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글라슈테 역사(驛舍)를 2005년 매입해 개조한 노모스 글라슈테의 현 본사 및 매뉴팩처 전경 ⓒ NOMOS Glashütte
글라슈테(Glashütte)는 독일 시계산업을 논할 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독일 시계의 성지와도 같습니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굴지의 은광산 지역이었던 글라슈테는 1845년 인근 드레스덴 출신의 워치메이커 페르디난드 아돌프 랑에가 랑에 운트 죄네를 설립한 이후로는 차츰 독일 최고의 시계 마을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과 함께 동독에 속했던 글라슈테 지방은 자연스럽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통일 직후인 199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다시 옛 시계마을로서의 영광을 서서히 복원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넘게 흐른 지금은 글라슈테의 산증인과도 같은 랑에 운트 죄네를 비롯해, 글라슈테 오리지널, 투티마, 모리츠 그로스만 등 여러 브랜드들이 오밀조밀 이웃하며 독일 시계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지요.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젊은 브랜드, 노모스 글라슈테(NOMOS Glashutte, 이하 노모스)가 있습니다. 노모스는 브랜드명이나 시계의 다이얼에 글라슈테를 함께 표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업체 중 하나로서, 비단 독일 뿐 아니라 시계업계 전체적으로 봤을 때도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신생 시계브랜드 중 가장 성공한 사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참고로 글라슈테산 시계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최소 50%의 부품을 글라슈테에서 생산, 조립해야만 하는데, 노모스는 전체 부품 중 95% 가까이를 글라슈테 매뉴팩처에서 자체적으로 제조가 가능합니다).
- 노모스의 창립자이자 최대 주주인 롤랜드 슈버트너
노모스는 독일 뒤셀도르프 출신의 사업가인 롤랜드 슈버트너(Roland Schwertner)가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인 1990년 1월 10일 4명의 사업 파트너들과 의기투합해 설립한 독립 시계 회사입니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어로 규율, 법칙을 뜻하는 단어 '노모스'를 브랜드명으로 삼고, 창립 초기부터 디자인적으로는 단순하면서도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할 만한 기계식 시계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롤랜드는 글라슈테의 여러 제조사들의 역사적인 자료들을 수집하던 중 노모스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를 구체화해 나갔고, 1930년대 글라슈테 지방의 한 손목시계 디자인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어 여류 디자이너 수잔 귄터(Susanne Günther)의 손을 거쳐 탄생한 첫 컬렉션이 바로 탕겐테(Tangente)입니다.
원형의 케이스에 양쪽으로 곧게 뻗은 러그 형태, 얇은 케이스 두께와 기계식 핸드 와인딩(수동) 무브먼트를 탑재한 탕겐테는 1992년 발매 직후부터 즉각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탕겐테를 구성하는 디자인 코드는 1907년 아트의 실생활화, 기계생산품의 미적 규격화를 주창하며 등장한 도이처 베르크분트(Deutscher Werkbund, 독일공작연맹)의 디자인 전통을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훗날 세계를 강타한 바우하우스(Bauhaus) 사조에도 영향을 미친 운동으로, 노모스의 컬렉션이 초창기부터 지금까지도 바우하우스 디자인으로 곧잘 오해(?) 내지 통칭되는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입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노모스는 바우하우스와는 직접적인 연계가 없으며, 반면 도이처 베르크분트의 후예들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이는 창립자 롤랜드 슈버트너가 뒤셀도르프 출신인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1992년 런칭 이래 오리지널 디자인을 이어가고 있는 노모스의 클래식, 탕겐테(35mm 모델)
군더더기 없이 심플한 실버톤 다이얼에 숫자와 바 인덱스를 번갈아 표시하고 변색을 방지하기 위해 불에 구운 스틸 소재의 얇은 블루 핸즈를 사용한 탕겐테 특유의 스타일은 매우 고전적이면서도 동시에 모던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시계 외적인 면 뿐만 아니라 무브먼트에 있어서도 옛 푸조의 수동 명기 7001의 설계를 기반으로 플레이트를 글라슈테 지방 전통의 3/4 플레이트 형태로 변형하고 전체 골드톤으로(현재는 실버톤 로듐) 도금 처리한 뒤 각 고정 스크류를 핸즈와 마찬가지로 고온의 불에 구운 산화 블루 스틸 스크류를 사용해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추구한 점이 시계애호가들 사이에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1970~80년대까지 이어진 쿼츠 쇼크의 여파로 기계식 시계의 종류가 그리 다양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손목의 움직임에 따라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셀프 와인딩 시계를 주로 선호했지, 매일 일정 횟수 태엽을 감아줘야하는 핸드 와인딩(수동) 시계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지요. 하지만 노모스는 창립 초반부터 약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로지 수동 시계 제조에 집중했습니다. 이는 기계식 시계의 가장 순수한(?!) 형태인 수동 시계 제작을 통해 브랜드를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내실을 다져나가겠다는 창립자의 의지의 표명이자, 모든 세대가 좋아하는 현대적인 클래식 시계를 만들겠다는 노모스가 애초 지향해온 정체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생 브랜드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ETA서 공급 받은 범용 칼리버가 아닌, 온전히 자체 개발한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제작, 사용해온 것도 이들이 얼마나 고집스러운 회사인지를 어림할 수 있게 합니다(물론 이러한 그들의 선택은 현 시점에서 봤을 때는 결과적으로 옳은 길이었지요).
