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게와 러시아 시장 Highend
번역 : 최혁(salvia24@naver.com)
브레게와 러시아 시장(Breguet and the Russian Market)
(아브라함 루이스 브레게 Abraham-Louis Breguet 1747~1823)
아브라함 루이스 브레게는 그리 훌륭한 사업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계를 제작하는 것보다, 제작물의 품질을 연구하고 향상시키는데 열중하였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1791년 초에 자신과 동업한 제이비어 지드(Xavier Gide)에서 따로 독립했습니다. 당시에 브레게는 전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금속의 순도에 대한 궁금중에 몰두중이었습니다. 브레게의 개인적인 열정은 제이비어 지드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브레게가 자신의 긴 연구 기간 동안에 맞닥힌 수많은 문제들을 극복하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의 다양한 서신왕래에서 그의 많은 친구들의 애착을 볼수 있습니다. 이 친구들은 해가 거듭될수록 사회의 상류계급에서부터 여러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했습니다.
브레게가 그의 작업을 시작할 때, 브레게의 수학교수이자, 왕실의 자제들을 가르키는 가정교사를 맡고 있는 수도원장인 조제프 프랑수아 마리(Joseph-François Marie)는 브레게를 프랑스 왕실에 소개시켜주었습니다. 그곳에서 브레게는 많은 중요한 인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기간 중인 1793년 8월에, 그의 친구인 장-폴 마라(Jean-Paul Marat)는 브레게에게 프랑스를 떠나라고 하는 안전을 종용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시에 프랑스에서 브레게의 신변은 수배된 상태였고, 무엇보다도 그의 친구인 Dumergue가 그를 영국에 있는 피난처에 가도록 종용했습니다. 마지막에 브레게는 자신이 태어난 스위스를 선택하였고, 그곳에서 훌륭한 시계제작자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특별히 사무엘 루이(Samuel Roy), 루이스 드꼼빠즈(Louis Decombaz)와 자끄 프레드릭 우리에(Jacques-Frédéric Houriet)는 훗날에 스위스에서 브레게의 중요한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브레게는 유명한 영국인 크로노미터 제작자인 존 아놀드(John Arnold)와 그의 아들인 존 로져(John Roger)와도 매우 친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에 온 Recordon과 그의 수제자인 Fatton은 브레게의 사업을 도왔습니다. Dumergue는 브레게의 아들이 영국의 아놀드(Arnold)의 공방에서 기술을 습득할동안 돌봐주었습니다.
브레게의 친구인 어거스틴 드 베탕쿠르(Augustin de Betancourt)는 브레게를 스페인 왕실에 소개시켜주었고, 스페인에 수맣은 시계들을 판매하였습니다. 또한 베탕쿠르는 카스타네다(Mr. Castaneda)에게 시계제작자인 브레게를 소개시켜주었고, 카스타네다는 그가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에, 스페인 왕족과 왕실을 위해 많은 시계들을 구매했습니다.
그의 특별한 친구인 국무장관인 모리스 드 탈레랑(Maurice de Talleyrand)에게 감사해야합니다. 브레게가 온 유럽에 자신의 시계들을 보낼수 있도록 외교행낭(diplomatic pouch, 의 사용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왕세자인 돈 페르디노드(Don Ferdinod, 이후에 스페인의 왕이 된다.)와 유아인 돈 안토니오(Don Antonio)와 돈 까를로스(Don Carlos)가 나폴레옹에게 일종의 억류생활을 할 시, 운이 좋게 탈레랑의 호화로운 성에 머물게 되었고, 브레게는 탈레랑을 통해 많은 양의 시계들을 이들에게 판매하였습니다.
* 외교행낭 - ‘외교문서나 기타 공동물품’을 담는 포장물(包裝物)’, 국가적으로 보호하며 이에 대해 허가없이 개봉이나 유치는 불가하다.
