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코 매뉴팩처 방문기 Part. 1 -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 편
혹자는 세계 시계 산업의 헤게모니를 스위스가 쥐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아시아의 시계 맹주 세이코(Seiko)를 간과한 발언입니다. 130여년의 긴 세월 동안 100년이 넘는 시계 제조 역사와 노하우를 자랑하는 세이코는 유수의 스위스 시계 브랜드들과 견주어도 그 전통과 기술력에 있어 결코 뒤처짐이 없습니다.
유럽과 멀리 떨어진 지리적인 특수성 때문에 세이코는 창립 초창기부터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해왔고, 전통적으로 분업화가 발달한 스위스의 제조사들에 비해 모든 부품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만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공고한 자생력을 갖춘 진정한 매뉴팩처로 불릴 만한 세계의 몇 안되는 제조사 중 하나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후 1969년 세계 최초의 쿼츠 손목시계인 아스트론(Astron)을 발표하면서 수백년간 이어져 내려온 유럽의 시계 산업과 시계를 대하는 패러다임까지 완전히 전복시킴으로써 세이코는 세계적인 시계 브랜드로 발돋움할 수 있었고 손목시계의 대중화 면에서도 기여한 공은 지대합니다.
시계 산업의 변방인 극동아시아의 끝자락 일본에서 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무수한 성공 신화를 남긴 세이코. 그럼에도 세이코는 여느 유럽의 시계 브랜드들에 비해 자사의 제조 시설을 공개하는데 있어서는 그간 소극적이다 못해 다소 폐쇄적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기술의 올바른 전승을 중요시하고 전통적으로 손님(고객) 맞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일본인들 특유의 정서가 반영된 결과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세이코 미디어 익스피어리언스 첫날 미팅에서 환영 인사말을 건네고 있는 세이코 워치 코퍼레이션 상무이자 와코 총괄 디렉터인 키요코 니와사키(Kiyoko Niwasaki) 씨.
하지만 시대는 바야흐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세이코 역시 그간의 보수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탈피해 보다 적극적으로 자사의 시계와 그 안에 담긴 가치를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환으로 일본 내수용이었던 브랜드의 최상위 라인인 그랜드 세이코(Grand Seiko)를 글로벌 런칭한 2010년경부터 세이코는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자사의 주요 매뉴팩처 시설들을 세계 매체 및 일부 고객들을 대상으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세이코 미디어 익스피어리언스(Seiko Media Experience)'로 불리는 매뉴팩처 체험 프로그램이 그 대표적인 예로써, 각 나라별로 선별된 저널리스트들을 초청해 약 일주일간에 걸쳐 세이코의 대표적인 매뉴팩처 시설들을 둘러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간 어느 스위스 시계브랜드에서도 전례가 없는 매우 파격적인 체험 프로그램으로 자사의 제조 시설과 기술력에 대한 상당한 자신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인해 다양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현 시대에 발맞춰 브랜드의 숨은 가치를 보다 널리 알리겠다는 세이코의 갈증이 담긴 행보인 셈입니다.
