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워치메이킹은 최초 설계부터 제조, 조립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공정이 세밀하게 분업화, 자동화되었지만, 19세기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시계 제작의 전 과정을 단 몇 명의 워치메이커들이 소화하곤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정밀한 계측기나 컴퓨터와 같은 장비들도 없었기에 워치메이커들은 수십 년간 갈고 닦은 소위 ‘감’을 바탕으로 전통 방식 그대로를 따라야 했는데요. 시계를 구성하는 수십, 수백여 개에 달하는 부품들을 일일이 손수 절삭하고 다듬는 것은 물론, 루페를 통해 들여봐야만 정확한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마이크로 부품들조차 수공으로 가공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에도 수세기 넘도록 이어진 스위스(유럽) 전통 수공 방식을 여전히 고수하는, 우리식 표현으로 흡사 인간문화재에 준하는 워치메이커들이 존재합니다. 워치메이커 위의 워치메이커로 불리며 생존하는 가장 존경받는 워치메이커로 통하는 필립 듀포(Philippe Dufour)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 필립 듀포 ⓒ David Carteron 2013
필립 듀포는 1948년 스위스 파인 워치메이킹의 성지로 통하는 발레드주 자락의 르상티에(Le Sentier)에서 태어났습니다. 3대에 걸친 워치메이커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시계제작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우등생인 형과 달리 학업에도 큰 흥미를 못 느꼈던 듀포는 15살의 나이에 다니던 공립학교를 중퇴하고 발레드주 시계학교(Ecole d’Horlogerie de la Vallée de Joux)에 입학하게 됩니다.
훗날 당시를 회상한 한 인터뷰에서 듀포는 “나는 애초 워치메이커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 길은 운명처럼 다가왔고, 무형의 소재를 가공해 새 생명을 불어넣는 워치메이킹의 전 과정에 매료됐다. 시계학교에서 처음 기어를 어셈블리하고 시계가 작동했을 때의 그 쾌감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마치 사탕가게에 들어간 어린아이처럼 시계학교의 생활은 매일매일 즐거움과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라고 언급할 만큼 그에게 워치메이커의 길은 말 그대로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 2013년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할 당시의 필립 듀포.
발레드주 시계학교를 졸업한 뒤 듀포는 19살이 된 1967년 르상티에 지역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매뉴팩처 브랜드인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에 입사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 마스터 워치메이커인 가브리엘 로카텔리(Gabriel Locatelli)를 사사(師事)했고, 그 후 독일에서 1년, 영국에서 2년 각각 체류하며 예거 르쿨트르의 시계를 수리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비엘/비엔에 본사를 둔 제너럴 워치 컴퍼니(General Watch Co., GWC)에 입사해 카리브 제도 지사에 파견되기도 했습니다(그의 커리어에서 다소 특이한 경험이기도). 그리고 1974년 다시 스위스로 돌아온 듀포는 하이엔드 시계제조사인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와 유명 시계 디자이너인 제랄드 젠타(Gérald Genta)와도 작업함으로써 시계업계에 점차 그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하지만 1970년대는 세이코(Seiko) 등 일본 브랜드로부터 촉발된 쿼츠 위기의 여파로 스위스 시계산업 전반이 극심한 불황에 빠진 시기였습니다. 듀포는 이러한 시대적 불운 속에서 자신이 오랜 시간 정성스럽게 제작한 시계들이 제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고, 서른을 맞은 1978년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르상티에 인근의 작은 마을 르솔리아(Le Solliat)에 작은 시계공방을 인수해 독립 시계제작자로서의 외로운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 1992년 제작된 그랑 & 쁘띠 소네리 손목시계 핑크 골드 버전 No. 3 ⓒ Sotheby’s
2012년 4월 4일 소더비 경매에서 당시 경매 최고가인 482만 달러(HKD, 한화로 약 7억 원대)에 낙찰되어 화제를 모았습니다.
독립 시계제작자로 첫 발을 내딘 필립 듀포의 첫 고객은 유명 워치 컬렉터이자 사업가로 1974년 제네바에 경매 전문 업체인 앤티쿼룸(Antiquorum)을 설립한 오스발도 파트리찌(Osvaldo Patrizzi)로서, 당시 그가 디렉터로도 참여한 라쇼드퐁의 고대시계박물관(Galerie d'Horlogerie Ancienne)의 일을 도와 오래된 앤틱 클락과 포켓워치를 수리, 복원하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후 4년여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어 마침내 1982년 그가 제작한 가장 복잡한 시계에 해당하는 첫 그랑 소네리 포켓워치를 발표, 이중 5피스를 미리 오데마 피게가 주문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이후 1992년 듀포는 손목시계 버전의 그랑 & 쁘띠 소네리 미닛 리피터 모델을 완성, 그해 바젤 페어에 출품해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No.1, No.2 이렇듯 무브먼트에 고유 넘버가 매겨진 이 특별한 시계는 하나의 시계를 완성하는데만도 꼬박 1년 가량이 소요되었고 그마저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제작되어 총 5피스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1990년대 중반 제작된 그랑 & 쁘띠 소네리 손목시계 화이트 골드 버전 No. 5
듀포가 당시 이렇듯 복잡한 시계 제작에 도전한 이유는 어쩌면 하나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진 기계식 시계의 숨은 가치와 아름다움, 스위스 전통 파인 워치메이킹의 한 경지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독립 시계제작자 선언을 했을 무렵 자신의 도전을 무모하다며 비웃던 사람들을 향한 듀포의 회심의 일격인 셈입니다.
