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CH 人] 시계 역사의 큰 별이 지다. 발터 랑에
올해 SIHH의 랑에운트죄네 부스. 항상 부스 앞에 올해의 하이라이트를 거대 모형으로 전시하는 랑에 운트 죄네는 올해 역시 투르보그라프 퍼페추얼 "푸르 르 메리트"(독일 워치메이커가 소개한 가장 복잡한 시계 중 하나죠)를 전면에 내세우고 역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외에도 1815 애뉴얼 캘린더, 자이트베르크 데시멀 스트라이크, 리틀 랑에 1 문페이즈, 삭소니아 등 올해 신제품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새로운 제품을 제외하고는 여느 때와 크게 분위기가 다르지 않던 부스에서 단 하나 빠진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매년 SIHH 때마다 랑에운트죄네 부스에 모습을 드러내며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 랑에운트죄네의 명예 고문이라고 할 수 있는 발터 랑에의 부재가 그것이었습니다. 한국 프레스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이 1월 17일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발터 랑에가 92세의 나이로 타계한 것 역시 바로 같은 날이었습니다.
_랑에운트죄네의 정신적 지주였던 발터 랑에
1845년 독일 드레스덴의 워치메이커 페르디난드 아돌프 랑에가 설립한 독일의 대표 하이엔드 시계 매뉴팩처 랑에운트죄네는 특히 창립 초기부터 훌륭하고 아름다운 포켓 워치로 전 세계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창립자 페르디난드 아돌프 랑에는 글라슈테 지역을 시계 중심지로 만든 인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글라슈테에 일종의 시계 기술 지원 센터를 만들어 워치메이커 양성에 힘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비극적이게도 그의 기업은 워치메이킹 역사 속에서 거의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동독의 치하에 들어간 글라슈테 지역의 많은 시계 회사들이 한데 묶여 소위 인민들이 사용하는 값싸고 튼튼한 시계를 생산하는 공장이 되어버린 것이죠. 발터 랑에는 다른 가족과 달리 서독으로 떠났고, 가족들이 이어온 워치메이킹 사업이 전쟁 때문에 무너지고 망가지는 것을 목격하며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1990년, 다시 랑에의 유산을 되살리기 위해 돌아옵니다. 그리고 부단한 노력 끝에 재건에 성공하며 전설적 인물로 남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이 같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나이가 대부분의 사람이 은퇴하고 회사를 떠나는 66세의 나이였다는 점입니다. 사실 발터 랑에가 없었다면 랑에운트죄네의 그 유명한 랑에 1, 다토그래프를 비롯해 많은 아이코닉한 시계들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그가 없었다면 독일의 글라슈테 지역이 스위스의 발레드쥬 못지 않은 워치메이킹 성지(!)가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_랑에운트죄네의 창립자 페르디난드 아돌프 랑에
_젊은 시절의 발터 랑에
1924년 글라슈테에서 출생한 발터 랑에는 기숙 학교에 다니던 순간부터 이미 워치메이커를 장래 희망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시계에 대한 강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루돌프 랑에의 아들이자 에밀 랑에의 손자, 그리고 페르디난드 A. 랑에의 증손자로서 랑에 가문의 후손인 그에게 물론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태생부터 워치메이커의 피를 타고난 그는 아버지를 따라 워크숍에 가 시계 제작 과정을 지켜보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정식으로 워치메이킹 공부를 시작하며 앞으로 다가올 순간(!)을 준비합니다.
1989년 11월 드디어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이 때 발터 랑에는 글라슈테의 가족 사업을 되살릴 기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리하여 원치 않았던 강제적인(!) 40여 년의 공백 이후 1990년 초반 발터 랑에와 그의 파트너 귄터 블륌라인(Günter Blümlein)은 매뉴팩처 재건 작업을 시작합니다. 발터 랑에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당시에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시계도, 직원도, 건물도, 기계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은 글라슈테에서 다시 한번 세계 최고의 시계를 만들어보자는 비전 뿐이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랑에의 '새로운' 시대에 처음으로 출원한 특허가 바로 1992년 커다란 날짜 창이었습니다. 랑에운트죄네는 이 커다란 날짜 창을 많은 시계에 적용했는데, 이는 이후 브랜드의 시그너처이자 상징으로 자리잡습니다. 증조 할아버지인 페르디난드 A. 랑에 시대 이후 약 150년이 흐른 후 증손자 발터 랑에는 과감한 도전을 감행합니다. 1994년 10월 새로운 랑에 매뉴팩처에서 생산한 첫 컬렉션이자 4개의 프로토타입 시계를 대중에 공개한 것입니다. 커다란 날짜 창, 오프 센터 다이얼이 특징인 랑에의 시그너처 컬렉션 랑에 1도 바로 이 때 탄생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랑에 무브먼트는 빈티지 글라슈테 포켓 워치에서 볼 수 있는 쓰리-쿼터 플레이트와 인그레이빙한 밸런스 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_1994년 첫 컬렉션이자 4개의 프로토타입을 소개한 랑에운트죄네
_랑에운트죄네의 얼굴이 된 랑에 1 컬렉션
이후 랑에운트죄네는 1994년 4개의 칼리버로 시작해 17여 년의 시간이 흐른 2011년까지 40개의 칼리버를 소개하는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뿐만 아니라 150번 이상의 수상 기록도 자랑합니다). 그가 새롭게 뿌리 내린 랑에운트죄네는 몇 명 안 되는 팀원에서부터 시작해 이제는 어엿한 77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하이엔드 브랜드로 성장했고, 컬렉션도 1994년 4개의 프로타입에서 이제 각기 뚜렷한 개성을 지닌 다섯 개의 컬렉션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점핑 플레이트가 특징인 자이트베르크 리피터나 다채로운 천체 정보를 알려주는 리차드 랑에 퍼페추얼 캘린더 "테라루나", 다토그래프 퍼페추얼 투르비용 등의 정교한 컴플리케이션 역시 최고, 완벽을 지향하는 발터 랑에의 철학과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이 뒤에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 발터 랑에가 있었고, 그의 선구적 정신과 열정이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을 기리며 작센주는 1998년 그에게 공로 훈장을, 2015년에는 독일 연방 공화국이 공로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_리차드 랑에 퍼페추얼 캘린더 "테라루나"
_자이트베르크 미니트리피터
_증조 할아버지 페르디난드 아돌프 랑에 흉상 앞에 선 발터 랑에
2000년 랑에운트죄네가 리치몬트에 합병된 이후에도 발터 랑에는 일종의 브랜드 홍보대사와 고문 역할을 수행하며 랑에와 깊은 인연을 이어왔습니다. 그는 "제가 바로 랑에의 과거와 연결해주는 다리입니다(I am the bridge to our past)"라고 이야기하며 특별한 애정을 과시했습니다. 2015년 여름 완공한 랑에운트죄네의 새로운 매뉴팩처 오프닝 이벤트에도 발터 랑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심지어 그곳에서 그에게 생일 축하 인사를 하며 꽃다발을 선물하는 깜짝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_새롭게 완공한 매뉴팩처를 방문한 발터 랑에
_매뉴팩처 오프닝 행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생일 축하를 받고 있는 발터 랑에
92세의 나이로 워치메이킹 업계, 그리고 역사에 강한 존재감을 남기고 떠난 발터 랑에의 명복을 빌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브랜드 재건 당시의 회상을 담은 그의 인터뷰 동영상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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