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루스 칼리버 SF240. 알람 무브먼트 특유의 알람용 배럴과 와인딩 구조를 띈다
파네라이가 좋아하는 8데이즈 파워리저브의 배경에는 과거 엔젤루스의 탁상용 알람 무브먼트 칼리버 SF240의 탑재를 들 수 있습니다. 이를 아카이브 삼아 예거 르쿨트르의 8데이즈 파워리저브를 갖춘 칼리버 887을 베이스로 PAM 190에 탑재한 이래, 현재는 인 하우스에서 많은 8데이즈 무브먼트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하필 하고 많은 숫자 중에 8이냐 하는 의문이 드는데, 엔젤루스 SF 240의 시대에 탁상시계용 무브먼트라고 하면 8데이즈가 고급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수동으로 감아야 하는 탁상용 무브먼트의 특성상 파워리저브가 길면 사용에 편리했는데, 8일이면 일주일 단위로 규칙적으로 감아줄 수 있어 더 편리했습니다. 8일 구동이면 하루 정도 와인딩을 까먹어도 괜찮았을테죠.
쇼파드의 8데이즈(실제로는 그 이상) 투르비용
랑에 운트 죄네의 랑에 31
오리스 아뜰리에 칼리버 111(칼리버 110의 데이트 버전). 싱글 배럴로 10일을 구동하는 유일무이한 존재
사실 롱 파워리저브의 역사는 깁니다. 위와 같은 탁상시계에 사용되었을 정도면 이미 회중시계에도 사용되었을테고, 기본적으로 배럴이 크면 클수록 긴 구동이 가능하기에 덩치가 큰 괘종시계에 적용되었음은 물론이죠. 손목시계의 시대에 들어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집니다. 회중시계에 비해 무브먼트가 작아졌기 때문에 모든 부품이 작아졌고 배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손목시계에서는 8일씩 구동하는 시계를 별로 없었습니다. 2000년 초반만 해도 100시간 파워리저브면 상당히 긴 편에 속했죠. 여기서 변화는 쇼파드와 예거 르쿨트르가 주도합니다. 쇼파드의 L.U.C 시리즈중 수동과 예거 르쿨트르의 사각형 무브먼트 칼리버 8XX 시리즈가 일주일 이상 움직이는 무브먼트를 선보이게 된 후, 블랑팡, 파네라이 등에서 롱 파워리저브가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2000년 중후반부터는 바야흐로 롱 파워리저브의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파워리저브를 길게 가져갈 수 있게 된 기본은 배럴의 개수를 늘리는 데에 있습니다. 2개, 4개씩 사용하다가 병렬, 직렬을 혼합한 3개의 형태도 나오게 되는데, 이와 반대로 싱글 배럴로 7일 구동을 했던 뚝심의 IWC 칼리버 5000 시리즈도 있었죠. (현재는 더블 배럴로 변경) 랑에 운트 죄네는 더블 배럴로 무려 31일을 구동하는 랑에 31일을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두 개의 배럴로 부족해 배럴의 지름을 엄청나게 키웠고 그로 인해 무브먼트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한 달을 움직이기 위해 길고 단단한 메인스프링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크라운으로 돌리는 대신 키(Key)를 이용하고 토크 조절을 위해 콘스탄트 포스 메커니즘을 넣지 않으면 정확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웠죠. 랑에 31은 8데이즈를 넘어선 아주 긴 시간의 파워리저브를 갖춘 시계의 등장을 촉발시켰고 잠시 경쟁에 돌입했으나, 요즘은 7일이나 8일 정도의 실용적인 선에서 롱 파워리저브가 정리되는 편입니다. 가장 최근에 선보인 오리스의 칼리버 110도 10일 파워리저브로 7,8일 범주를 넘지만 한 달씩 구동되는 수준은 아니니까요.
해밀턴 카키 네이비 프로그맨. 80시간 파워리저브의 칼리버 H-10이 탑재되어 있다
미도 바론첼리 크로노미터 Si. 역시 80시간 파워리저브의 칼리버 80을 탑재한다
롱 파워리저브의 등장했지만 일반적인 파워리저브는 30시간 후반에서 40시간 초반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주 5일 근무가 세계적으로 정착되면서 이에 따라 60시간 내외로 파워리저브를 갖출 수 있도록 새로운 무브먼트에는 묵시적인 새 기준이 정해졌죠. 하이엔드, 혹은 인 하우스에서 내놓는 신형 무브먼트를 탑재한 시계에서는 이 혜택을 누릴 수 있고, 실용 측면에서도 중요한 부분인데요. 범용 무브먼트에서는 이를 누리기가 어렵죠. 에버하르트(Eberhard)처럼 ETA의 칼리버 7001을 수정해 8데이즈로 변경하는 예는 있지만 사실상 이것은 인 하우스에 가까워지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구세주가 있다면 ETA를 보유한 스와치 그룹과 ETA를 전면적으로 탑재하는 라도, 해밀턴, 미도, 티쏘 같은 브랜드들입니다. ETA가 새로 개발한 무브먼트의 수혜를 입기 때문인데, 파워리저브 측면에서 본다면 티쏘에서 처음 탑재한 파워매틱 80이 대표적입니다. ETA의 칼리버 넘버링으로는 C07.111으로 해밀턴에서는 H-10으로 부르며 미도에서는 칼리버 80으로 부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80시간의 파워리저브가 가능한 거의 유일한 범용(?) 무브먼트로 넉넉한 구동시간의 장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요즘 ETA가 철저하게 그룹 외로는 신형 무브먼트의 공급을 하지 않고 있어 그룹 외 브랜드에서는 이 같은 매력을 즐길 수 없는 게 아쉽지만, 파워리저브의 평균이 점점 길이지고 있는 점은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