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바쉐론 콘스탄틴의 맞춤 제작 서비스의 일종인 아틀리에 캐비노티에(Atelier Cabinotiers) 자료를 보던 중 시계 하나가 저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바로 '필로소피아'가 그것으로 다이얼 위에 바늘이 하나만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름도 뭔가 철학적인 느낌이 물씬 들었고요.
바늘이 하나만 있는 시계라,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시계 본연의 임무가 바로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인데, 바늘을 하나만 이용한다니 뭔가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니까요.
하지만 사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시계의 시초,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해시계 등도 일종의 바늘 하나가 알려주는 시간을 읽는 형태였고, 초창기 회중시계도 바늘 하나로 선보였습니다. 손의 촉감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브레게의 유명한 택트 워치도 케이스 위 바늘 하나의 위치를 손으로 만져 '은밀하게' 시간을 어림짐작하는 시계였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시계 브랜드들은 그야말로 다양한 기능과 컴플리케이션을 총동원해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인지 그 와중에 가끔씩 보이는 바늘 하나짜리 시계가 오히려 신선하고 운치마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아래는 바로 최근 만난 것 중 기억에 남는 바늘 하나짜리 시계들입니다.
반클리프 아펠이 이번 SIHH에서 선보인 미드나잇 뉘 뤼미뉴즈 워치(Midnight Nuit Lumineuse Watch)로 피에조 효과를 응용한 기술력으로 다이얼 위에서 불을 밝히는 시계입니다. 보시다시피 시간 표시는 바늘 하나가 레트로그레이드 방식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 반클리프 아펠의 미드나잇 뉘 뤼미뉴즈 워치
일전에 바젤월드의 독립워치메이커 섹션에서 발견한 스페인 태생의 피타 바르셀로나(Pita Barcelona)의 시계로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름도 '미니멀(Minimal)'입니다. 지나치게(!) 간결한 바 인덱스, 하나의 바늘, 여기에 심지어 크라운까지 과감하게 덜어버렸습니다.
- 피타 바르셀로나의 미니멀
HYT의 스컬 마오리(Skull Maori). 엄밀히 말하면 하나의 바늘이라기보다 하나의 액체(!)라는 설명이 더 맞겠네요. 분을 표시하는 인디케이터를 따로 두지 않아 오로지 액체가 표시하는 지점으로 시간을 짐작해야 합니다. 다이얼 위 강한 인상을 남기는 해골의 원시적인 느낌과 부합하도록 디자인하고 싶었다는 설명입니다.
- HYT의 스컬 마오리
그래서 약간은 즉흥적으로 VS 컬럼 주제를 정해보았습니다. 바늘을 하나만 갖추고 있는 시계로 말이죠. 대결을 펼칠 두 후보는 바로 바쉐론 콘스탄틴의 필로소피아, 그리고 자케 드로의 그랑 아워입니다.
VACHERON CONSTANTIN - Philosophia
우선 이 주제의 발단(!)이 된 바쉐론 콘스탄틴의 필로소피아입니다. 아무래도 바쉐론 콘스탄틴의 아틀리에 캐비노티에 서비스에 대해 살짝 언급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일종의 시계 커스텀 메이드 혹은 메이드 투 오더 서비스로 패션의 오트 쿠튀르에 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객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설명하고, 바쉐론 콘스탄틴은 그것이 어떤 요구이든, 시간이 얼마가 소요되든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그것을 실현시킵니다.
스페셜 오더인 필로소피아는 '반드시 정확한 분까지 알 필요는 없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시계 주인의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필로소피아라는 이름 자체도 주인이 부여한 이름입니다.
그 결과 패트리모니 컬렉션을 기본으로 하고 중앙에 오로지 하나의 바늘을 갖춘 상당히 철학적인 시계가 탄생했습니다. 시침 하나를 이용해 24시간 단위로 시간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비밀은 바로 케이스 왼쪽의 슬라이드에 숨어 있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미니트리피터인 것입니다! 굳이 정확한 시간을 알아야 한다면 이 슬라이드를 당겨 '소리로' 시간을 들으면 됩니다.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지만, 정말 낭만적이지 않나요?
