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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o

조회 10936·댓글 25

시간을 전통적인 시계처럼 회전하는 아날로그 핸드로 표시하지 않고, 숫자(뉴머럴)를 프린트한 회전 디스크를 이용해 작은 창(애퍼처)을 통해 표시하는 시계를 통칭해 흔히 점핑 디스플레이(Jumping display) 시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능이 주로 시(아워)를 표시하는데 활용되기 때문에 점핑 아워(Jumping Hour)라는 표현을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하는데요.  

점핑 아워 형태는 시간을 디지털 방식으로 표시하는 시계가 등장하면서, 다시 말해 캘린더를 개별 창으로 표시하는 시계의 등장과 함께 출현한 일종의 변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느 캘린더와 달리 60분 단위로 회전 디스크를 구동해야 하기 때문에(이때 많은 토크가 손실됨) 일반 기계식 시계 설계에 비해 에너지 전달(트랜스미션) 시스템에 관한 보다 면밀한 연구와 노하우가 요구되고, 이 때문에 점핑 아워는 대체로 컴플리케이션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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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제조된 오데마 피게의 첫 점핑 아워 손목시계와 회중시계 


점핑 아워의 정확한 등장 시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스위스 고급 시계제조사들 중에서 손목시계 형태로 가장 먼저 선보인 브랜드는 거의 이견없이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를 꼽고 있습니다. 오데마 피게는 1921년 자체 개발 수동 HPVM10 칼리버로 구동하는 점핑 아워 기능의 회중시계와 손목시계를 각각 첫 선을 보였습니다. 특히 사각형 케이스로 제작된 손목시계는 당시 시계업계에 유행하기 시작한 아르데코 사조의 영향을 반영한 것이었고, 점핑 아워 형태의 손목시계가 그 전에는 없었기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오데마 피게는 1920년대 중반까지 비슷한 형태의(점핑 아워와 어패처로 분을 표시하는) 손목시계를 계속 생산했고, 1929년에는 새로운 수동 칼리버와 함께 점핑 아워 및 아날로그 핸드로 분과 초를 각각 표시하는 시계도 선보이며 그 베리에이션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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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출시된 까르띠에의 탱크 아 기쉐 워치 


한편, 1928년 파리의 주얼러 까르띠에(Cartier) 역시 탱크 아 기쉐(Tank à Guichets)로 불리는 특유의 사각형 케이스에 점핑 아워 디스플레이를 갖춘 시계를 발표했을 정도이니(플래티넘과 옐로우 골드 버전으로), 당시 이러한 류의 시계가 일부 시계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제법 화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 까르띠에에 사용된 무브먼트는 르쿨트르(LeCoultre, 예거 르쿨트르의 전신)로부터 공급받은 것으로, 점핑 아워 기능을 갖춘 손목시계용 무브먼트 제조 기술이 당시 오데마 피게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음을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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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데마 피게의 줄스 오데마 미닛 리피터 점핑 아워 스몰 세컨드 플래티넘 & 핑크 골드 버전 


