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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F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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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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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로 제어하는 공작 기계와 자동화 설비, 전통적인 금속제 밸런스 스프링의 지위를 위협하는 실리콘 부품, LIGA와 같은 초정밀 가공 기법까지. 화려한 기술로 빚어낸 최신 무브먼트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일정하고 정확한 성능을 뽐냅니다. 여기에 브랜드만의 정체성이 담긴 터치와 예술적 감성을 더했으니 21세기 워치메이킹씬은 그야말로 인하우스 무브먼트 춘추전국시대나 다름 없습니다. 당연히 개발된 지 십 수년이 지난 무브먼트들은 작금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거나 성능이 뒤쳐진다는 이유로 퇴출되기 일쑤입니다. 브랜드의 뿌리나 정체성과 긴밀하게 얽힌 특별한 경우라면 부품을 교체해 성능을 개선하거나 문제점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수명을 연장시키기도 합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데뷔한 지 반 세기가 지나도록 은퇴는커녕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며 노익장을 과시하는 무브먼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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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버 321, 칼리버 CH 27-70, 칼리버 1142, 칼리버 533.3. 시계에 진심인 분이라면 숫자를 보고눈치 챌 수 있을 겁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무브먼트입니다. 늘 그렇듯 이야기는 스위스 워치메이킹의 심장 주 계곡에서 시작합니다. 1884년 워치메이커 알프레드 루그린(Alfred Lugrin)은 무브먼트를 생산하는 공방을 설립합니다. 사명은 설립자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루그린으로 지었지만 훗날 회사를 대표하는 브랜드명이자 애호가들에게 익숙한 르마니아(Lemania)로 바뀌게 됩니다. 르마니아가 두각을 드러낸 분야는 컴플리케이션 중에서도 크로노그래프였습니다. 헤게모니가 손목시계로 넘어가고 계측이 요구되는 툴 워치의 수요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르마니아도 수혜를 입었습니다. 작은 공방에서 시작한 르마니아는 어느새 제법 규모가 큰 에보슈 무브먼트 제조 업체로 성장합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르마니아는 물론이고 스위스 시계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1930년 오메가와 티쏘는 합병을 감행하고 스와치그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SSIH(Socièté Suisse pour l’Industrie Horologère S.A.) 연합을 결성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32년 르마니아까지 SSIH에 합류하면서 대서사시의 서막이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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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1957년 최초의 스피드마스터 Ref. 2915와 (아래)오리지널 칼리버 321

르마니아는 오메가를 비롯한 SSIH 소속 브랜드들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무브먼트 공급에 전념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1941년, 르마니아의 무브먼트 개발을 진두지휘한 테크니컬 디렉터 알버트 피게(Albert Piguet)는 핸드와인딩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제작합니다. 칼리버 넘버는 CH 27 CHRO 17P와 CH 27 CHRO C12 17p였습니다. 전자는 두 개의 서브 다이얼을, 후자는 12시간 카운터를 포함한 세 개의 서브 다이얼을 얹을 수 있는 무브먼트였습니다. 칼리버 넘버는 직경 27mm, 크로노그래프, 17개의 주얼, 12시간 카운터의 유무를 뜻했습니다. 옛 무브먼트들이 대게 그러했듯 이 무브먼트 역시 직관적인 이름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CH 27 CHRO C12는 1942년 출시 이래 개선을 거듭하면서 2310이라는 넘버를 다시 부여 받습니다. 그리고 1949년 오메가의 뜻에 따라 개명 신청을 하니 이름하여 칼리버 321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시다시피 불세출의 걸작 스피드마스터의 초대 엔진으로 발탁되어 만천하에 이름을 알립니다. 그 뒤 오메가가 칼리버 321을 대체할 후임으로 칼리버 861을 영입하면서 스피드마스터의 전설을 홀로 써내려 갈 줄 알았던 칼리버 321은 문워치 신화의 토대를 닦은 채 칼리버 861에 자리를 내주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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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칼리버 2310은 밸주, 비너스 등과 함께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의 한 축을 담당하며 20세기 손목시계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호황도 잠시, 동방에서 홀연히 등장한 쿼츠 시계는 기계식 시계가 쌓아 올린 철옹성을 무너뜨렸습니다. 파고를 넘지 못한 르마니아는 피아제에 인수된 뒤 새로운 르마니아라는 뜻의 누벨 르마니아(Nouvelle Lemania)로 사명을 변경하며 심기일전하지만 마침내는 브레게와 함께 스와치 그룹에 인수되어 매뉴팩처 브레게로 남게 됩니다. 그렇게 르마니아는 잊혀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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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텍 필립 Ref. 5070과 칼리버 CH2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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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쉐론 콘스탄틴 히스토리크 콘 드 바슈와 칼리버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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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게 칼리버 533.3

암울했던 시기를 지나 기계식 시계 업계에 광명이 드리우면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부흥을 꿈꾸던 명망 높은 메이커와 쿼츠 시계에 반감을 지닌 애호가를 중심으로 수동 크로노그래프에 대한 수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공급이었습니다. 에보슈 상태로 주문해서 썼던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어느 날 뚝딱하고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긴 불황으로 인해 무브먼트를 개발할 여력 따위는 없었습니다. 이들은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만들어 줄 수 있는 곳을 탐색했지만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무브먼트 제조 업체 대부분이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르마니아와 칼리버 2310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칼럼 휠과 캐링 암 방식을 사용한데다가 우아한 브리지 디자인까지 갖춘 칼리버 2310은 마치 재색을 겸비한 고전 미인 같은 존재였습니다. 무엇보다 직경이 약 27mm에 불과해 드레스 워치가 포트폴리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급 브랜드가 운용하기에 적격이었습니다.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로저드뷔, 브레게 등에게 눈도장을 받은 칼리버 2310은 고급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의 대표 주자가 되어 화려한 부활을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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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드마스터 프로페셔널 문워치와 함께 되살아난 칼리버 321

어느덧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80여년이 흐른 지금도 칼리버 2310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때는 기계식 시계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교과서에서 이제는 인류가 축적한 지식과 기계식 시계의 흥망성쇠를 담은 고전으로 등극한 칼리버 2310. 자체적으로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완성한 브랜드는 칼리버 2310에 작별을 고했지만 그렇지 않은 일부는 여전히 이 백전노장을 기용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많은 이들의 기다림 속에 칼리버 321의 이름을 빌려 귀환을 신고하기도 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칼리버 2310은 한 세기에 걸쳐 활약한 무브먼트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20년 뒤에 칼리버 2310은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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