전 세계의 주요 매체와 기자만이 참여할 수 있는 '세이코 미디어 익스피어리언스 2015'에 타임포럼 역시 올해 국내 매체 중 유일하게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이코와 관련해 국내 매체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가장 내밀하고 깊은 정보와 다양한 현장 사진이 담긴 글을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회원님들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비단 한 개인(필자인 저 자신)의 시선으로 본 탐방기에 그치지 않고 타임포럼의 아카이브 자료로 남아 세이코에 관심있는 많은 분들께 널리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세이코 워치 코퍼레이션(SWC) 대외 홍보 & 광고 부서(PR 그룹)의 제너럴 매니저 노보루 미야데라(Noboru Miyadera) 씨가 마이크를 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매뉴팩처 시설 탐방에 앞서 세이코 그룹(Seiko Group)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돕는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1881년 당시 18살의 시계 수리공 킨타로 핫토리가 핫토리 시계점을 연 것으로 시작하는 세이코의 역사는 1892년 일본어로 '정확한 집'을 뜻하는 세이코샤(Seikosha)라는 이름의 시계 공장을 설립해 벽시계를 제조하면서 본격적인 시계 제조사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1937년 세이코샤의 시계 부문이 따로 분리돼 다이니 세이코샤(Daini Seikosha, 두번째 세이코사라는 뜻으로 현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주식회사 SII의 전신)가 설립, 1942년 시계 외에 프린터, 프로젝터, 센서, 초정밀 반도체 등을 연구하는 다이와 코교(Daiwa Kogyo, 현 세이코 엡슨 코퍼레이션의 전신)가 설립되며, 1947년 소매 부문을 따로 분리해 주식회사 와코(Wako)를(긴자의 백화점과 클락 타워는 1932년 설립), 1949년 도쿄 증권거래소에 세이코를 상장시키고, 1959년 1944년부터 공존해온 다이니 세이코샤와 스와 공장이 분리되며, 다이와 코교와 병합한 스와 세이코샤(Suwa Seikosha)는 1985년 세이코 엡슨 코퍼레이션(Seiko Epson Corporation)으로 사명이 변경되고, 1987년 주요 시계 제조 시설인 다이니 세이코샤는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주식회사(Seiko Instruments Inc.)에 흡수 통합, 2001년 세이코 워치 코퍼레이션(Seiko Watch Corporation)을 설립해 시계 사업을 따로 분사해 지주회사 형태로 변경하고, 2007년 세이코 홀딩스 코퍼레이션(Seiko Holdings Corporation)을 설립해 기존 세이코 홀딩 컴퍼니의 뒤를 잇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세이코는 130여 년의 긴 역사만큼이나 매우 복잡하고 체계적인 조직 구조를 갖춘 대기업인데요. 이러한 기업 형태 역시 스위스 전통의 제조사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므로 세이코를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복잡한 조직 체계를 비교적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세이코 그룹의 뿌리이자 기둥인 세이코 홀딩스 코퍼레이션(SHD) 산하에는 시계 제조 업체인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주식회사(SII)와 시계 사업 분야를 총괄하는 세이코 워치 코퍼레이션(SWC)이 각각 속해 있고, 별도로 도쿄 긴자의 중심가에 위치한 초호화 백화점인 와코(Wako)와 백화점 관련 사업부, 세이코 클락, 세이코 솔루션 등이 속해 있습니다. 그외 세이코 엡슨 코퍼레이션(SEC)은 별도의 지주회사로 분리돼 있습니다만, 시계 사업 분야는 세이코 워치 코퍼레이션(SWC)과 공조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업부와 산하 업체들 중에서도 세이코 시계를 제조하는 곳은 세이코 인스트루먼트(SII)와 세이코 엡슨 코퍼레이션(SEC) 이 두 회사에 속해 있는데요. 세이코 미디어 익스피어리언스 프로그램을 통해서는 바로 이 두 큰 회사의 주요 시설을 탐방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위 첨부 프레젠테이션 자료 이미지 참조).
그중에서도 세이코 손목시계의 본산인 다이니 세이코샤를 계승한 세이코 인스트루먼트(SII) 산하의 매뉴팩처를 둘러보는 것으로 본격적인 탐방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이코 인스트루먼트(SII) 산하의 시계 제조 시설 중 가장 중요한 매뉴팩처는 수도인 도쿄에서 무려 540km 가량 떨어진 혼슈(본주) 북부 이와테(Iwate) 현의 중소도시 모리오카(Morioka) 시에서도 시즈쿠이시(Shizuku-ishi)라는 작은 마을 한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세이코 인스트루먼트(SII) 산하의 매뉴팩처 시설(모리오카 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세이코는 지명을 본따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로 통칭함)로 향하기 위해 세이코 미디어 익스피어리언스(SME) 팀 전원은 도쿄역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JR 라인의 불릿 트레인(Bullet Train, 흔히 신칸센으로 불리는 초고속열차)을 타고 목적지인 모리오카 역으로 향합니다. 우리나라에도 KTX가 있긴 하지만, 신칸센은 체감상 더욱 빠르게 느껴지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서울-부산'간 거리 보다 먼 '도쿄-모리오카'간 약 540Km 거리를 단 2시간여 만에 도달할 수 있게 합니다. 점심은 이동 중에 간단히 도시락으로 해결했습니다.
