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리스 나르당의 마린 크로노미터 매뉴팩처 모델
마린 크로노미터(Marine Chronometer)란 말 그대로 바다를 뜻하는 '마린'과 정밀한 시계를 뜻하는 '크로노미터'가 결합한 용어로,
18∼19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실제 항해사들 및 해군 장교들이 사용했던 특별한 용도의 시계였습니다(당시엔 주로 테이블 클락 형태).
마린 크로노미터의 등장 이전에 선원들은 낮에는 해의 움직임을 통해서 밤에는 별의 운행을 통해서만 시간을 유추할 수 있었는데요.
그런데 배에서 주로 쓰였던 해상용 휴대시계가 어떻게 시계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발명품이 되었는지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다는 기계식 시계(무브먼트)의 작동안정성을 실험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의 환경입니다.
한번 출항하면 보통 몇 달씩 바다 한복판을 누비며 변덕스러운 파도와 씨름하고 때로는 태풍을 만나기도 하는지라 18세기 온전하게 작동하는 시계는 많지 않았는데요.
그만큼 고장이 잦았고 시간의 오차 또한 커서 무용지물인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상무역에 사활을 걸었던 영국의 상인들과 항해사들은 바다에서도 정확한 시간과 경도를 확인할 수 있는 시계를 필요로했고,
견고한 해상용 시계를 제작하기 위한 조건으로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인 2만 파운드를 내걸고 국가적인 경연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명의 한 젊은이가 행운의 주인공이 되는데, 그가 바로 최초의 진정한 마린 크로노미터를 개발한 존 해리슨(John Harrison, 1693~1776)이었습니다.
1759년의 H3에 이어 1761년에 완성한 H4는 바다에서의 수많은 악조건 테스트 속에서도 끝까지 정확하게 작동했고,
훗날 영국을 넘어 유럽 전역에서 마린 크로노미터 열풍을 불러왔습니다.
마린 크로노미터를 완성한 이는 영국의 존 해리슨이었지만, 대량생산을 통해 세계 각국에 공급한 대표적인 매뉴팩처는 스위스의 율리스 나르당(Ulysse Nardin)이었습니다.
- 율리스 나르당의 말년 초상화
율리스 나르당의 역사는 1846년 당시 23살의 청년 워치메이커 율리스 나르당이 고향 르 로끌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회사를 창립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유명 워치메이커인 아버지 밑에서 어릴 적부터 시계 제작과 수리를 배운 영향으로 율리스 나르당은 창립 초기부터 정밀한 시계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개발한 마린 크로노미터 및 크로노미터 회중시계들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는데요.
사업은 해가 갈수록 번창했고, 그 사후 아들 폴-다비드 나르당이 회사를 물려받은 후에는 런던, 파리, 제네바, 시카고, 워싱턴 등
수많은 도시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및 각종 관측 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독식할 만큼 브랜드의 황금기를 맞이하기에 이릅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율리스 나르당이 수상한 최고상(금메달 포함)만 해도 무려 4,300개 정도에 달한다고 하니
크로노미터 제조 분야에서 율리스 나르당의 성과는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율리스 나르당의 마린 크로노미터
풀와인딩시 이틀 내지 최대 8일간 멈춤 없이 작동하는 고정밀 수동 칼리버를 탑재한 율리스 나르당의 마린 크로노미터는
19세기 말 이미 50여 개국의 해군에까지 납품되었으며, 심지어 가정용으로도 많이 판매되었습니다.
이후 20세기 초반에는 러시아 및 일본에까지 전해져 훗날 세이코(Seiko)가 자체 개발한 동양 최초의 마린 크로노미터의 등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듯 한 시대를 풍미한 율리스 나르당의 마린 크로노미터는 그들이 자랑할 만한 유산인 동시에
앞으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70~80년대에 스위스 시계업계에 드리워진 쿼츠 위기의 짙은 먹구름은 율리스 나르당에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시대가 변한 만큼 이제 마린 크로노미터나 회중시계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졌고,
특정 기계식 시계 제작만 고집해온 이들로서는 새로운 세대의 트렌드를 충족할 만한 돌파구를 찾지 못해 긴 방황의 세월이 이어졌습니다.
- 율리스 나르당 부활의 일등공신인 롤프 슈나이더
하지만 1983년, 젊은 사업가 롤프 슈나이더(Rolf W. Schnyder, 1935~2011)가 회사를 인수하면서 브랜드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일찌감치 브랜드의 가치를 꿰뚫어보았던 슈나이더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서 추진한 시계 부품 관련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자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율리스 나르당을 품에 안았고, 자신의 비전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개발자 파트너를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 율리스 나르당의 영원한 멘토, 루드빅 외슬린 박사 ⓒ Bea Weinmann for Ulysse Nardin
롤프 슈나이더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인물은 당시 31살의 젊은이였던 루드빅 외슬린 박사(Dr. Ludwig Oechslin)였습니다.
대학에서 천문학, 고고학, 응용과학, 철학 등을 전공한 외슬린은 기계식 시계 제조에 크게 매료돼 바젤 대학에서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루체른의 요르그 스포링이라는 시계제작자의 공방에서 갖가지 기상천외한 시계들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외슬린의 이러한 돈키호테적인 모습에 반한 슈나이더는 그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시계를 제작해 달라고 주문했고,
그 결과 1985년 발표한 시계가 아스트로라븀 갈릴레오 갈릴레이(Astrolabium Galileo Galilei)였습니다.