또 하나의 선물은 다이얼 6시 방향을 열어두어 감상할 수 있게 한 투르비용입니다. 천체, 천문에 큰 관심을 지니고 있는 고객이 문페이즈 인디케이터도 맞춤 제작으로 요구했습니다. 케이스백에서는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 별자리를 품고 있는 파워리저브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시계가 특별 주문한 '비범한' 시계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케이스에는 "Les Cabinotiers"를 새겼고, 바쉐론 콘스탄틴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제네바 홀마크 인증을 품고 있습니다. 시계 안 수동 무브먼트는 522개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야말로 바늘 하나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VS
JAQUET DROZ - Grand Heure
자케 드로의 그랑 아워는 그야말로 바늘 하나를 통해 최상의 미니멀리즘을 구현한 시계입니다. 앞서 설명한 피타 바르셀로나의 '미니멀' 시계와 비슷한 코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실 필로소피아는 다소 철학적인 신념에 입각하고, 또 심지어는 미니트리피터라는 컴플리케이션까지 탑재하고 있는 시계지만, 그랑 아워는 심플함의 미학 즉 'Less is More'를 그대로 보여주는 시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극대화하고자 블랙 다이얼 버전을 경쟁 후보로 가져왔습니다(!).
자케 드로는 브랜드 DNA 자체에 간결함, 심플함, 미니멀리즘을 담고 있는 브랜드라고 볼 수 있는데요. 브랜드에서 즐겨 사용하는 독특한 원석이나 스톤, 그리고 에나멜 다이얼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아, 물론 메티에 다르 컬렉션격인 '레자틀리에(Les Ateliers)'에서는 예술성을 보여주는 복잡한(!) 시계들도 다수 선보이기는 하지만, 브랜드 주요 컬렉션을 살펴보면 심플한 느낌이 대세를 이룹니다. 그랑 아워 역시 그렇고요. 12시 방향에 점핑 아워를, 6시 방향에는 12개의 주요 도시 디스크를 담은 '트웰브 시티즈(Twelve Cities)'도 다이얼 위에 바늘이 하나만 있는 매우 심플한 일종의 월드타이머로 이 그랑 아워에서 파생한 베리에이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그랑 아워로 돌아와서 그랑 아워는 18K 레드 골드에 그랑푀 블랙 에나멜 다이얼을 매치한 버전과 스틸에 블랙 오닉스 다이얼을 매치한 버전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의 이미지는 스틸 버전입니다.
사이즈는 43mm로 다이얼 위 자케 드로 로고, 1~24까지의 숫자 인덱스, 그리고 오로지 바늘 하나, 이것이 전부입니다. 다이얼 주변 360도를 크게 24등분해 24시간 단위로 시간을 표시하고, 각 시간 사이를 6등분 해놓아 눈금 하나를 10분 정도로 계산해서 분은 어림짐작할 수 있습니다(바쉐론 콘스탄틴처럼 정확히 분까지 알 수 있는 또 다른 장치는 없습니다. 매의 눈으로 관찰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다이얼이 24시간을 기준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바늘이 보통 시계에 비해 1/2의 속도로 움직이는데, 이 자체로도 뭔가 팍팍한(!) 삶에서 소소한 여유가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더블 배럴을 갖춘 자동 무브먼트 자케 드로 24JD53은 68시간 파워 리저브 가능합니다.
사실 정확한 단위의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손목 시계보다 휴대폰을 보는 분들이 더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싱글 핸드(single hand)' 시계가 시계 본연의 임무에는 다소 소홀(!)할지언정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독특한 대안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사롭지 않은 고귀한(!) 혈통의 바쉐론 콘스탄틴 필로소피아, 그야말로 미니멀리즘을 극대화한 듯한 군더더기 없는 자케 드로의 그랑 아워. 당신의 손목에 올려보고 싶은 시계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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