인구 약 300만명 가량이 살고 있는 모리오카 시는 산이 주변 지형을 감싸고 있는 일종의 분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예부터 비옥한 토지와 뚜렷한 기후 변화 덕분에 쌀(농가 50% 이상 차지), 낙농업, 과일(특히 사과) 재배 등이 발달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모리오카 시내에서도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이와테 산은 제2의 후지산 혹은 옛 지명인 '남부(南部)'를 본따 '남부 후지'라고 불릴 만큼 수려한 풍광과 청정 자연 지구로도 일본 관광객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근처에는 스키장과 온천도 많이 눈에 띄고요.
세이코가 일본 여러 지역 중에서도 굳이 도쿄 본사에서 수백 킬로나 떨어진 이곳에 주요 시계 매뉴팩처 시설을 건립한데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줄 압니다. 흥미로운 점은 본사 직원들도 이와 관련해 뚜렷한 배경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어렵지 않게 짐작하기를, 모리오카는 예부터 천혜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문화와 예술, 다양한 종류의 전통 공예가 발달해왔다고 합니다. 지방 특산물이기도 한 섬세한 세공 장식이 가미된 철기, 은기를 비롯해, 전통 옻칠(우루시 및 마키에 기법)로 마무리한 다기, 식기 등은 특히나 유명하고, 이러한 전통 공예 기술 및 장인 정신이 지역민들 사이에 깊게 뿌리내린 덕분에 세이코가 추구하는 정밀 시계 제조를 위한 터전으로도 적합했으리라 사료됩니다.
모리오카 역에서 시즈쿠이시 초(마을) 강변을 따라 약 15분 정도를 이동하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SII) 산하의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Morioka Seiko Instruments Inc.) 건물을 만나게 됩니다. 자작나무가 우거진 시적인 풍광의 장소에 위치해 있는데, 정면에서 봤을 때는 단독 건물처럼 단출해 보이지만 측면을 조금만 둘러보면 그 뒤로 꽤나 넓은 부지에 낮은 건물들이 쭉 길게 늘어서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이코를 대표하는 매뉴팩처 시설인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는 1970년 이곳에 설립됐습니다. 이듬해부터 여러 종류의 시계 부품들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1972년부터는 별도로 기계식 시계만을 위한 부품 제조 시설을 구축하고, 1980년부터는 첨단 쿼츠 시계용 부품들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1986년 이미 연간 1천만 개의 시계를 제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그후 2004년부터는 모리오카 세이코 내에 고급 기계식 시계 조립 및 조정에 특화된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를 마련했으며, 크레도르, 그랜드 세이코, 갈란테, 프로스펙스 일부 프로페셔널 다이버(마린마스터) 등 브랜드 최상위 모델들이 이곳에서 완성되게 되었습니다.
건물 내부에 들어서면 로비에서부터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가 어떠한 곳이고, 이곳에서 어떠한 부품들과 시계를 제조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별도의 쇼케이스가 마련돼 있었습니다. 쿼츠 및 기계식 무브먼트의 분해도와 함께 각 부품들을 하나하나 배열 전시한 모습에서 세이코 혹은 일본인들 특유의 치밀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로비 한쪽에 전시된 시계들 중에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시계들도 있습니다. 미키마우스를 연상시키는 대형 테이블 클락과 크레도르의 울트라씬 드레스(U.T.D) 모델이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크레도르에 탑재된 인하우스 수동 6870 칼리버는 2mm가 채 되지 않는 얇은 두께로도 유명합니다.
이제 본관 2층 회의실로 이동해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및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듣는 프레젠테이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앞서 로비에 놓여진 부품용 쇼케이스에서 보신 바와 같이 모리아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에서는 쿼츠용 배터리에서부터 배터리 커넥션 회로, 코일(코퍼 와이어), 서킷 블록, 트레인 휠 브릿지, 각종 플라스틱 부품들(인젝션 몰딩 머신 구축)은 물론, 다양한 사이즈의 기어, 스크류, 피니언, 레버, 와인딩 스템, 메인 플레이트, 문자판(다이얼), 밸런스, 이스케이스프먼트, 메인 스프링, 헤어스프링 등이 제작되고 있으며, 이렇게 제작된 부품들의 어셈블리 및 피니싱까지 이곳에서 완성됩니다. 그리고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에서는 고급 기계식 시계의 조립 및 최종 검수가 진행되지요.
이렇듯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는 완벽하게 수직 통합적인 매뉴팩처(Fully Vertically Integrated Manufacture)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자사 시계에 사용되는 모든 부품은 물론, 이러한 부품들을 생산하는 각종 장비들까지 인하우스 기기를 사용하는 어쩌면 세계 유일의 매뉴팩처이기도 합니다.
