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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롱 1743 2007.09.27 16:23

꽤 예전 S모 기업의 표어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1등이 아니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 지금 이런 표어를 내걸었다면 인터넷 등에서 엄청 두들겨 맞았겠지만, 당시 쑥쑥 성장하고 있던 나라 경제와 분위기에서는 큰 반발이 없었습니다.

 

개성 넘치는 시계 업계에서 뭐가 1등이고 또 뭐는 2등이다 하는 것과 자동차에 빗대 뭐는 롤스로이스급, 벤츠급 이라고 등급을 나누는 일이 그다지 의미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메이커와 메이커 사이의 경계는 존재한다고 봅니다. (사실 등급을 두는 작업이 재미는 있습니다. ㅎㅎ) ETA의 무브먼트를 받아 껍데기만 씌워 판매하는 회사와 부품 하나 하나에서 무브먼트와 케이스를 한 회사에서 기획, 설계, 제작하여 판매하는 시계를 같은 취급해서는 안되니까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이건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하튼 따뜻한 마음으로 2등도 알아주고 3등도 알아주고 꼴찌까지 인정해 줘야 하겠지만, 시계 업계의 하이엔드라 불리는 메이커를 1류라고 하면 1류를 지향하는 하이엔드 언저리 메이커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서론이 쓸데없이 장황했군요.

 

 

 

그룹 차원의 지원을 받아 급성장한 메이커를 제외하면, 1류의 언저리에서 놀던(?) 전통적인 메이커는 리치몬드 그룹의 JLC(예거 르쿠르트)입니다. 얼마 전 무브먼트 개발 능력이 전무하지만 케이스 하나는 뻔드르르하게 잘 만드는 파네라이의 자사 무브먼트를 개발, 지원해 준 것으로 그 존재가 드러난 곳이 있습니다. 에릭 클라인 박사가 팀장으로 있는 리치몬드의 개발팀입니다. 개발팀은 시계 메이커 내에나 존재하거나 역 부족일 때는 실력은 좋지만 가난한 AHCI급의 시계사에게 설계를 맞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하지만 메이커가 독립적으로 장사를 했던 예전과 달리 그룹의 지휘를 받고 움직이게 되는 팔자(?)가 되어버렸고, 또 그룹 차원에서는 전략적으로 밀어줘야 할 메이커가 있는 만큼 모두를 위해 개발팀이라는 존재의 필요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오메가 아워 비젼의 번역 리뷰를 하면서 오메가의 자사 자동 무브먼트를 실질적으로 만든 곳이 ETA를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 팀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는데, 스와치에서도 상시 조직은 아니지만 개발팀을 그룹차원에서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리치몬드 그룹에서라면 개발이 가능한 즉, 스스로 설계를 하고 생산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메이커는 랑게 & 죠네, 바쉐론 콘스탄틴, JLC 정도입니다. 랑게는 재생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부활을 위해 JLC IWC의 기술자들의 서포트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VC는 한동안 JLC에 빌붙어 있다가 최근 들어 수동 하나, 자동 하나의 무브먼트를 만들면서 JLC랑은 같이 놀지 않으려고 하고 있지요. 리치몬드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라하면 바로 JLC로 파텍, AP, VC와 같은 쟁쟁한 1류들에게 무브먼트를 공급하면서 그들의 똥꼬를 닦아주던 멋진 존재였습니다. 그런 멋진 역할을 하면서 시계도 만들었는데 이게 영 시원치 않았던 겁니다. 무브먼트는 잘 만들었는데 피니싱이라던가 디자인이라던가 늘 2% 부족한 존재였던 겁니다. 뭐 무브먼트를 팔아먹던 입장이라 그 분들 보다 훌륭한 시계를 만들어 그 분들의 수입에 지장을 초래하면 곤란하기도 했겠지만요.

 

 

한편 리치몬드에 비견되는 상대 진영인 스와치 그룹에서 JLC와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하면 얼마 전 국내에 런칭 된 블랑팡입니다. JLC 못지 않은 고급 무브먼트를 생산하는 프레드릭 피게를 등에 업고 있는 블랑팡인데, 스와치 그룹의 탑 브랜드로 키워보려다가 삐끗한 이 후 계속 1류인 브레게의 주위를 기웃기웃 거리고 있습니다. 떨어진 이미지가 다시 회복되는 것은 이미지를 새로 만드는 것 보다 어려운지, 스와치에서는 브레게만 죽어라고 밀어줄 기세인지 요 몇 년간은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JLC와 블랑팡의 공통점은 스테인레스 케이스를 적극적으로 만든다는 겁니다. 본좌 급 파텍이 스포츠 워치에나 스뎅을 사용하지만, 이들은 1류 세계에서는 금기나 마찬가지인 정장용에서 아낌없이 사용합니다. (스뎅 시계 열심히 만드는 AP도 정장용에서는 스뎅을 사용하지 않죠) 유저가 사용하고 관리하기도 편한 스테인레스를 케이스로 쓰는 것은 합리적이고 결코 나쁘지(?)도 않지만, 1류 세계의 룰에서는 우리는 아직 1류가 아닙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가난한 시계 매니아에게 금시계와 동일한 알맹이를 지니면서 저렴한 SS 시계는 달콤한 유혹입니다. 리세일 밸루를 보면 스위스와 독일의 양 본좌인 파텍과 랑게는 그들과 질적으로 다르고, SS의 못생긴 팔각 시계를 막되먹은 가격으로 팔아먹는 AP를 보면 그 차이는 분명합니다. (그 대신 AP의 금시계는 리세일 밸루가 꽝이지만요)

