를, 그리고 마지막 싱글 하이 노트로는 나머지 분을 타종합니다. 전통적인 미닛 리피터 설계 그대로에 충실한 무브먼트이며, 카루셀 케이지 기어 트레인과 겹치지 않게 배럴 맞은편 쪽에 리피터 부품을 배치한 것도 안정적인 설계가 돋보입니다.
드디어 이 시계의 숨은 ‘섹시함’이 빛을 발하는 케이스백을 보시겠습니다. 한 쌍의 연인을 형상화한, 그런데 헤어와 복식을 고려할 때 현대의 남녀는 아니고 마치 중세 영국 귀족과 부인(혹은 정부?)을 보는 듯한 피규어가 함께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이 시계는 예전 19금 버전처럼 노골적으로 성기를 형상화하거나 성교 장면을 연출하진 않았습니다. 에로틱 오토마타 시리즈치고는 상대적으로 점잖은 축에 속하며, 보다 노골적인 춘화 혹은 키치적인 이미지를 찾는 분이라면 스벤 앤더슨(Sven Andersen)의 시계가 다운 그레이드 버전의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쌍의 무빙 피규어를 포함한 오토마타 세트는 제법 입체적으로 깊이가 있게 제작되었으며, 각각의 요소들이 매우 세심하게 핸드 인그레이빙 마감된 것을 사파이어 크리스탈 케이스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지난해 바젤월드 개최 당시 블랑팡 부스 안에서는 르 브라쉬스 워크샵에서 근무하는 인그레이빙 장인 한 명이 거의 매일 상주하며 블랑팡의 아티스틱한 유니크 피스의 다이얼과 무브먼트 등에 핸드 인그레이빙 시연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당시 관람객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된 모습 중 하나가 바로 해당 스페셜리스트가 카루셀 미닛 리피터 오토마타 시계에 사용되는 에로틱 피규어를 핸드 인그레이빙해 다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를 또 실제 작동하는 무브먼트 위에 고정시켜 에로틱한 움직임까지 보여줬는데(이를 확대 현미경을 통해 전시장 입구 대형 LCD 디스플레이를 통해 전시함), 블랑팡을 점잖은 드레스워치 제조사로만 알고있던 이들에겐 새삼 신선한 충격으로 와닿을 터입니다.
한쌍의 무빙 피규어와 뒷배경의 의자, 악보는 골드 바탕에 인그레이빙을, 나머지 배경이 되는 벽화(?) 같은 화면과 큐피드의 모습, 울퉁불퉁한 바닥(침대?), 그리고 그들이 연주하는 첼로는 은색 메탈(소재를 따로 밝히지 않았지만 솔리드 실버로 추정됨) 바탕에 핸드 인그레이빙 마감했습니다. 남성은 옷을 입고 있고, 여성만 전라인 것도 이 에로틱한 장면에 모티프가 되었을 옛 중세시대 춘화의 공식 하나를 그대로 답습하는 느낌입니다. 잘 보이진 않지만 남성의 아랫도리는 벗었을 수도 있는데 이 부분은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슬라이딩 레버를 끌어올려 리피터를 작동시키면 남성의 왼쪽팔과 여성의 왼쪽팔, 그리고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첼로 활이 함께 움직이며 첼로를 연주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됩니다. 그래서 마치 이 첼로 소리가 리피터 타종인양 시청각적인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이러한 류 시계의 또 다른 매력이라 할 수 있지요. 더불어 여성의 두 다리도 살짝 벌어지듯 움직이는데 이 또한 보는 이에 따라서는 제법 관능적으로 느껴질 터입니다.
블랑팡은 이렇듯 하나의 시계 안에 스위스 파인 워치메이킹 전통을 바탕으로 브랜드의 본향인 발레드주의 상징적인 컴플리케이션(미닛 리피터)과 브랜드의 현대적인 진화를 보여주는 독자적인 컴플리케이션(카루셀), 그리고 17세기 말엽부터 이어진 유니크하면서도 섹슈얼한 판타지를 자극하는 에로틱 컴플리케이션(오토마타)를 한데 응축해 오직 블랑팡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개성적인 그랑 컴플리케이션 워치를 완성했습니다.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는 하나의 정제된 예시(모델)를 바탕으로 주문자의 취향과 개성을 발현하여 세상에 오직 하나 뿐인 온리 워치(유니크 피스)로 거듭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특별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화로 기본 5억 원대부터 시작하는 이러한 시계를 두고 혹자는 일부 특이한 취향을 지닌 부자 컬렉터만의 전유물로 여길지 모르지만, 이 특별한 시계의 숨은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분이라면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야말로 범상치 않은 내공과 테이스트를 지닌 진정한 하이엔드 시계애호가를 위해 탄생한 시계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의 드라마틱한 작동 모습을 타임포럼이 직접 촬영, 편집한 영상으로 확인해보세요.
"이 특별한 시계의 숨은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분이라면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닛 리피터야말로 범상치 않은 내공과 테이스트를 지닌 진정한 하이엔드 시계애호가를 위해 탄생한 시계임을 알 수가 있다" 라는 이 마지막 문장이 이 시계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정말 예술작품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