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르소는 누구보다 영리하게 진화했다. 리베르소 85주년 기념 모델인 리베르소 트리뷰트 듀오를 경험하며 알 수 있었다. 그 진가는 착용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에디터 유현선 포토그래퍼 기성율, 김도우 문의 예거 르쿨트르 02-6905-3998
하나의 아이콘
예거 르쿨트르의 아이콘인 리베르소는 1931년에 탄생했다. 당시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 장교는 폴로 게임을 할 때 깨지지 않는 시계를 원했고, 이를 전해 들은 에드몽 예거와 자크 다비드 르쿨트르는 반전 케이스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것이 바로 첫 리베르소 시계로, 케이스를 옆으로 밀어 180° 돌리면 다이얼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이 구조를 만드는 데만 50개 이상의 부품이 쓰였다. 정교하게 설계한 반전 케이스 외에도 리베르소는 검 모양 핸즈와 각을 세운 아플리케 인덱스, 케이스를 장식한 고드롱 장식 등 그 시절에 이미 완성된 디자인과 매력적인 디테일을 지니고 있었다.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정체성을 구축한 덕분에 지금도 특징이 뚜렷한 사각시계의 대표주자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1 / 뒷면의 네이비 다이얼은 클루 드 파리 기요셰를 정교하게 새겼다. 일부러 매끈하게 마감한 세컨드 타임과 낮밤 인디케이터가 돋보인다.
2 / 그레인 기법으로 세공한 앞면 다이얼은 시계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 디테일이다.
3 / 반전 케이스를 밀면 햇살이 퍼져 나가는 듯한 패턴이 나타난다. 숨은 묘미다.
리베르소 트리뷰트 듀오
올해 리베르소는 탄생 85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정비를 마쳤다. 특히 리베르소 트리뷰트는 ‘헌정’을 뜻하는 이름처럼 1931년의 오리지널을 재해석한 모델이다. 컴플리트 캘린더를 적용한 리베르소 트리뷰트 캘린더와 세컨드 타임을 확인할 수 있는 리베르소 트리뷰트 듀오의 두 가지로 선보였다. 크기로 보나 기능으로 보나 기함의 포스를 강하게 드러내는 리베르소 트리뷰트 캘린더와 달리, 리베르소 트리뷰트 듀오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하다. 리뷰 기사를 위해 시계를 처음 받았을 때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디테일은 화이트 다이얼의 특이한 질감이었다. 일부러 표면을 고르지 않게 다듬었다. 마치 곡물의 낟알을 흩뿌려놓은 듯이 보이는 그레인(Grain) 기법이다. 실제로 보니 래커 다이얼과는 또 다른 고급스러움이 있었다. 사진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점이다. 예거 르쿨트르가 듀오미터 그랑 소네리나 앙트완 르쿨트르 주빌리 등 하이엔드 컬렉션에 그 기법을 자주 적용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블루 핸즈와 아플리케 인덱스가 다이얼 가장자리에 두른 레일로드 미니트와 어우러져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물씬 풍긴다. 검 모양에서 뾰족한 도핀 양식으로 바뀐 핸즈나 동그란 스몰세컨드는 이번 신제품과 이전 모델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이다. 리베르소의 예스러운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디자인적 완성도를 높여준다. 특히 도핀 핸즈는 각진 아플리케 인덱스를 정확히 가리키며 뛰어난 가독성을 보였다.
1 / 반전 케이스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세컨드 타임을 확인할 수 있어 편리하다. 하나의 시계로 두 가지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점 역시 마음에 들었다.
2 / 리뉴얼 전 모델인 리베르소 레이디와의 비교. 리베르소 트리뷰트 듀오의 도핀 핸즈는 뛰어난 가독성을 보였다.
3 / 케이스의 바뀐 점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리베르소 트리뷰트의 케이스는 러그 쪽으로 살짝 휘었다. 반전 케이스와 맞물리는 곳도 튀어나오지 않도록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숨은 디테일
반전 케이스는 부드럽게 돌아간다. 케이스를 돌리기 위해 밀거나 당겨도 마감이 덜 된 금속에서 흔히 느껴지는 긁힘이나 소리가 생기지 않았다. 열고 닫을 때에는 케이스의 금속 볼이 잠금장치에 물리며 ‘찰칵’ 소리가 들리는데,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신뢰감을 주었다. 잘 만들어진 기계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유격 때문에 흔들리거나 어긋난 곳이 없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케이스를 돌리면 세컨드 타임과 낮밤 인디케이터를 설정할 수 있는 뒷면 다이얼이 등장한다. 네이비 컬러 다이얼은 시간 다이얼과 스몰세컨드를 제외한 부분을 클루 드 파리 기요셰로 마감했다. 그 덕분에 시간 다이얼이 한층 도드라진다. 클루 드 파리 기요셰도 무늬가 고르고 정교하다. 지난 1월 예거 르쿨트르 매뉴팩처를 방문했을 때, 전통적인 기요셰 머신이 가득한 공방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이 직접 원형과 직선을 새기는 두 가지 수동 머신의 페달을 밟으며 예거 르쿨트르의 모든 기요셰를 새긴다고 했다. 시계에서는 그 숙련도를 실제로 느낄 수 있었다. 앞면의 시간과 스몰세컨드, 그리고 뒷면의 세컨드 타임과 낮밤 인디케이터는 동일한 비율로 이루어져 서로 대칭을 이룬다. 기능적으로나 디자인적으로나 일반 리베르소와 구분되는 듀오 페이스의 묘미라 하겠다. 크라운으로 태엽을 감으면 아주 부드럽게 돌아간다. 중간중간 래칫 휠의 저항이 미세하게 전해지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그런데 크라운으로는 앞면 다이얼의 시간을 조정할 수 있을 뿐, 세컨드 타임과 낮밤 인디케이터를 조정하는 푸시 버튼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리베르소 트리뷰트 신모델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반전 케이스의 윗면에 숨어 있는 슬라이드 버튼을 당기면 세컨드 타임의 시침과 낮밤 인디케이터 핸드를 한 시간씩 앞으로 조정할 수 있다. 별도의 코렉터나 조정용 툴이 필요 없어 사용자 입장에서 몹시 간편할 뿐 아니라 시계의 미관도 해치지 않아 디자인적으로도 훌륭한 수완이다.