제조 형태나 규모 자체는 스위스 유수의 매뉴팩처들 가령, 롤렉스, 스와치 그룹(ETA), 파텍필립, 예거 르쿨트르와도 비견될 수 있을 테지만, 각종 기기 및 마이크로 툴(도구), 자동화 센서와 로봇, 몰딩 머신, 프레스, 이동 선반 조차도 자사 개발 장비를 사용하는 업체는 세이코 뿐입니다.
고급 기계식 라인인 그랜드 세이코 모델(9S 시리즈)에 사용되는 MEMS(Micro Electro Mechanical System) 테크놀로지로 완성한 이스케이프 휠과 팔렛 포크. 실리콘 베이스에 일렉트로이드(Electrode, 전극)을 깔고 그 위에 SU-8로 불리는 레진(Resin) 소재를 덧입힌 다음 방사광을 활용한 엑스레이를 투과해 몰드를 만들고, 분해된 여분을 제거한뒤 니켈 소재를 들이부어 다시 전기 주조(Electroforming)방식으로 완성한 MEMS 이스케이프 휠과 팔렛 포크는 일반적인 CNC 머신으로 제작한 부품에 비해 정밀하게 형태를 만들 수 있으며, 무게가 가볍고 가공된 단면이 스무스해 마찰 계수에 대응하며, 적은 양의 윤활유도 오래 보존하는 효과를 갖고 있습니다.
MEMS 성형은 마이크로머시닝(정밀 가공) 기술로 대변되는 LIGA((LIthographie, Galvanoformung, Abformung) 공정에서 응용한 것으로 세이코의 자체적인 엔지니어링 기술력으로 완성한 것입니다. 독자적인 MEMS 테크놀로지를 통해 여느 매뉴팩처와는 차별화된 노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스와치 그룹이나 파텍 필립, 롤렉스처럼 실리콘계 신소재인 실리시움이 아닌 전통적인 니켈 소재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브랜드의 다른 지향점도 볼 수 있습니다.
세이코는 1940년대부터 이미 자사 제조 스프링을 사용해 왔습니다. 스프링 제조의 레시피(?)는 스위스나 일본의 그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자체 시설 내에서 완전한 인하우스 스프링을 제조할 수 있는 업체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습니다.
세이코는 코발트-니켈 베이스에 몰디브덴, 철 등의 미량 원소를 독창적으로 배합한 스프론(Spron)으로 불리는 인하우스 스프링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 초반 자체 개발 스프링 소재의 필요성에 눈을 뜨고 토호쿠 대학 산하 소재 연구 기관과의 오랜 파트너십을 통해 스프론 200(헤어스프링, 1940년대 개발)과 스프론 100(메인스프링, 1950년대 개발), 스프론 510(메인스프링, 1997년 개발), 스프론 610(헤어스프링, 2008년 개발), 스프론 530(메인스프링, 2009년 개발) 등을 차례로 개발하게 되었지요. 특히 새로 개발된 신형 스프론 소재인 스프론 610 헤어스프링은 스프링 자체에 10,000 A/m 정도의 안티-마그네틱(항자) 성능과 내구성을 갖추고 있으며, 애초 하이비트용으로 개발된 스프론 530 메인스프링은 더욱 길고 얇으면서 혁신적으로 탄성과 내구성을 비약시켜 시계의 등시성에 적극 기여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이번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매뉴팩처 투어 일정에서는 MEMS 성형과 스프론 제조 공정까지는 볼 수 없었습니다. 독창적인 인하우스 공정으로 완성되는 부품들인지라 아직까지는 대외비로 감추고 있는 것인데요.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이러한 부품들이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시설 내부에서 생산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은 정보가 되었습니다.
이어 고급 기계식 무브먼트(주로 9S 시리즈)의 메인 플레이트와 브릿지가 제조, 가공되는 시설을 둘러봤습니다. 브라스 소재를 바탕으로 우선 틀이 만들어지고 주얼홀과 각종 기어들이 위치할 자리에 펀칭 및 가공, 최종 피니싱까지 두 개의 섹션으로 구획된 큰 방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머시닝, 절삭, 단면 가공, 로듐 도금, 심지어 피니시까지 모든 공정은 자동화돼 있으며, 각 기기 마다 담당 엔지니어가 컴퓨터 장비를 보며 작동 상태를 체크하고 있습니다.