탈레랑은 브레게를 파리에서 체류중인 터키의 대사인 모랄리 알리 에펜디(Morali Ali Effendi)에게 소개시켜주었습니다. 에펜디는 단지 브레게에게 폐쇄적인 오스만 황실을 개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터키 시장의 기호에 맞추기 관련된 시계의 형식에 관한 조언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에펜디는 이전부터 영국에서 터키시장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친구들의 도움은 브레게가 혁명이라는 어렵고 위험한 기간에서 살아남게 하였고, 그가 파리에 되돌아오기까지 다른 경제적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작물을 빠르게 수출 할 수 있었습니다. 18세기의 끝무렵의 폐새된 유럽의 갈등으로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19세기가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과 프랑스와 다른 유럽국가들과 영국과의 모든 통상적인 교류에 대한 봉쇄정책의 결과는 프랑스를 고립시켰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의 어려운 경제상황이 더해져, 브레게가 자신의 제작품을 위해 다른 판매장소를 물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친구들의 인맥은 다시금 브레게를 도왔고, 새로운 시장의 형성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의 친구인 에듀빌 장군(General Hédouville)에게 고마워해야합니다. 그는 1801년에 샹트 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전권 대사(Plenipotentiary Minister)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혁명력 11년, 17일(1803년 8월 7일)에 쒸어진 편지는 러사아 시장에 브레게를 소개하는 모든 자신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써놨습니다. 에듀빌은 그의 측근에게 브레게의 기술을 칭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상업적인 중계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 편지에는 단지 5가지의 항목들이 나옵니다. 이 항목들은 주문한 시계와 브레게가 받는 돈과, 한 달 이내에 브레게가 보내야 하는 두 바늘을 가진 예약된 작은 시계, 그리고 다른 두 개의 주문하는 시계들입니다. 이것들 중 하나는 에듀빌 장군을 위한 댓가로, 스위스 대사를 거쳐 러시아에 보내야 하는 것으로, 작품번호 361/2이로 황금 엔진이 돌아가는 주문형 시계입니다. 브레게는 다른 친구에게 이것을 에듀빌에게 전달하도록 하였고, 에듀빌은 언제든지 팔 수 있었습니다.
(왼) 초기 브레게의 인증서의 앞뒤면
(오) 짜르 알렉산드르 1세
Breguet, No. 423/5.
1804년 7월 6일에 시작하여, 1808년 12월 14일에 작업을 마침. 짜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14,000 프랑에 판매하였다.
적갈색의 마호가니로 뼈대를 만들고, 지속적으로 이스케이프먼트(escapement)를 움직이는 청동으로 도금한 Pendule Marine, 40시간 저장표시(reseurve indicator), 특수한 레버로 와인딩 조절이 가능하며 이스케이프먼트를 볼 수 있다.
2002년에 10월에 안띠꿔롬(Antiquorum)에서 경매되었으며, 경매가는 미화는 518,200$ 이고, 773,500 Fr이다.
Breguet &Fils, No. 3825,
Compteur militaire 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행진시에 속도조절에 사용할 수 있다.
알렉산드르 1세 짜르에게 브로신(Brosin) 장군이 1822년 5월 15일에 배달하였으며, 현재 Time Musem Collecion에서 소장중이다.
에듀빌(Hédouville) 장군은 샹트 페테르부르크에 1804년까지만 남았습니다. 단지 몇 년간 머문것처럼 보이지만, 이 기간에 그는 브레게에게 짜르의 황실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을 소개시켜줄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루이스 브레게와 그의 아들인 안토이네 루이스(Antoine-Louis)가 러시아로 떠났던 적이 없었음에도, 브레게의 사업은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브레게는 모스코바와 샹트 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시계제작들에게 시계들을 위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계들이 Frackmann, Labensky, Hocke, Ferrier와 Wenham를 거쳐 팔렸습니다. 사업은 매우 잘 되었고, 1808년에 브레게는 러시아에 그의 작품들 판매할 분점을 열기로 하였습니다. 브레게는 라자르 모로(Lazar Moreau)에게 상점에 대한 일을 맡기었습니다. 모로는 몇 년전에 유럽의 중요 왕실과 군대의 고위직을 상대하여 성공을 거둔 야심만만한 청년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러시아로 가는 동안에, 콩피에뉴(Compiegne)에 들려 스페인의 왕과 여왕에게, 그리고 국무총리이자 평화의 왕자라고 불리운 마뉴엘 드 고도이(Manuel de Godoy)에게 여러개의 시계들을 판매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안토이네 루이스 브레게(Antoine Louis Breguet)는 장부를 기록하였고, “매죵 드 루씨(러시아의 집, Maison de Russie)"이라고 제목을 붙인 책에 새로이 팔린 물품들을 적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책에는 80여개의 작품에 대한 판매가격과 할인한 가격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작품들은 ”퍼페추얼(perpétuelle)”, “주문형(souscription)” 시계들, 리피팅(repeating) “택트(à tact)”시계, 온도계가 있는 링(ring)과 은으로 된 포켓 링(ring)들이 있는 포켓시계들과, 그리고 다양한 케리지(carriage) 시계들로서, 이들의 총 가격을 합하면 당시의 돈으로 90,000프랑정도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제품들은 모두 라자르 모로가 맡았고, 이 사람의 별명은 "욕심쟁이(Zarenne)”였습니다.