스테인리스스틸 소재 케이스의 크기는 42.9×25.5mm, 두께는 9.15mm다. 기존 그랑 리베르소보다 조금 작고, 그랑 리베르소 울트라신과는 동일한 두께다. 미미한 차이지만 착용감은 확연히 다르다. 리뉴얼을 거치며 케이스 디자인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러그를 아래쪽으로 살짝 기울여 케이스백이 아주 은근히 휘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지만 시계를 직접 차보면 확실히 케이스가 손목에 더 밀착한다. 달라진 부분은 세공에도 있다. 반전 케이스를 밀었을 때 나타나는 받침면의 무늬가 페를라주에서 햇살이 퍼져 나가는 듯한 패턴으로 바뀌었다. 받침면 자체도 안쪽에서 보면 오목하게 휘었다. 반전 케이스가 부드럽게 들고 날 수 있도록 배려한 부분이며, 공학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구조다. 러그나 케이스 옆면 등 곡면을 이루는 부분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가공했다. 반면에 케이스의 면과 면을 잇는 모서리는 에지가 살아 있으면서 지나치게 날카롭지 않다. 수동식 버터플라이 폴딩 버클에도 스트랩 교체 방식을 새롭게 적용했다. ‘PUSH HERE’라는 문구가 적힌 버클 안쪽을 누르면 간편하게 가죽 스트랩을 분리할 수 있다. 리베르소의 해를 기념하는 모델답게 전반적으로 발전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폴딩 버클의 안쪽에는 아무런 폴리싱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버클에서 스트랩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이다.
만족스러운 퍼포먼스
핸드와인딩 칼리버 854A/2는 기존 리베르소 듀오 페이스 모델에 탑재한 854_1에 세컨드타임과 낮밤 인디케이터를 조정하는 슬라이드 버튼을 적용하며 수정한 버전이다. 하나의 배럴이 두 가지 시간을 구동하며, 42시간 파워리저브를 제공한다. <크로노스> 편집부의 오차 측정기 테스트 결과, 풀와인딩 시 하루 중 오차는 다이얼이 위를 향했을 때 -9초 정도로 다소 느린 편이었지만, 24시간이 지난 후에는 -1초 정도로 안정적인 결과를 냈다. 태엽이 풀리면 시계는 약간 빨라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오차를 상쇄한 것으로 보인다. 스톱세컨드 기능이 없는 모델이라 정교한 측정은 까다로웠지만, 실제로 착용하고 3일이 지난 뒤에도 시계는 특별히 느려지지 않았다. 측정 시 포지션을 바꾸어도 오차는 크게 변하지 않았고 진동각도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위치에서 조정이 꼼꼼하게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1 / 수동 버터플라이 디플로이먼트 방식 폴딩 버클은 수월하게 열리고 견고하게 닫힌다.
2 / 이 부분을 손톱으로 살짝 누르면 손쉽게 스트랩을 교체할 수 있다.
3 / 반전 케이스의 윗면에는 세컨드 타임과 낮밤 인디케이터를 한 시간씩 조정할 수 있는 슬라이드 버튼이 숨어 있다. 리베르소 케이스의 장점을 활용한 아이디어다.
진정한 진화
무엇보다 리베르소 트리뷰트 듀오는 1931년의 오리지널 모델을 계승하면서, 현대 리베르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계로 의미가 깊다. 케이스를 뒤집으면 바로 세컨드 타임을 확인할 수 있는 편리한 GMT 기능임은 물론, 곳곳에서 개선된 디테일과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1460만원이라는 가격도 기능을 고려했을 때 합리적이라고 느껴진다. 며칠간 차보니 날짜 기능이 없는 게 문득 아쉬울 때가 있었지만 앞면과 뒷면의 다이얼을 번갈아 손목 위로 올려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날짜창이 전체적인 디자인의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외관은 85년 동안 애호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리베르소의 매력을 간직한 채다. 진화의 핵심은 단점을 수정하되, 장점을 더욱 발전시킨다는 것에 있다. 리베르소 트리뷰트 듀오는 그 사실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시계다.
리베르소 트리뷰트 듀오
Ref. Q3908420
기능 시·분·초, 세컨드타임,
24시간 및 낮밤 인디케이터
무브먼트 핸드와인딩 854A/2,
21,600vph, 19스톤, 42시간 파워리저브
케이스 42.9×25.5mm,
스테인리스스틸, 30m 방수
가격 146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