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얼터너티브' 컬럼에서는 기계식 하이비트 시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지난 100여 년간의 기계식 손목시계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시간당 21,600회(3헤르츠, 초당 6진동) 혹은 28,800회(4헤르츠, 초당 8진동) 진동하는 무브먼트는 빠르게 업계의 주류로 자리잡았습니다. 전통적인 포켓 워치 무브먼트의 비트수와 비교할 때 이 정도도 20세기 중반까지는 하이비트로 언급되었습니다만, 1960대 말부터 몇몇 제조사들을 중심으로 이보다 더 빠르게 진동하는, 시간당 36,000회(5헤르츠, 초당 10진동) 작동하는 기계식 무브먼트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이러한 시계들이 제작, 시판되면서 하이비트 시계는 크로노미터 손목시계의 패러다임을 바꾼 일대 사건이자 훗날 쿼츠 손목시계의 등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세계 최초로 기계식 하이비트 손목시계를 대량생산으로 선보인 제조사는 스위스 라쇼드퐁의 매뉴팩처 브랜드 지라드 페리고(Girard-Perregaux)로 알려져 있습니다.
- 1966년 제작된 지라드 페리고의 자이로매틱 HF 시계 ⓒ Girard-Perregaux
지라드 페리고는 첫 10비트(시간당 36,000회 진동하는) 자동 무브먼트인 자이로매틱 HF(Gyromatic HF, 참고로 HF란 고진동을 뜻하는 'High Frequency'의 이니셜임)를 1965년 완성하였고, 이듬해인 1966년 이를 탑재한 시계를 본격적으로 시판했으며, 또 1967년에는 뉘샤텔 천문대(Neuchatel Observatory) 주관의 크로노미터 경연대회(Chronometer Competition)에 출품해 우승을 거머쥠으로써 손목시계 역사에 기록될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 미국의 재즈 뮤지션인 색소포니스트 시드니 베쳇(Sidney Bechet)을 모델로 내세운 1960년대 말 자이로매틱 HF 시계 인쇄 광고 이미지
사실 지라드 페리고가 자이로매틱을 런칭한 해는 그보다 훨씬 앞선 1957년. 지라드 페리고는 일찍이 손목시계용 오토매틱(자동) 무브먼트의 성장 가능성을 내다보았고, 얇은 수동 베이스에 풀 로터를 얹은 울트라 슬림 계열의 인하우스 자동 칼리버를 탑재한 라인을 자이로매틱으로 통칭하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10여 년 후인 1966년 기존 자이로매틱 무브먼트에서 한 단계 진화한 시간당 36,000회 진동하는 하이비트 설계의 자이로매틱 HF 칼리버(Cal. 32A)를 선보여 이듬해 뉘샤텔 천문대 크로노미터 경연대회를 석권함으로써(당시 전체 인증 시계 중 무려 73% 가량에 해당) 여느 전통의 스위스 제조사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지라드 페리고의 하이비트 무브먼트 개발은 갑작스레 불어닥친 쿼츠(Quartz) 손목시계의 등장과 함께 새 국면을 맞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이후로 지라드 페리고는 기계식 하이비트 칼리버 및 시계 제조를 전면 중단하였고, 1971년 스위스 제조사 최초로 32,768 헤르츠 진동하는 쿼츠 손목시계를 선보임으로써 일본의 세이코 뒤를 바짝 추격했습니다.
지라드 페리고의 쿼츠 손목시계 제조는 이후 1980~1990년대 초까지도 꾸준히 이어졌지만, 일본 제조사들의 다품종 대량생산 체제와 기민한 제품 개발 능력에는 사실상 미치지 못했고,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도 한계가 두드러졌습니다. 이후 이탈리아계 사업가인 루이지 마칼루소(Luigi Macaluso)가 사령탑을 맞은 직후에야 비로소 지라드 페리고는 지지부진하게 끌어온 쿼츠 무브먼트/컬렉션 생산을 중단하고 다시 예전의 기계식 시계 전문 제조사로 회귀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 현재의 위상을 갖기에 이릅니다.