- 1996년 발표한 듀얼리티
그리고 1996년, 당시 세계 최초로 두 개의 기어트레인과 이스케이프먼트로 구동하는 독창적인 시계, 듀얼리티(Duality)를 발표해 또 한 번 업계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킵니다. 서로 마주보는 더블 밸런스로 기계식 레조낭스를 구현한 듀얼리티의 메커니즘은 중력을 상쇄해 오차를 최소화하려는 투르비용의 원리를 듀포 식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기술적인 성취가 돋보였습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20여 년 가까이 고독하고 험난한 외길을 개척해온 듀포의 업적은 이즈음부터 수많은 후배 워치메이커들의 귀감이 되었고, 때마침 기계식 시계의 부활 추세와도 맞물려 시계애호가들 및 컬렉터들 사이에서는 시계 그 자체보다 더 유명한 존재로 회자되기 시작합니다.
- 심플리시티 37mm 핑크 골드 버전 (2002년 제작 모델) ⓒ Phillips
2016년 11월 29일 필립스 옥션에 최초로 출품되어 2백만 달러(HKD, 한화로 약 2억 9천만 원대)에 낙찰되었습니다.
복잡시계로 이미 한 정점을 찍은 필립 듀포는 이번에는 시계 본연의 기능과 순수함에 포커스를 맞추기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2000년 마침내 그 유명한 심플리시티(Simplicity)를 런칭하게 되지요. 우리말로 ‘단순함’이라는 뜻을 지닌 심플리시티는 그 이름처럼 심플하면서도 격조있는 시계였습니다. 그해 바젤 페어에서 처음 시계가 공개됐을 때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놀라워했습니다. 수십 년간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만져온 필립 듀포가 모처럼 발표한 신작이 기능적으로 매우 단순한 타임온리 시계라는 점과 투명 케이스백을 통해 드러나는 무브먼트 피니싱에 들인 엄청난 수고스러움 때문이었습니다.
- 사진 우측의 심플리시티 34mm 화이트 골드 버전(2004년)은
2016년 11월 29일 필립스 옥션에서 175만 달러(HKD, 한화로 약 2억 5천만 원대)에 낙찰되었습니다.
최초 100개만 제작할 계획이었던 심플리시티는 이후의 폭발적인 반응 때문에 총 200개까지 수가 늘어났는데, 처음에는 37mm 직경의 핑크 골드 케이스 & 화이트 래커 다이얼(로만 인덱스) 버전으로 선보였고, 이어 좀 더 작은 사이즈인 34mm 직경의 화이트 골드 케이스에 핸드 기요셰 다이얼 버전이 추가되었습니다(참고로 필립 듀포 본인은 34mm 화이트 골드 케이스로 제작한 첫 프로토타입 모델을 소장하고 있으며 착용한 모습이 여기저기서 제법 자주 목격됩니다!). 이후 주문자의 요청에 따라 플래티넘 케이스 버전과 다크 그레이 컬러 기요셰 다이얼 버전으로도 선보인 바 있습니다.
- 심플리시티 34mm 핑크 골드 케이스 & 그레이 컬러 기요셰 다이얼 버전
하지만 대부분의 부품을 듀포 혼자서 수공으로 제작, 가공, 마감하기 때문에 한달에 완성할 수 있는 심플리시티의 수는 고작 1~2개 정도밖에 되질 않았다고 합니다. 고로 2000년 초부터 주문을 받아 제작에 들어가기 시작한 심플리시티는 무려 12년의 세월이 흐른 2012년 말에 이르러서야 마지막 주문자의 시계가 전달되었습니다. 한때 필립 듀포의 시계는 돈이 있어도 구할 수가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듀포에 따르면 시계를 주문한 사람 중 그 어느 누구도 긴 대기 기간과 제작 기간에 불평불만을 표출한 이는 없었다고 합니다. 최고의 시계 장인을 향한 시계애호가들의 예우와 존경심은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 2015년 SIHH 당시 랑에 운트 죄네의 부스를 방문한 필립 듀포.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필립 듀포는 여전히 현역처럼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매년 SIHH나 바젤월드 현장에서도 그를 어김없이 만날 수 있으며, 그때마다 항상 주변 사람들과 새로운 시계에 관해 허물없이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에서 거장 특유의 권위적인 모습 보다는 타고난 소탈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2015년부터 그뢰벨 포지(Greubel Forsey)의 초빙으로 ‘르 가드 떵(Le Garde Temps, 보존된 시간)’ 프로젝트에 마스터 워치메이커로 참여해 후학들에게 전통 워치메이킹 기술을 전수하고, 함께 내상스 뒨느 몽트르(Naissance d'une Montre, 시계의 기원이라는 뜻)로 불리는 스페셜 시계를 제작하는 등 젊은 세대 워치메이커들과의 소통에도 항상 적극적인 모습입니다.
- 2016년 SIHH 당시 '까레 데 오롤로저' 부스에서 그뢰벨 포지와의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있는 필립 듀포.
다음 시계 프로젝트를 위해 거의 매일을 공방에서 보내는 그에게 시계는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고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손을 거쳐 간 모든 시계들이 친자식과 같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정성과 애정을 듬뿍 담아 세상에 선보인다는 뜻인데요. 필립 듀포를 두고 혹자는 ‘시간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속전속결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현대사회에서 필립 듀포는 기계식 시계의 진정한 가치와 존재의의를 헤아리는 몇 안 되는 장인이기 때문입니다. 수세기 전 방식 그대로 대부분을 수작업으로 정성스럽게 완성한 그의 대표작 심플리시티는 시계라는 카테고리를 넘어 현 세대가 다음 세대에 남겨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마스터피스 중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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