기어 측면과 피니언, 피봇을 다듬는(피니싱) 모습을 보여주는 방 앞에서... 섬세한 손길이 요구되는 작업에는 주로 여성들이 동원됩니다.
또 다른 프리-어셈블리룸에서는 밸런스를 제조 가공하고 있었습니다. 전반적인 공정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1차 완성된 밸런스를 다듬는 과정은 볼 수 있었는데요. 플라스틱 소재의 틀에 로봇의 팔을 연상시키는 기계가 점을 찍듯 하나하나 완성된 밸런스를 옮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성형된 팔렛 포크의 가공 및 주얼을 세팅하는 작업이 이뤄졌습니다.
다음 방으로 이동하기에 앞서 기자단은 모두 하얀 가운과 캡을 챙겨 입고, 발에는 버선 같은 것을 덧입혔습니다. 정밀한 부품들을 다루는 공간이기에 외부의 먼지나 불순물이 침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지요.
밸런스에 헤어스프링을 조립하는 공정이 이뤄졌습니다. 0.02mm 두께의 섬세한 헤어스프링을 원형의 고리에 연결시킨 후 이를 밸런스에 접합시키는 것인데, 이를 위해 고안된 특수한 기기가 따로 마련돼 있습니다(위 사진 참조). 틀에 1차 조립된 밸런스와 스프링을 위치시킨 후 기기 옆의 빨간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틀이 트레이를 따라 안으로 이동하고 다시 나왔을 때 접합이 되는 식입니다.
프리-어셈블리룸 내 다른 섹션에서는 주얼, 레귤레이터, 로터 등이 조립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갔을 때는 그랜드 세이코 9S 칼리버의 부품들이 조립되고 있었으며,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기민한 손놀림으로 작업하는 여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편,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에는 골드, 실버, 브론즈 크게 3등급으로 나뉜 마이스터들과 R&D 분야의 엔지니어링 & 프로덕션 엔지니어링 전문가로 구성된 3등급의 스페셜리스트들이 존재합니다. 이로써 2015년 현재 기준 총 7명의 마이스터와 70명의 스페셜리스트들이 교대로 근무하고 있는데요.
덧붙여 이와테 현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2006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이와테 메캐니컬 워치메이커 스킬 어세스먼트 시스템'을 통해 발굴한 젊고 재능있는 워치메이커들을 별도로 받아들여 자체적인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거쳐 능력에 따라 차등 배정하고 있습니다.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로 향하는 복도 벽면에는 세이코의 가장 숙련된 워치메이커들인 골드 마이스터 사쿠라다 마모루(Sakurada Mamoru) 씨와 마스터 인그레이버인 테루이 기요시(Terui Kiyoshi) 씨의 모습이 담긴 대형 사진과 이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옐로우 리본 훈장도 나란히 전시돼 있습니다.
이제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의 심부이자 그랜드 세이코를 위한 자동 9S 시리즈 칼리버, 크레도르를 위한 울트라씬(초박형) 수동 98 시리즈 칼리버, 일본 내수용 브라이츠(아난타)와 갈란테 등 일부 모델에 탑재되는 수동 혹은 자동 6S 시리즈 칼리버, 프로스펙스 고급 모델에 탑재되는 자동 8L 시리즈 등이 최종 조립, 조정, 검수되는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Shizuku-ishi Watch Studio) 내부를 함께 둘러보시겠습니다.
참고로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는 한자식으로는 위 사진 보시듯 '우석고급시계공방(雫石高級時計工房)'으로 표기됩니다(우석은 시즈쿠이시 지명을 간체화한 것임).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를 들어가기에 앞서 기자단은 양쪽에서 압축된 바람이 쏟아져 나오는 더스트 프루프 챔버를 관통해야만 했습니다. 고급 기계식 무브먼트와 시계가 조립되는 공간이기에 외부의 먼지와 불순물이 침투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입구 바닥에는 끈끈이 같은 패드도 마련돼 있습니다.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의 마이스터 및 스페셜리스트들은 저마다의 체격에 따라 높이와 동선이 고려된 원목 테이블에서 철저히 분업화로 작업에 임했습니다. 어떤 이는 하루 종일 묵묵히 무브먼트 조립만 하고, 어떤 이는 무브먼트 주유(오일링)만 하고, 어떤 이는 다이얼에 인덱스와 핸즈만 세팅하고, 어떤 이는 케이싱(케이스에 무브먼트를 조립하는 작업)만 하고, 어떤 이는 조립된 시계의 조정만 하고, 어떤 이는 방수나 압력 테스트만 하는 식입니다.