다시 오데마 피게로 돌아가면, 이들은 현재까지 꾸준히 점핑 아워 시계를 제작해왔습니다. 2007년경에는 기존의 스트라이킹 기능 무브먼트(미닛 리피터)에 점핑 아워를 접목한 새로운 모델을 클래식 라인인 줄스 오데마(Jules Audemars) 컬렉션을 통해 선보였으며, 이후 오픈워크(스켈레톤) 가공한 베리에이션 한정판 모델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데마 피게가 점핑 아워 손목시계의 개척자에 해당한다면, 점핑 아워를 현대의 시계애호가들에게 가장 널리 알리고 매력적으로 어필한 사람 및 브랜드는 제랄드 젠타(Gérald Genta)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열 오크, 노틸러스, 인제니어 등을 낳은 산파로서, 20세기 최고의 시계 디자이너로 통하는 故 제랄드 젠타(1931-2011)는 월트 디즈니의 대표적인 만화 캐릭터(미키 마우스, 도날드덕 등)를 앞세운 일련의 점핑 아워 & 레트로그레이드 미닛(혹은 바이-레트로) 시리즈로 1990년대 중후반 시계애호가들에게 뜻밖의 즐거움을 안겨줬습니다. 다이얼 상단 혹은 하단에 점핑 아워로 시를 표시하고, 다이얼 중앙에 위치한 미키 마우스의 손가락이 레트로그레이드로 작동하며 분을 가리키는(이때 손의 움직임이 골프, 야구 등 스포츠를 연상시키는 형태도 있음) 시계들은 확실히 전통적인 손목시계 디자인에서는 보기 힘든 독창적인 것이었고, 그 특유의 키치적인 매력으로 젊은 시계매니아들을 사로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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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제작, 출시된 제랄드 젠타의 미키 마우스 점핑 아워 시계 ⓒ Chris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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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출시된 제랄드 젠타의 점핑 아워 바이-레트로 시계 ⓒ Sotheby's


이후 2010년 제랄드 젠타가 다니엘 로스와 함께 불가리(Bulgari)에 완전히 인수, 합병되면서 제랄드 젠타 컬렉션의 가장 시그너처라 할 수 있는 점핑 아워 & 바이-레트로 형태의 시계들도 자연스럽게 불가리의 하이엔드 컬렉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특히 옥토 바이-레트로(Octo Bi-Retro) 시리즈는 젠타의 DNA를 완벽히 흡수하면서 불가리만의 고급스러움을 융합해 발표와 동시에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시계들은 진지한 워치 매뉴팩처로 도약하던 불가리의 시계업계에서의 바뀐 위상을 대변하는 새로운 인장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젠타의 유산을 바탕으로 불가리는 어쩌면 현재 업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점핑 아워 시계를 선보이는 제조사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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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출시된 불가리의 옥토 모노-레트로그레이드(Octo Mono-Rétrograde) 스틸 & 핑크 골드 신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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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출시된 불가리의 빠삐용 아워 소탕트(Papillon Heure Sautante) 화이트 골드 신제품 
점핑 아워와 제품명처럼 마치 나비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독창적인 레트로그레이드 미닛 핸드(원더링 미닛 핸드로도 불림)로 
다이얼 중앙에 분을 표시하는 시계로, 앞서 본 젠타처럼 다니엘 로스의 유산을 창의적으로 잘 계승한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점핑 아워 시계는, 가성비의 제왕 오리스(Oris)의 아뜰리에 점핑 아워(Artelier Jumping Hour)입니다. 

몇 개의 자동 베이스를 바탕으로 제법 다양한 기능의 라인업을 구성하고 있는 오리스답게 점핑 아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보통 점핑 아워 기능하면 앞서 열거한 몇몇 고급 시계제조사들 외에, 미들레인지에서는 생각나는 시계가 그리 많지 않은데요. 오리스는 한화로 약 3~4백만 원대에 신뢰할 만한 웰메이드 점핑 아워 시계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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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뜰리에 점핑 아워는 40.5mm 직경의 스틸 케이스에 기요셰 마감한 미니멀한 실버톤 다이얼이 시선을 끌며, 무브먼트는 셀리타 자동 베이스(SW 300-1)에 뒤부아 데프라의 컴플리케이션 모듈(DD 14400)을 얹어 수정한 오리스 917 칼리버를 탑재했습니다. 투명 케이스백을 통해서 오리스 특유의 레드 로터를 사용한 무브먼트를 감상할 수 있으며, 가죽 스트랩 외에 스틸 브레이슬릿 버전으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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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점핑 아워 시계는 시간을 표시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나름대로 탈피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조금은 낯섦 때문에 흥미를 느끼기 쉽지만 그 종류가 또 제한적이기 때문에 시계애호가들에겐 애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점핑 아워 시계를 단편적이나마 관련 컬럼을 통해 살펴봤습니다. 여러분들은 점핑 아워 시계를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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