브레게는 이번일로 모로가 자신을 모로 브레게(Monsieur Moreau-Breguet)씨라고 부르는 것을 허용하였고, 모로는 봄에 파리를 떠났습니다. 8월 25에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 도착하였고, 베를린(Berlin)에는 27일, 9월 14일에는 쾨니히스베르크(Koenigsberg)에 도착하였습니다. 모로가 도착한 지 몇일도 안되어, 이곳에서 브레게의 친구인 스탈베르크 백작(Count Stalberg)은 육군 원수(Grand Marshal)에게 모로는 소개시켜주었고, 육군 원수는 황제에게 그를 소개시켰습니다.
모로는 브레게에게 매우 낙관적인 편지를 쎃습니다. - 육군원수와 같이 점심식사를 한 후에, 우리는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육군 원수는 저에게 ‘폐하께서는 시에 유명한 브레게의 작품을 두는 상점을 세운다는 것에 매우 즐거워 하셨습니다. 저는 이 상점이 짜르의 보호와 격려를 받을 것이 확실하다고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모로는 짜르에게 이동가능한 괘종시계와 황금과 에나멜로 장식한 택트시계(à tact)를 팔았습니다. 모로는 편지에 ‘짜르가 브레게의 시계들만을 차고 다닌다’라고 써놨습니다.
모로는 10월 20일에야 샹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가기위해 매우 많은 돈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매우 무거운 그의 마차를 끌기위해 5~8마리의 말들이 필요하였고, 이미 대부분의 말들이 중요하고 부유한 여행자들이 예약을 해둔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그가 가져온 물건들에 매우 높은 관세가 매겼습니다.
“런던 호텔(Hôtel de Londres)"에서 8일을 머문 후에, 모로는 1년에 500루블을 지급하기로 하고 그랑드 밀리오네(Grande Millione)의 42번가에 있는 주택을 계약했습니다. 그는 가구를 사기도 하고, 마차를 빌려주기도 하면서, 그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가능한 모든 만찬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사교적인 요청에 참여했습니다. 모로는 해군장(Minister of the Navy)을 만났고, “해군장은 나를 정중하게 맞아주었고, 그가 짜르에게 돌아갔을 때, 가능한 빨리 ‘해군의 시계학자(Horloger de la Marine)”이란 타이틀을 내거는 것에 대해 반드시 요청하겠다는 것에 대한 허가를 약속했습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1908년 12월 12일, “해군의 시계학자(Horloger de la Marine)”이란 칭호를 수여받았고, 모로는 브레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 저는 1시간 30분간 짜르를 알현하였고, 저에게 말하기를 ”짐과 제국의 해군을 위한 시계제작자”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 모로는 이번 알현을 이용해 짜르에게 No.423의 ”Pendule Sympathique“(현재 브레게 박물관에 있습니다.)와, 그것에 어울리는 시계로 잘 알려진 크로노미터 No. 2115를 같이 판매하였습니다.
짜르는 모로에게 종종 그가 좋아하는 시계를 황실에 납품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로에게 “우리의 해군을 위해 일하게나, 모로여, 그리고 가능하다면 빨리 새로운 제품들을 가져왔으면 한다. 꼭 그렇게 하길 바라고 나에게 그것들을 보여다오”라고 말했습니다. 모로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브레게는 모로가 마차, 말, 마부, 시종, 심지어 운반용 썰매까지에 돈을 너무 낭비한다고 느꼇습니다. 그리고 모로가 사용한 경비지출에 대한 내역을 충분히 기록하지 않고, 여러번의 독촉장을 받고나서야 대금을 자신에게 보내준 것으로 인해, 그를 고소하는 것도 생각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로는 환전 방법을 이용해 대금을 보내주었는데, 그는 이것이 매우 좋은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어떤 한번은 다이아몬드로 바꾸어 브레에게 보내주었는데 프랑스에서의 가격은 그리 값이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루불의 가치가 너무 낮아 모로의 이러한 노력들을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브레게는 어거스틴 드 베탕쿠르(Augustin de Betancourt)에게 모로를 감시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어거스틴 드 베탕쿠르 - Augustin de Betancourt 1758~1825)
베탕쿠르는 브레게의 오래된 친구로, 아마 가장 오래되고 절친한 친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는 브레게가 만든 금속 온도계(metal thermometers)의 개발을 도와주었고, 몇 년 전에는 시계제작자인 샤프(Chappe)와 공동으로 시간측정장치(telegraph)의 향상을 도와주었습니다.