이 시계는 외슬린이 이탈리아 바티칸 박물관의 파네시안 클락을 복원하던 도중 영감을 얻었고,
천문학의 대가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헌정하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붙였습니다.
시간 외에 캘린더, 지구에서 바라본 하늘의 운행 및 일출-일몰까지 담아낸 아스트로라븀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이어,
1988년에는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딴 플래니타리움 코페르니쿠스(Planetarium Copernicus)를,
1992년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에 헌정한 테루륨 요하네스 케플러(Tellurium Johannes Kepler)를 연이어 공개하며 천문시계 3부작의 대장정을 마무리했습니다.
- 율리스 나르당과 루드빅 외슬린의 천문시계 3부작
당시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큼 기능적으로나 미적으로도 독특했던 율리스 나르당의 천문시계 트릴로지는 시계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때마침 기계식 시계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 또한 높아지던터라 루드빅 외슬린과 율리스 나르당이 합작한 천문시계 및 프릭(Freak) 등 일련의 모험적인 결실들은
이전 세기에 활약한 천재적인 시계제작자들의 재림을 보는 듯 했지요. 더불어 타성에 젖어있던 보수적인 시계제작자들에게도 자극이 되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루드빅 외슬린의 기대 이상의 결실에 감탄한 롤프 슈나이더는 생전 외슬린에게 지속적이고 과감한 투자를 약속했고,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창조적인 인재와 품이 넓고 비전이 있는 경영자가 만났을 때 어떠한 시너지를 보여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창립 150주년을 맞은 1996년 율리스 나르당은 마린 크로노미터 1846이란 시계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 시계가 특별했던 건 19세기 브랜드를 대표했던 마린 크로노미터의 디자인과 DNA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현대적인 손목시계로 완벽하게 새로 선보인 점에 있습니다.
이후 율리스 나르당은 매년 꾸준히 다양한 마린 크로노미터 시리즈를 선보였고, 명실공히 브랜드의 시그너처 컬렉션으로 안착하게 됩니다.
- 롤프 슈나이더 사후 2011년 율리스 나르당 CEO로 취임한 패트릭 호프만(Patrik P. Hoffmann)
- 율리스 나르당의 매뉴팩처 칼리버 UN-118
그리고 2012년 또 하나의 새로운 종류의 마린 크로노미터가 탄생하게 됩니다. 마린 크로노미터 매뉴팩처(Marine Chronometer Manufacture) 라인이 그것인데요.
기존의 마린 크로노미터 모델과 차별화된 점은 새로 개발한 자동 무브먼트에 숨어 있었습니다.
UN-118 칼리버는 설계에서부터 제작까지 모두 율리스 나르덴의 기술력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실리콘 베이스에 다이아몬드를 코팅한 자체 특허 신소재 다이아몬실(DIAMonSIL)로 제작한 이스케이프먼트와 헤어스프링을 사용해 내구성을 기했습니다.
- 화이트 컬러의 그랑푸 에나멜 다이얼을 사용한 마린 크로노미터 매뉴팩처 모델
무브먼트 외에 다이얼에도 스위스 전통의 장인정신을 담았는데, 오랜 세월 율리스 나르당과 훌륭한 파트너십을 유지해온(2011년 완전히 인수)
스페셜 에나멜 공방인 돈제 카드랑(Donzé Cadrans)의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완성한 티끌 없는 순백의 그랑푸 에나멜 다이얼을 사용한 것입니다.
도자기 표면을 연상시키는 화이트 다이얼 위에 고풍스러운 인상의 블랙 로만 인덱스를 얇게 프린트하고
12시 방향 서브 다이얼에는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를, 6시 방향에는 별도의 초침과 날짜를 배열하는 디자인은
19세기 중후반 제작된 율리스 나르당의 전설적인 마린 크로노미터의 그것과 차이를 못 느낄 만큼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습니다.
- 2013년 발표한 150개 한정의 마린 크로노그래프 매뉴팩처 모델.
에벨로부터 사용권 일체를 구입한 베이스를 고급스럽게 수정한 매뉴팩처 칼리버 UN-150을 탑재했습니다.
한편 율리스 나르당은 2014년 7월, 세계적인 패션 그룹 케링(Kering)에 전격 인수되면서 또 한 차례 중대한 변화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실제로 케링 그룹에 인수된 이후 다소 중구난방(?!)이었던 컬렉션이 대폭 재정비되기 시작했으며,
마린, 다이버, 클래식, 프릭, 제이드 등 주요 컬렉션별 캐릭터도 분명하게 교통정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브랜드의 시그너처인 마린 컬렉션의 비중도 한층 더 커지게 되었으며, 라인업의 다각화도 공격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 2016년 신제품인 마린 크로노그래프 애뉴얼 캘린더 모델
- 2016년 신제품인 마린 그랑 덱 투르비용(Marine Grand Deck Tourbilon) 모델
수세기 전 선원들과 해군 장교들을 위해 탄생한 마린 크로노미터. 그 탁월한 정밀함과 내구성으로 기계식 시계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열었음은 물론,
율리스 나르당과 같은 기술력 있는 매뉴팩처를 통해 오늘날까지 그 DNA를 오롯이 계승한 시계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올해로 창립 170주년을 맞은 율리스 나르당의 역사에 있어 마린 크로노미터, 그리고 현재 이어지고 마린 컬렉션은 브랜드의 영원한 대표작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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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시계 입니다,
근대 국내에는 매장이 있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