- 2016년 신제품 지라드 페리고 1957 시계 Ref. 41957-11-131-BB6A
한편 지라드 페리고는 올해 창립 225주년을 기념하며, 브랜드의 황금기인 196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코닉 라인 '자이로매틱'에 바치는 헌사의 의미를 담아 자이로매틱이 런칭한 해에서 착안한 '지라드 페리고 1957' 모델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위 첨부 사진 참조).
직경 40mm 스틸 케이스에 선레이 마감한 샴페인톤 다이얼이 특유의 고풍스러운 매력을 선사하는 지라드 페리고 1957 시계는 한눈에 봐도 1960년대 유행한 오리지널 자이로매틱 시계의 심플하면서도 모던한 디자인 코드를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현행 인하우스 무브먼트 중 하이비트 칼리버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관계로, 기존의 8진동(4헤르츠) 칼리버인 GP03300-0130를 탑재한 점은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 뉘샤텔 천문대 크로노미터 경연대회를 호령한 역사적인 자이로매틱 HF 칼리버를 계승한 모던 하이비트 칼리버를 새롭게 개발해 사용했더라면 한층 더 매력적으로 와닿았을 터입니다. 하지만 애초 HF 모델이 아닌 초기 자이로매틱 모델에 바치는 오마주인 만큼 8진동 무브먼트의 탑재도 흠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빈티지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다이얼만으로도 이 시계는 많은 사연을 스스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 1968년 제작된 일본 최초의 하이비트 자동 손목시계 61GS ⓒ Seiko Watch Corp.
1960년대 말 하이비트 손목시계 제조 열풍에 가장 진지하게 화답한 브랜드로는 일본의 세이코(Seiko)를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라드 페리고가 1965년 자이로매틱 HF를 완성한지 2년후인 1967년, 세이코(스와 세이코샤) 역시 브랜드 첫 하이비트 칼리버(Cal. 5740)와 이를 탑재한 손목시계인 로드 마블 36000(Lord Marvel 36000)을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로드 마블 36000은 기계식 수동 방식의 하이비트 손목시계였고, 스와 세이코샤와 경쟁 구도였던 다이니 세이코샤(현 SII) 역시 이에 질새라 1968년부터 45KS, 45GS 시리즈 같은 수동 하이비트 명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같은해인 1968년 스와 세이코샤(현 세이코 엡손)는 자동 버전의 하이비트 손목시계(61GS 시리즈)를 연달아 출시함으로써, 세이코는 1967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의 짧은 몇 해의 세월 동안 기계식 하이비트 손목시계 제조 분야에서 일찌감치 정점을 찍습니다.
- 관련 함께 보면 좋은 컬럼 : '올 타임 클래식' 그랜드 세이코 편 >> https://www.timeforum.co.kr/14335360
- 2009년 출시한 그랜드 세이코 하이비트 36000 SBGH001
이후 세이코는 2009년 브랜드 최상위 그랜드 세이코(Grand Seiko) 라인을 통해 약 40여 년만에 새롭게 개발한 하이비트 자동 칼리버 9S85와 이를 탑재한 시계(Ref. SBGH001)를 선보이게 됩니다. 세이코의 이러한 행보는 1960년대 말 일련의 하이비트 시계들(특히 45GS V.F.A & 61GS V.F.A 모델)로 아시아 시계 제조사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위스 천문대 크로노미터 경연대회를 호령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새기고, 기계식 크로노미터 손목시계 제조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를 새롭게 다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마침 그랜드 세이코가 글로벌 리런칭한 시점과 맞물리면서 전략적으로도 활용되기 시작합니다.
