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진이 그들의 화려한 역사를 또다시 재현했다. 이번에는 1969년이다. ‘론진 헤리티지 1969’에 그때 그 시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에디터 장종균 포토그래퍼 김도우 문의 론진 02-310-1597
THE LONGINES HERITAGE 1969
Ref. L2.310.4.72.0/3
기능 시·분·초, 날짜
무브먼트 셀프와인딩 L888.2,
25,200vph, 21스톤,
64시간 파워리저브
케이스 36 × 36 mm,
스테인리스스틸, 30m 방수,
솔리드백 가격 200만원대
론진 헤리티지 1969’의 원형. 옐로골드 버전으로 현재 모델과 케이스 소재만 다르고 거의 같다.
론진의 아카이브는 방대하다. 보통 무언가를 기념할 때 복원 모델을 선보이는데, 그렇게 따지면 론진에게는 매해가 기념이다. 과거의 원형을 복원한 헤리티지 컬렉션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거의 매년 다른 복원 모델을 선보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100년이 넘는) 긴 역사가 기반이 돼야 하며, 그 속에 가치 있는 모델도 있어야 한다. 이를 알아보는 안목도 마찬가지다. 앞선 조건을 모두 충족할 브랜드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중 하나가 론진이다. 1832년 스위스 쌍띠미에에서 시작한 이들의 유구한 역사가 첫째, 뜻깊은 모델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해온 뮤지엄의 존재가 둘째 이유다. 40년 넘게 론진을 지켜온 현재 CEO 월터 본 캐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헤리티지 컬렉션을 론칭하고 계속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토대가 되었기에 린드버그 아워 앵글 워치, 레전드 다이버 워치와 같은 명작이 부활할 수 있었다. 지난해 선보인 ‘론진 헤리티지 1969’ 역시 마찬가지. 그 역사적인 모델을 체험했다.
짧은 일체형 러그지만 케이스 사이즈가 그리 크지 않아 착용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재해석을 넘어선 재현
론진의 헤리티지 컬렉션은 과거 원형에서 영감을 받아 재해석하는 것보다 당시 모델을 재현하는 것에 가깝다. 과거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온다. 바뀐 것이 있다면 소재와 피니싱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가령, 케이스 소재를 교체한다든지, 기술의 발달에 따라 정교한 피니싱을 추가하는 식이다. 글라스와 무브먼트 역시 마찬가지. 이를 제외하면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이번에 체험한 ‘론진 헤리티지 1969’ 역시 원형과 거의 같다. 쿠션형 케이스부터 기다란 직사각형 핸즈와 4시 30분 방향에 위치한 날짜창까지도. 이는 1960년대 후반에 출시한 과거 모델임에도 그때부터 이미 완성된 디자인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원형은 스테인리스스틸, 골드도금 스테인리스스틸, 옐로골드 세 가지 버전이 있었지만 복원 모델은 스테인리스스틸 버전만 선보였다.
살짝 솟아 보이게 만든 다이얼 글라스. 빈티지 워치의 요소를 부각하는 것 중 하나다.
드레스 워치로 제격이며 페어 워치로 착용해도 크게 무리 없을 듯하다. 에디터의 손목이 남자치고는 얇은 편이다.
쿠션형 케이스의 완벽한 복원
스테인리스스틸에 사이즈는 36 × 36 mm. 수치상으로는 작다고 느낄 수 있지만 사각형 쿠션형 케이스 특성상 실제로 착용하면 그리 작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체형 러그 포함 세로 길이가 41mm 정도이기에 원형 38~39mm와 비슷한 느낌이다. 드레스 워치로는 적당한 크기다. 그리고 조금 큰 사이즈를 선호하는 여성에게도 알맞다. 다만, 기계식 시계의 감상 포인트인 글라스백이 아닌 것은 아쉽지만 이마저도 헤리티지 컬렉션의 일부다. 굳이 과거에 없던 글라스백을 사용하면서까지 헤리티지 컬렉션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를 사용하지만, 모서리 부분을 곡선으로 살짝 솟아 보이게 만드는 것도 당시의 플랙시 글라스를 충실히 재현한 결과다.
표면을 반듯하게 다듬지 않고 브러싱 처리해 예스러운 분위기를 부각했다.
핸즈의 중앙 부분은 샌드 블라스팅으로 가공했다.