참고로 위 사진 마지막에서는 호로이와 마사노부 씨가 그랜드 세이코 케이스에 9S65 자동 칼리버를 케이싱하고 있습니다.
밸런스의 헤어스프링을 정밀 조정하고 있는 브론즈 마이스터 이토 츠토무(Ito Tsutomu) 씨.
밸런스 중앙에 정확하게 헤어스프링 축이 위치해야 하며, 스프링이 마치 호수에서 파장이 일어나듯 일정한 간격으로 펼쳐져 있어야만 등시성에도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토 씨는 이러한 매우 까다롭고 섬세한 손길이 요구되는 조정 작업을 매번 빠짐없이 하고 있으며, 그 결과 스위스 크로노미터 인증 기준보다 엄격한 그랜드 세이코 규격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케이싱 전 무브먼트의 오차를 테스트하고 있는 한 스페셜리스트.
조립된 시계에 가하는 진공 압력 테스트.
케이싱에 앞서 전반적인 상태 점검을 대기하고 있는 프로스펙스 마린마스터 프로페셔널 1,000m 다이버 신제품들.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방문 일정 내내 가이드 역할을 해준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디렉터 료지 타카하시(Ryoji Takahashi, 사진 좌측 인물) 씨가 세이코 프로스펙스 마린 마스터 프로페셔널 1,000m 다이버 모델의 방수 및 수압 테스트를 지켜 보고 있습니다.
위 사진 보시다시피 트레이에 시계를 올려 놓고 물이 찰랑거리는 전용 튜브 안에 넣어 밀봉한 뒤 실제 잠수 상황과 유사한 모의 상황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듯 보이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다이버 시계의 방수 사양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무브먼트 조립에 한창 몰두하고 있는 이 워치메이커에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 내에서 울트라씬 수동 칼리버인 68시리즈를 조립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인 실버 마이스터 사이토 카츠오(Saitou Katsuo) 씨입니다. 골드 마이스터인 사쿠라다 마모루의 후계자로 올해 벌써 25년이 넘는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2mm가 채 되지 않는 동전 두께의 무브먼트를 완벽히 조립하기란 오랜 내공과 타고난 인내가 없이는 불가능한데요. 사이토 씨는 기자단이 웅성거리며 지켜보는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무브먼트를 조립하고 있었습니다.
기자단을 향해 환하게 웃어보이는 여유까지...
일본 내수용 최상위 라인인 크레도르에 탑재되는 68 시리즈의 크기와 두께가 어느 정도인지를 동전과 함께 직접 비교해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자동 9S65 칼리버와의 비교도 인상적입니다.
이제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를 빠져 나와 공방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대기실에서 그랜드 세이코 제작 관련한 공식 필름을 감상합니다. 앞서 보았던 대부분의 작업들이 하나의 영상 안에 잘 녹아 있기 때문에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의 시계 제조 공정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관련 영상은 유투브(Youtube)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첨부한 위 영상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번 투어에서 직접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스프론 제조 과정이 영상 속에 등장합니다. 0.02mm 두께의 얇은 헤어스프링이 어떻게 제조되는지 확인해 보세요.
영상을 감상한 뒤 옆 방을 지나치는데, 이곳에서는 그랜드 세이코와 프로스펙스 마린마스터의 브레이슬릿이 시계 본체에 결합되고 있었습니다. 출고에 앞서 최종 검수 역시 이곳에서 진행됩니다
숨가쁘게 진행된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시설 투어는 여기까지 마무리하고 기자단은 모리오카 외곽에 위치한 일본 전통식 료칸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인 11월 17일 오전에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를 다시 방문해 이번에는 그랜드 세이코와 관련한 길고 긴 프레젠테이션에 참여했습니다.
