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츠 손목시계의 등장으로 1970년대를 깜깜하게 보낸 스위스 업계는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회복세를 보입니다. 10년이 좀 넘는 기간은 시계 산업의 기반을 날리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는데요. 1980년대 후반부터 다시 기계식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예전처럼 자신들의 개성이 스며든 무브먼트를 만들 수 있는 메이커는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체력을 회복한 메이커들은 예전처럼 온전한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해 인 하우스 무브먼트의 생산을 재개합니다. 물론 범용 무브먼트 공급 제한이라는 외부요인이 작용한 점도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죠.
2000년대에 태어난 무브먼트를 봤을 때 이전과 확연하게 변화한 부분이 있습니다.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요.
오데마 피게 칼리버 3120. 파워리저브 60시간 이상
1. 파워리저브의 증가
40시간 내외였던 파워리저브는 60시간 내외의 파워리저브로 50% 가량 작동시간이 길어집니다. 싱글 배럴이 기본이었던 과거와 달리 더블 배럴과 그 이상의 배럴을 사용하는 기술이 보편화 되었고, 이것에는 7데이즈 이상의 롱 파워리저브의 등장과도 영향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로 토요일 반나절을 일하는 주 6일 근무에서 주 5일 근무로 변화한 부분인데요. 예전에는 토요일 오후에 시계를 풀게 되었지만 요즘에는 금요일 밤에 시계를 풀게 되어 더 긴 시간을 작동해야만 월요일에 멈춰있지 않으니까요.
16 1/2 라인(linge)의 ETA 발그랑쥬(Valgrange) 칼리버 A07.211
2. 두께와 지름의 확대
케이스 지름이 급격하게 확대되는 빅 워치 붐은 2000년 중반에 등장했으므로 그 이전에 나온 무브먼트는 해당 사항이 없으리라 봅니다. 다만 스포츠 워치의 영향력이 전해 비해 상당 부분 커진 점은 반영이 되었겠죠. 그래서 보다 충격에 강한 형태를 취하려고 했고 이는 두꺼워진 두께로 이어집니다. 무브먼트의 지름은 사실 작으면 작을수록 활용도가 커집니다. 남성용은 물론 여성용에도 탑재할 수 있어서죠. 그럼에도 지름을 키운 무브먼트가 적지 않았습니다. ETA의 경우 자동 크로노그래프인 칼리버 7750의 바깥쪽에 살을 더한 발그랑쥬 시리즈를 내놓기도 했는데, 지름과 로터 크기를 빼면 사실상 같은 무브먼트지만 지름을 확대해 변화한 흐름에 대응했습니다.
몽블랑 칼리버 MB R100. 컬럼 휠과 버티컬 클러치 구성
3. 자동 크로노그래프 구성의 변화
사실 예전에는 자동 크로노그래프의 가짓수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아서 이렇다 싶은 표본이 없었는데요. 2000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적지 않은 수의 자동 크로노그래프가 등장하면서 특징을 살필 수 있습니다. 도드라지는 내용은 부품의 구성인데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제어하는 중요 부품이 컬럼 휠로 거의 표준화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컬럼 휠 특유의 구조가 가공의 어려움, 복잡함을 유발해 저가형 크로노그래프에서는 캠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대부분 컬럼 휠을 사용해 부드러운 작동을 보증합니다. 클러치 방식은 자동의 경우 버티컬 클러치가 많으며 이 방식 유일한 약점인 두께의 증가를 용인하는 흐름과도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우워크(Urwerk) UR-210
4. 특수 기능의 일반(?)화
예전 같으면 레트로그레이드는 고급 기능으로 분류했습니다. 부채꼴 모양의 창 끝에 바늘이 닿으면 0으로 튕겨 되돌아가는 동작은 매우 복잡하다고 할 수 없지만, 작동 보증성을 갖춰야 해 까다로운 편이었죠. 이 외에도 빅 데이트나 자동 크로노그래프의 캠을 컬럼 휠로 수정한 무브먼트등은 ETA 덕분에 흔히 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대중적인 시야에서 특수 기능이 일반화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컴플리케이션에서는 전통 형태, 즉 투르비용, 퍼페추얼 캘린더, 미닛 리피터 등에서 탈피하여 아예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며 마이크로 하이엔드 같은 새로운 장르를 구축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워크(Urwerk)의 새틀라이트 메커니즘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율리스 나르당 칼리버 UN118. 주요 부품을 실리시움으로 제작
5. 실리시움의 사용
실리콘(Silicon)의 프랑스어인 실리시움을 이용해 반도체 웨이퍼를 만드는 기법으로 부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율리스 나르당의 아이디어가 시계 그룹, 대형 메이커 주도로 확대되어 이들은 실제로 헤어스프링, 이스케이프먼트 등에 적극적인 활용을 하고 있습니다. 실리시움은 비금속 소재이기 때문에 내자성, 경량과 같은 장점을 내세우며 대중화를 꾀하고 있는데요. 재미있는 점은 다른 특징과 비교했을 때, 실리시움파와 비 실리시움 파로 확실하게 나뉘어 있는 것입니다. 실리시움을 활용하는 마케팅 측면도 무시하지 못할 듯 한데요. 어느 쪽의 판단이 맞느냐를 떠나 2000년대 무브먼트의 특징으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요소임은 분명합니다.
제가 추려본 내용은 이 정도입니다. 자 그럼 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