원형처럼 솔리드백을 사용해 무브먼트를 직접 볼 순 없었다.
다이얼에서 드러나는 헤리티지의 가치
새 시계지만 예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자세히 보면, 다이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반듯하게 다듬지 않고 표면을 브러시드 처리했다. 또 실버라고 하지만 빈티지 워치에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아이보리빛이 돈다. 덕분에 핑크골드 로고, 아플리케 인덱스와도 조화롭다. 기다란 직사각형 핸즈 역시 핑크골드인데, 모서리는 폴리싱으로 다듬고 중앙은 샌드 블라스팅으로 정교하게 가공했다. 두 면이 빛 반사에 따라 대조를 이뤄 입체감을 준다. 이런 섬세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모여 시계의 얼굴이 바뀌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복원 모델을 꾸준히 선보여온 론진의 노하우가 엿보인다.
가려진 무브먼트의 진가
탑재한 무브먼트는 L888.2로 ETA A31.L01이다. 지난 바젤월드에서 선보인 헤리티지 컬렉션의 레일로드에도 같은 무브먼트를 탑재한다. 칼리버 이름에 ‘L’이 붙는 것은 ETA가 론진을 위해 개발했음을 뜻한다. 다만, 지금은 스와치 그룹 내 몇몇 브랜드와 공유하고 있다. 우수한 무브먼트로서 그만큼 검증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진동수인데, 생소한 25,200vph다(같은 그룹 내 오메가 코-액시얼 무브먼트도 같은 수치). 범용 무브먼트 ETA 2892를 베이스로 진동수를 낮춘 것으로 그에 대한 단서는 팰릿 포크와 이스케이프 휠이 부딪치는 소리를 통해서도 감지할 수 있다. L888.2의 진동 소리만 들어서는 실감이 안 되지만, 일반적인 진동수 28,800vph의 소리와 비교하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좀 더 느긋한 속도의 진동 소리가 들린다. 진동수를 낮춘 근본적인 이유는 파워리저브를 늘리기 위함이다. 좀 더 긴 메인스프링까지 사용한 덕에 파워리저브는 42시간에서 64시간으로 늘어났다. 현대 기계식 시계에서 강조되고 있는 ‘풀와인딩 상태에서 주말을 지나도 멈추지 않는 시계’에도 적절히 부합한다.
작은 사이즈인 탓에 크라운도 조금 작다.
준수한 성능
풀 와인딩 상태에서 오차 측정기로 테스트 결과, 다이얼이 하늘 위로 향하는 자세에서 진동각 280°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으며 오차는 -7 ~ -4초 때였다. 시계가 가장 불안정한 정면 자세에서는 진동각이 270°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오차는 비슷하거나 -2 ~ -1초 정도 차이가 났다. 모든 자세에서 측정한 오차의 최대편차는 10초(2초와 -8초). 조금 큰 편이지만 평균오차는 -5초로 준수했다. 크라운이 조금 작은 것만 빼면 조작감도 만족스럽다. 너무 뻑뻑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적당한 저항감이 느껴진다. 조작은 일반적인 시계와 동일하게 0단에서 와인딩, 1단에서 날짜 세팅, 2단에서 시간을 맞출 수 있다.
선입견을 깨다
‘론진 헤리티지 1969’의 가장 큰 매력은 원형의 재현이다. 수년간 복원 모델을 제작해온 브랜드답게 완성도 역시 뛰어나다. 작은 것 하나라도 원형 그대로 구현하고자 한 노력이 곳곳에 묻어난다. 크기도 빅 사이즈 트렌드에 맞춰 조금 키울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솔리드백 역시 마찬가지. 원형을 고집했다. 옛날 드레스 워치를 선호하는 애호가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췄다. 물론, 동그란 시계에 익숙한 사람에겐 어색할 수도 있다. 에디터가 느낀 첫인상이 그랬으니까. 며칠간 착용해본 결과, 모든 게 당장 바뀐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동요는 분명히 있었다. 매력을 느끼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일단 착용감이 좋으니 계속 차게 된다. 또, 볼수록 계속 보게 된다. 다이얼의 따뜻한 색감과 예스러운 분위기 덕분이다. 새 것이지만 익숙한 느낌이다. (둥글지 않은) 레트로 워치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이만한 모델이 또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