이후 2014년에는 하이비트 자동 베이스에 GMT 기능을 더한 9S86 칼리버를 출시해 라인업을 확장하고, 같은해 총 600개 한정 제작 출시된 모델(Ref. SBGJ005)이 스위스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서 쁘띠 에귀유 부문을 수상함으로써 많은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 2016년 신제품인 그랜드 세이코 하이비트 36000 GMT 리미티드 에디션 SBGJ021 (전세계 500 피스 한정)
쿼츠(9F), 메커니컬(9S), 스프링 드라이브(9R) 크게 세 갈래로 나뉜 그랜드 세이코 전체 컬렉션에서 기계식 하이비트 라인업은 스프링 드라이브와 더불어 세이코의 시계 제조 기술력의 양대 정점을 보여줍니다. 신형 하이비트 칼리버 시리즈(9S85 & 9S86)는 단순히 옛것을 답습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에서 응용한 MEMS 성형 공법으로 핵심 부품인 이스케이프 휠과 팔렛 포크를 제조, 또한 인하우스 스프링 소재인 스프론(Spron)에 수배 이상의 내충격성과 항자성, 탄성 등을 갖춘 가장 진보한 헤어스프링(스프론 610)과 메인스프링(스프론 530)을 적용하는 등 보이지 않는 부분에까지 혁신의 DNA를 이어감으로써 과하게 티를 내지 않으면서 묵묵히 존재감을 발하는 그랜드 세이코의 정신과도 부합하고 있습니다.
- 1969년 시판된 제니스의 오리지널 엘 프리메로 손목시계 ⓒ Zenith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하이비트 칼리버라하면 아마 조건반사적으로 엘 프리메로(El Primero)부터 떠올릴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혹자는 제조사인 제니스(Zenith)보다 엘 프리메로가 갖는 명성이 더 크다고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시계애호가들 사이에서 엘 프리메로의 위상은 드높습니다.
1969년 탄생한 엘 프리메로는 하이비트 선배격인 지라드 페리고나 세이코와는 또 달리, 컬럼휠을 갖춘 통합형(Integrated) 자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에 시간당 36,000회 진동하는 하이비트 설계를 본격적으로 적용한 세계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일찌감치 아이콘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같은해 세이코의 칼리버 6139와 세이코 5 스피드 타이머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비롯, 브라이틀링, 호이어, 해밀턴 등이 공동 개발한 크로노매틱 칼리버 11과 같은 각자 세계 최초를 주장하는 자동 크로노그래프 칼리버와 시계들이 출시되었지만, 제니스의 엘 프리메로 3019 PHC(크로노그래프 & 데이트)와 엘 프리메로 3019 PHF(크로노그래프 & 트리플 캘린더 & 문페이즈)는 이들과는 차별화된 하이비트 설계까지 더해짐으로써 확실하게 모던 자동 크로노그래프 시대를 연 대표주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쿼츠 위기와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질 뻔한 무브먼트가 한 사람(찰스 베르모)에 의해 극적으로 되살아는 과정 역시 엘 프리메로의 전설적인 명성에 일조했지요.
- 관련 함께 보면 좋은 컬럼 : '올 타임 클래식' 제니스 엘 프리메로 편 >> https://www.timeforum.co.kr/14532786
- 2014년 첫 선을 보인 엘 프리메로 시놉시스 로즈 골드 모델 Ref. 18.2170.4613/01.C713
- 엘 프리메로 시놉시스 스틸 케이스 & 브레이슬릿 모델 Ref. 03.2170.4613/01.M2170
하이비트 자동 크로노그래프의 아이콘이 된 엘 프리메로지만 현대에는 시와 분 정도만 표시하는 타임온리 형태로도 그 베리에이션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엘 프리메로 시놉시스(El Primero Synopsis)라는 제품이 대표적인 예인데요(위 첨부 사진 참조).
이는 엘 프리메로가 갖는 상징성(하이비트)은 이어가되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특별히 선호하지 않는 고객들을 위한 제니스의 배려(?)이자 베스트셀링 컬렉션의 라인업을 계속확장하려는 장기적인 전략의 일환인 셈입니다. 또한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덜어냄으로써 가격접근성도 좋아지기 때문에 엘 프리메로 컬렉션의 진입 장벽을 낮추려는 계획도 반영된 결실입니다.
그러나 제니스 역시 앞서 보신 세이코의 경우처럼 역사적인 하이비트 칼리버를 단순히 계승하는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실리콘 이스케이프 휠과 팔렛 포크(레버)와 같은 혁신적인 신소재 부품들을 적극 도입하고 기존 베이스에 다양한 컴플리케이션 기능과 예상밖의 새로운 시도(퓨제 앤 체인 설계 등)도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하이비트 칼리버/컬렉션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유니크한 성취도를 자랑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브랜드의 하이비트 시계 중에 여러분들은 어떠한 시계에 가장 눈길이 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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