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트의 대시보드 클락과 스톱워치
부가티의 라디에이터 그릴을 형상화한 미도의 시계 (위), 라디에이터 그릴 모양 미도 시계(아래)
일부 계층에서만 타던 자동차가 점차 대중화되면서 시계 메이커들도 이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회중시계나 회중시계형 스톱워치는 대시보드에 고정하는 형태로 많이 볼 수 있는데, 지금처럼 자동차 완제품에 기본품목처럼 달려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목시계의 시대로 접어들면서는 자동차 라디에이터 그릴의 실루엣을 본 딴 케이스와 같이 자동차를 시계로 형상화 하는 형태가 적지 않았는데요. 개중에는 바쉐론 콘스탄틴의 히스토리크 1921처럼 드라이버스 워치, 즉 운전자가 운전 중 쉽게 시간을 확인하도록 삐딱하게 케이스를 돌려 놓은 실용적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페라리 X 지라르 페르고 (위) / 페라리 X 파네라이 (아래), 둘 모두 페라리를 상징하는 옐로우와 로고를 크게 사용한 다이얼이 특징
위블로의 페라리는 카운터를 속도계처럼 이미지 한 디테일을 보인다
시계와 자동차는 같은 기계라는 측면에서 계속 살을 맞대어 왔는데, 협업이라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타난 시점은 근래에 들어서입니다. 남성들의 로망인 수퍼카 메이커들이 시계 메이커와 협업의 좋은 타켓이 되곤 했는데요. 대표적인 메이커가 페라리입니다. 수퍼카의 상징적인 존재로 페라리는 인기가 높았고 지금도 마찬가지 인데요. 페라리의 굵직한 파트너로는 지라르 페리고, 파네라이가 있었는데 둘 다 이탈리아 커넥션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지라르 페리고는 당시 CEO인 루이지 마카루소가 이탈리아 출신이었고 파네라이 역시 CEO를 포함 메이커(생산은 스위스)가 이탈리아 태생이죠. 현재 위블로와 협업하면서 이탈리아 커넥션이라는 방침은 깨졌는데요. 페라리와 협업한 시계의 특징은 페라리의 강렬함과 강력함을 이미지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때로는 브랜드를 지칭하기도 때로는 특징 자동차를 지칭하기도 했는데요. 현재의 위블로는 디테일로 이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쉘비 코브라 X 보메 메르시에
볼 포 BMW
AMG X IWC
페라리와의 협업 모델을 살펴보시다시피 자동차 메이커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법과 디테일을 시계로 구체화하는 방식이 자동차 협업 시계의 큰 틀입니다. 전자의 경우 비교적 쉬운 편으로 협업 대상의 로고나 엠블럼을 가져다 쓰면 되는데요. 이것의 예로 보메 메르시에의 쉘비 코브라 에디션, 볼 포 BMW(Ball for BMW), IWC와 AMG 등 이 있습니다. 쉘비 코브라 에디션은 특유의 코브라 로고를 크로노그래프 바늘에 이식하고, 볼 포 BMW는 BMW의 로고를 다이얼에 달았고 IWC의 구형 인제니어는 케이스 백에 AMG의 로고를 새겼습니다. 나름 해당 자동차와 메이커 느낌을 살리기 위한 구색과 디테일을 갖췄지만 기존 모델을 베이스 하기 때문에 큰 품을 들이지 않은 편에 속하죠.
브라이틀링 포 벤틀리
랄프 로렌 투르비용
자동차 디테일을 시계에서 살리는 방법은 이 역시 고전적이긴 합니다만, 소재, 가공기법의 향상으로 좀 더 세밀해졌습니다. 라디에이터 그릴를 묘사하는 수준에서 지금은 계기반, 타공한 세라믹 브레이크 디스크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브라이틀링 포 벤틀리처럼 케이스 백 디자인을 휠 모양으로 한다거나 하기도 하고, 랄프 로렌 워치처럼 대시보드의 우드 패턴을 시계로 가져오기도 하죠. (물론 이해를 위해 둘로 나눴지만 자동차 이미지와 디테일을 섞어 쓰는 게 일반적이었고, 어떤 쪽에 비중을 더 크게 두었는지는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부가티 타입 370 미쓰(Mythe)
여기까지는 표현력의 향상으로 상당히 세련되어 보이지만 기법이나 발상은 예전에 비해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들입니다. 협업 시계의 변화는 파르미지아니의 부가티 타입 370 같은 모델에서 발견됩니다. 부가티 타입 370은 협업 대상의 브랜드나 디테일을 거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수직 배치라는 새로운 무브먼트로 부가티의 강력함을 이미지 합니다. 시계 기술의 새로운 충격을 치환한 것인데 이 무브먼트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자동차의 트랜스미션을 연상시키며 자동차 협업이라는 당위성까지 완전히 충족시켰죠.
앰복스2 트랜스폰더, 다이얼 좌우로 차량 개폐를 위한 Open, Close 버튼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예는 애스턴 마틴과 협업했던 예거 르쿨트르입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기존 모델을 애스턴 마틴에 끼워 맞추거나 자동차 디테일 묘사로 식상한 모습으로 힘이 빠지긴 했지만, 초반의 앰복스 2 크로노그래프나 트랜스폰더 같은 모델은 기존 협업 형태와 뚜렷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앰복스 2 크로노그래프는 차량을 운전하며 손쉽게 크로노그래프를 작동 할 수 있도록 푸시 버튼 대신 글라스를 누르는 형태를 보여주었고 트랜스폰더(DBS, DB9)는 애스턴 마틴의 키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애스턴 마틴을 계약하거나 애스턴 마틴 딜러에서 시계를 옵션으로 선택하거나 구입할 수 있었고, 시계는 자동차의 개폐, 위치 확인 같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협업과 달리 보다 자동차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이제는 라인업에서 앰복스가 사라진 관계로 다른 메이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하게 되었지만 말이죠.
협업은 한 쪽이 원한다고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성공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계, 자동차라는 남자를 들뜨게 하는 공통점이 있는 물건이기 때문에 둘의 협업은 서로에게 매력적인 제안이죠. 때문에 앞으로도 파르미자이니, 예거 르쿨트르를 능가하는 뭔가 새로운 시계가 앞으로 등장할 거라는 기대를 가지게 끔 하는군요. 지금 당장은 신박한 모델이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가 짠하고 멋진 협업 시계를 보여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