그랜드 세이코는 부품 제조서부터 어셈블리(조립), 어저스트먼트(조정), 런닝 테스트, 파인 튜닝(오차 조정 포함), 그랜드 세이코 인스펙션(Inspection), 케이스 어셈블리, 파이널 인스펙션(최종 검수)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그랜드 세이코 퀄리티를 준수하기 위해 최소 1,000시간이 넘는 시간을 들입니다.
또한 모든 그랜드 세이코 시계에 3가지 온도에서의 작동 테스트와 6 포지션 자세차 테스트, 17일간의 작동 테스트를 준수하며, 스위스 크로노미터 인증 기준(-4 ~ +6초)보다 까다로운 일일 허용 오차 -3 ~+5초 범위 내로 자체 조정을 거듭한 뒤 이를 증명하는 그랜드 세이코 품질 인증서와 함께 시계를 제공합니다. 평균 한화로 약 1천만원대 미만 시계에까지 이 정도의 엄격한 인증 기준을 적용한 제조사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세이코 미디어 익스피어리언스 2015 투어 내내 동행한 세이코 워치 코퍼레이션의 대외 홍보 & 광고부 소속 시니어 매니저 케이코 나루세(Keiko Naruse) 씨가 신형 9S 칼리버에 기존 매직 레버 대신 새롭게 적용된 복층 리버서휠(Reverser wheel) 형태의 와인딩 메커니즘의 특징과 장점에 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리버서휠은 그 구조 자체가 복잡하기 때문에 매직 레버에 비해 제조 비용이 많이 들며, 가공 및 피니싱도 어려운 고급 부품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보다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와인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랜드 세이코가 지향하는 실용 시계의 최고봉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반면 파네라이와 까르띠에 같은 스위스 메이커들이 역으로 세이코식의 매직 레버를 새 와인딩 시스템으로 적용하고 있는 추세와 비교하면 재미있습니다.
신형 9S 칼리버의 구조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해 모리오카 세이코 측은 9S65 자동 칼리버의 부품 샘플을 각 기자단에게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위 사진을 보면 우측 가장 하단에 새로운 리버서휠 부품을, 좌측 하단에 MEMS 테크놀로지로 제작한 팔렛 포크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번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소속의 무브먼트 디자이너 히사시 후지에다(Hisashi Fujieda) 씨까지 멀리 도쿄 치바에서부터 발걸음해 세이코의 하이비트 시계의 역사와 그가 개발에 참여한 현행 9S85 칼리버의 장점, 신형 스프론(메인스프링 530)에 관한 깊이 있는 통찰을 공유해 주었습니다. 세이코 인스트루먼트에 2003년에 입사해 2006년부터 무브먼트 디자인에 참여한 그는 어린 나이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회사의 촉망을 가득 받고 있다고....
오전 내내 진행된 그랜드 세이코 관련 세미나를 뒤로 하고, 이제는 그랜드 세이코 현행 주요 모델을 직접 감상하고 착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됐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본 들여다 본 모델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좀처럼 보기 힘든 하이비트 36,000 스페셜 에디션인 SBGH020(옐로우 골드 버전)과 SBGH022(로즈 골드 버전)입니다. 9S85 칼리버 로터에 골드 라이온 메달리온이 멋스럽습니다.
전세계 600개 한정의 하이비트 36000 GMT 모델 SBGJ005입니다. 2014년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서 쁘띠 에귀유를 수상하며 그 가치를 더욱 널리 인정 받았지요.
올해 바젤월드서 선보인 그랜드 세이코 히스토리컬 컬렉션 62GS 골드 한정판(각 100개 한정)입니다. 1967년 제작된 그랜드 세이코 최초의 오토매틱 모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매력적인 시계이며, 특히 베젤이 없다시피한 독특한 케이스 형태와 4시 방향에 크라운을 위치시킨 점도 개성적입니다. 화이트 골드 버전인 SBGR091과 로즈 골드 버전인 SBGR094는 지난 9월 국내에도 출시돼 매장에서도 볼 수 있는 모델입니다.
이상으로 <세이코 매뉴팩처 방문기 Part. 1 - 모리오카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및 시즈쿠이시 워치 스튜디오 편>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랜드 세이코 쿼츠와 스프링 드라이브, 크레도르, 세이코 아스트론 등이 제작되는 나가노 시오지리에 위치한 세이코 앱슨 코퍼레이션과 신슈 워치 스튜디오에 관해 집중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Stay Tu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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