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축. 메가 매뉴팩처인 롤렉스의 전경
매뉴팩처(Manufacture)는 영어건 프랑스어건 제조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시계업계에서 매뉴팩처라고 하면 역시 제조를 의미하는데 약간 다른 업계와 달리 쓰이기도 하죠. 인 하우스에서 시계를 생산하는, 좀 더 자세하게는 기획, 디자인, 부품제조, 조립, 완성에 이르기까지 인 하우스에서 할 수 있는 메이커를 의미합니다.
프랑스에서 종교박해를 피해 험준한 스위스 쥬라 산맥에 자리를 잡은 위그노들은 전문직 종사자 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솜씨 좋은 장인도 포함되었는데, 시계 장인은 지금으로 치면 IT 엔지니어와 같은 위상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농한기인 겨우내 시계부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솜씨가 좋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찾는 곳이 많아집니다. 부업으로 생각했던 시계부품 제조의 벌이가 좋아지자 아예 부품을 만드는 회사를 차리는데 이것이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계 혹은 부품 메이커가 되는 것이죠. 그들은 시계 바늘이면 시계 바늘, 다이얼이면 다이얼, 무브먼트면 무브먼트. 각자 전문 분야가 있었는데 이들에게서 원하는 부품을 구해 조립한 뒤 자신의 이름을 붙이면 시계가 되곤 했습니다. 즉 스위스 시계업계는 분업화가 기본이 되었는데요.
또 다른 악의 축. ETA의 로고
이것은 쿼츠 시계의 등장 이후, 스위스 시계산업 구조가 크게 바뀐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무브먼트 제조사는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흡수, 합병으로 덩치를 키운 ETA의 의존도가 더욱 커지게 되죠. ETA가 군소리 없이 무브먼트를 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었던 덕에, 스위스 시계업계는 빠르게 쿼츠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2000년 초반에는 정말 누구나가 시계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시계산업에 뛰어드는데 이는 그간 유지해 온 분업화 덕분이었습니다.
분업화의 균열은 ETA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ETA는 한차례 에보슈(반조립 상태의 무브먼트)의 공급 중단과 공급 제한을 시도해, 실제로 에보슈 공급을 중단합니다. 이 때 많은 메이커들의 반발로 연방법원까지 가서 서로 중재안을 따른 결과였는데요. ETA는 다시 한번 공급중단을 시도, 이번에는 2019년 완전중단이 가능해 집니다. ETA가 무브먼트 공급 중단을 하면 지금껏 ETA를 탑재해 시계를 만들던 메이커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두 차례의 공급 중단에 따라 시간을 벌게 되어 ETA의 대안(셀리타 등)이 등장하여 어느 정도의 완충책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으나, 완전 대체는 현재까지도 어려움이 따르리라 보입니다. ETA가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배경에는 과거 ETA가 속한 스와치 그룹의 회장인 니콜라스 하이에크의 발언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ETA로 인해 쉽게 시계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스위스 메이드의 퀄리티를 저하시킨다라고 한 바 있는데요. 반은 맞는 말이고 반은 시장 장악을 위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ETA의 부품 일부를 공유한 프레드릭 콘스탄트의 인 하우스 무브먼트
무브먼트 조립 과정
이는 몇몇 메이커로 하여금 매뉴팩처의 길을 걷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은데 이유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생산시설을 갖춰야 하고, 이를 다룰 수 있는 인력도 확보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00년 이후 매뉴팩처로 전환한 메이커의 면면을 보면, 하이엔드, 그룹에 속한 메이커, 소수의 독립 메이커로 나뉘게 됩니다.
Part 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