- 사이즈를 키운 탕겐테 38 모델
- 특허 받은 데이트 디스크 및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 부품을 추가한 탕겐테 다툼 강레저어베 모델
탕겐테는 1992년부터 현재까지 계속 제작되며 브랜드를 대표하는 시그너처 컬렉션이자 독일이 자랑하는 아이코닉한 손목시계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시분초만 표시되는 타임온리 형태에서 시작해 날짜 표시 모델(2001년)과 특허 받은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 모델(2003년), 그리고 2005년 첫 인하우스 자동 칼리버를 탑재한 탕고맛(Tangomat)까지 선보이며 자사의 다른 컬렉션에도 자연스레 영향을 미쳤습니다.
탕겐테의 성공 이후로 로만 인덱스 다이얼을 사용한 한층 더 고풍스러운 느낌의 루드빅(Ludwig), 동명의 별자리에서 이름을 따와 독일 디자인 전통인 도이처 베르크분트의 미니멀리즘 디자인을 계승한 오리온(Orion), 유일한 정사각형 라인업인 테트라(Tetra), 스포티한 외형의 클럽(Club), 스위스 도시에서 영감을 얻은 건축학적 디자인의 취리히(Zurich), 첫 다이버 워치 컬렉션인 아호이(Ahoi), 컬러플하고 아기자기한 디테일이 특징적인 메트로(Metro) 등에 이르기까지 발표하는 컬렉션마다 노모스만의 확실한 개성과 디자인 철학을 오롯이 반영해 좋은 반응을 얻습니다. 또한 세계적인 권위의 굿 디자인 어워드, iF 디자인 어워드, 레드 닷 디자인 어워드 등에서 매년 수많은 제품 디자인상을 수상함으로써 브랜드의 명성에 기여하게 됩니다(2000년대 초반부터 2016년 현재까지 약 130개가 넘는 디자인상 수상).
- 2000년 CEO로 취임한 우베 아렌트(Uwe Ahrendt)
창립자 롤랜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현 노모스의 도약을 이끈 인물로 평가됩니다.
- 베를린에 위치한 노모스의 자매회사로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베를리너블라우(Berlinerblau)
그리스어로 각각 이름 붙여진 자사 무브먼트 종류만도 수동인 알파, 베타, 감마, 델타를 비롯해 자동인 엡실론, 체타, 크사이, 80여 시간의 파워리저브와 하이엔드급 피니시를 자랑하는 수동 칼리버 DUW 1001와 DUW 2002, 그리고 최근의 네오매틱 칼리버 DUW 3001에 이르기까지 노모스는 지난 20여 년의 세월 동안 장족의 발전을 보여줬습니다. 그 외에도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2006년 독일의 리테일러 벰페가 한정 선보인 하이엔드 라인 벰페 크로노미터베르크(Wempe Chronometerwerke)를 통해 일련의 크로노미터 시계와 첫 투르비용 시계를 제작한 것도 노모스의 숨겨진 뛰어난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후 기계식 무브먼트의 핵심 부품인 밸런스와 밸런스 스프링, 이스케이프 휠, 팔렛까지 전부 인하우스 기술로 개발 제조한 노모스 스윙 시스템(Nomos Swing System)을 도입하고, 도이치 우렌베르크(Deutsche Uhrenwerke)의 약자인 DUW를 붙인 일련의 인하우스 수동, 자동 칼리버에 선보임으로써 노모스는 이제 인조 루비와 스트랩 외에 거의 전 부품을 자체 생산하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진정한 매뉴팩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이는 노모스처럼 작은 규모의 독립 시계 회사로서는 실로 놀라운 성취입니다.
- 3.2mm 두께를 구현한 노모스의 새로운 울트라 슬림 자동 칼리버 DUW 3001
칼리버 개발에는 노모스의 젊은 무브먼트 디자이너 씨어도르 프렌젤(Theodor Prenzel)의 주도 하에
R&D 팀 수장이자 노모스 첫 자동 칼리버인 엡실론을 설계한 미르코 하이네(Mirko Heyne)가 함께 참여해 완성했습니다.
또한 칼 하스와의 협업의 결실인 블루 헤어스프링을 비롯해, 밸런스, 이스케이프 휠, 팔렛 등 주요 부품까지 전부 인하우스화에 성공했습니다.
- 탕겐테 컬렉션의 첫 오토매틱 버전 신제품인 탕겐테 네오매틱
스와치, 리치몬트, LVMH 등 거대 그룹에 속하지 않은 독립 시계브랜드로서 노모스가 달려온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이들은 비슷한 시기 데뷔한 그 어느 브랜드보다 영민하고 묵묵하게 자신들의 길을 개척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시하지 않는 순박하면서도 정제된 디자인을 바탕으로 독일에서 생산된 고품질 부품으로 구성 조립된 시계를 여전히 합리적인 가격대에 제공하는 양심적인 행보, 광고를 거의 하지 않고 제품 패키지 역시 단출하게 구성함으로써 애써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닌 시계 자체의 품질만으로 승부하겠다는 고집 등이 노모스를 동시대의 특별한 브랜드 중 하나로 돋보이게 합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속이 꽉 찬 내실 있는 매뉴팩처 브랜드로 성장한 노모스의 미래가 앞으로 더욱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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