 

하이엔드 메이커들 똥꼬나 닦아주며 살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건지, 대장님의 지시인지 (그룹 차원에서의 전략) 그것도 아니면 그룹내에서 독립적으로 개발을 할 수 있는 JLC의 포지션으로 보았을때 개발에 대한 전략적인 기능을 '개발팀'의 등장으로 멀티를 뛰지 않아도 되게 되었는지는 저 혼자 짐작 하고 있지만, JLC는 죽어도 넘을 수 없는 정장용 1류라는 벽을 넘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1류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도 그 동안 1류 언저리에서 보고 배운 고상함으로 돈 없는 매니아들의 갈증을 촉촉히 달래주던 JLC는 그 2% 모자란 고상함을 박차고 하이엔드 스포츠워치라는 장르에서 맹주가 되리라 라고 결심한 모양입니다. 일부에 불과했던 스포츠 워치라는 장르가 정착되고 온갖 하이테크가 구사된, 물 한방을 손에 묻히지 않을 부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고급 스포츠 워치가 속속 등장하는 것이 요즘이라 잘못된 선택은 아니죠. 비유를 하자면 스포츠 워치는 마치 도로를 점거한 많은 수의 SUV와 같다고나 할 수 있습니다. JLC가 요즘 잘 팔리는 SUV 만들겠다는 게 뭐가 잘못일까요.

 

하지만 JLC 시계를 몇 번 가져본 제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쾌합니다. 스포츠 하이엔드가 되는 건 좋은데 왜 지금까지의 가치와 이미지를 훼손하느냐 이말 입니다. (거기에 아름다운 JLC의 무브먼트들까지) 비록 2%는 부족하지만 그것을 믿고 사랑한 유저들에 대한 배신은 용납할 수 가 없습니다. 요즘 JLC의 트렌디하고 스포티해진 외관이 더욱 맘에 안 드는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겁니다. 개인적인 불쾌감을 접고 냉정히 시장을 바라보면, 로져 듀비 같은 메이커 조차 천문대 크로노미터 인증이라는 멋진 훈장을 내팽겨치고 우락부락한 하이엔드 스포츠 워치를 만들며 새로 떠오르는 스포츠 하이엔드 시장을 선점하려는데 고작 그들의 시계 몇 개 산 매니아가 JLC에게 그쪽으로 가지 말아라 라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이겠죠. 

 

 

다만 괘도수정을 마친 JLC와 달리 블랑팡의 행보는 예전 같지 않고 어디로 나아가려고 하는지 안개속입니다. 바젤에서 발표된 8데이즈 수동, 그것을 기반으로 한 자동 무브먼트 이외에는 화려한 신작을 쏟아내는 다른 메이커들에 비하면 더디고 한편으로는 초라해 보입니다. ‘정체기라고 말하면 좋을 것 같은데, 80년대 브랜드 부활과 프레드릭 피게와 그룹 차원의 막강한 지원을 업고 다양한 라인업과 섬세한 디자인으로 빠르게 하이엔드로서의 기반을 다지며 화려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물론 어떤 회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정체기도 존재하지만 성장과 더불어 보여준 화려한 10여년이 있었기에 더더욱 빨리 정체를 넘어 새로움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블랑팡이 JLC보다 더 안타까운 이유는 JLC나 동 그룹의 브레게와 같이 물려받은 유산을 리메이크조차 할 수 도 없는 역사성이 빈약한 80년대의 브랜드라는 겁니다. 하이엔드 메이커들이 새로움을 표현할 때 가장 보기 좋은 '전통에 기반한 혁신' 을 보여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또 과감한 JLC에 비해 보수적인 성향의 메이커이기 때문에 변신에 익숙하지 않다는 겁니다. (디자인은 모던하지만)

 

 

JLC와 블랑팡.

 

 

과연 이 둘은 몇 년 뒤에 어떤 위치에 서 있게 될지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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