스페인에서 지내는 동안, 베탕쿠르는 어떠한 브레게의 경제적 지원없이도 황실에 브레게를 소개시켜주었고, 많은 양의 시계들을 판매하였습니다. 1807년에 샹트 페테르부르크에 짧은 기간 여행하는 동안에, 그는 짜르를 만났습니다. 짜르는 베탕쿠르에게 러시아로 와 수압기술자 모임(Corps of Hydraulic Engineers)을 창설할 것을 제안했고, 그에게 이 단체의 장의 지위를 약속하였습니다.
베탕쿠르는 1808년 10월 19일에 샹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모로를 만났습니다. 모로가 브레게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두 사람간의 공손어린 관계에 대해 써놓았고, 1809년까지 이들의 진심어린 관계는 지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주 서로를 보았고, 모로는 베탕쿠르씨가 자신에게 하는 조언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써놨습니다.
그러나 브레게는 모로가 사치스런 낭비를 하고 있고 사업을 소홀히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점차 의심으로 자라났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여행하는 것도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그의 “러시아의 집(Maison de Russie)”를 가지고, 청산에 대한 최고의 방법에 대해 베탕쿠르와 상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생각을 곧 그만두었고, 그의 친구인 베탕쿠르에게 모로가 그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도록 맡겼습니다. 이들은 이전의 어려움을 넘기었고, 모로는 ‘당신의 믿음이 나에게 너무 귀중한 것이라 다시는 의심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라는 내용을 브레게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모로는 부분적으로 사업에 성공하였습니다.
스페인에서 지내는 동안, 베탕쿠르는 어떠한 브레게의 경제적 지원없이도 황실에 브레게를 소개시켜주었고, 많은 양의 시계들을 판매하였습니다. 1807년에 샹트 페테르부르크에 짧은 기간 여행하는 동안에, 그는 짜르를 만났습니다. 짜르는 베탕쿠르에게 러시아로 와 수압기술자 모임(Corps of Hydraulic Engineers)을 창설할 것을 제안했고, 그에게 이 단체의 장의 지위를 약속하였습니다.
베탕쿠르는 1808년 10월 19일에 샹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고, 다음날 모로를 만났습니다. 모로가 브레게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두 사람간의 공손어린 관계에 대해 써놓았고, 1809년까지 이들의 진심어린 관계는 지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주 서로를 보았고, 모로는 베탕쿠르씨가 자신에게 하는 조언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써놨습니다.
그러나 브레게는 모로가 사치스런 낭비를 하고 있고 사업을 소홀히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점차 의심으로 자라났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여행하는 것도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그의 “러시아의 집(Maison de Russie)”를 가지고, 청산에 대한 최고의 방법에 대해 베탕쿠르와 상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생각을 곧 그만두었고, 그의 친구인 베탕쿠르에게 모로가 그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도록 맡겼습니다. 이들은 이전의 어려움을 넘기었고, 모로는 ‘당신의 믿음이 나에게 너무 귀중한 것이라 다시는 의심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라는 내용을 브레게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모로는 부분적으로 사업에 성공하였습니다.
Breguet No. 2664,
Orloff왕자를 위해 분해검사를 한뒤 1814년에 판매하였다. 특별히 문페이즈(moon phase)를 표시하는 납작한 18K금이 있는 천문학 시계이다. garde-temp의 원리에 맞추어 제작하였다.
2001년 10월에 안띠꿔롬에서 프랑스롸 160,000Fr에 경매되었다.
Breguet No. 23/647,
18K 금으로 만든 시계이며, 15분 리피터가 달린 택트 시계이다. 셀프 와인딩 포켓시계이며, 1850년 6월 3일에 브루코씨(Monsieur Brocot)에게 팔렸다. 그리고 그 시계는 그의 폐하인, 러시아의 Grand Duc Constantin Nicolaevitch가 명을 내려 산 것이다.
마지막으로 2002년 안띠꿔롬(Antiquorum)에서 2002년 11월에 141,000Fr에 팔렸다.
Breguet No. 153/2461,
Garde-Temps 란 이름을 가진 시계로, 1808년에서 1809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동력저장 표시(power reserve indicaiton)이 있는 황금 포켓 크로노미터이다. 1826년에 러시아 대사인 포쪼 디 보르고 백작(Count Pozzo di Borgo)에게 팔렸다.
마지막으로 2000년 안띠쿼롬(Antiquorum)에서 120,000Fr에 팔렸다.
왜 브레게가 만든 물건들 중에 소수의 것들을 제외하고, 170여개 가까운 작품들이 1808년과 1810년 사이에 러시아로 판매되었는지에 대해, 위의 내용들이 말해줍니다.
브레게의 작품들의 유지보수를 위해 특별히 시계제작자들이 러시아로 특파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나폴레옹과 짜르 사이의 관계가 뚜렷하게 갈라서자, 1811년 봄에 모로는 러시아를 떠날 수 밖에 없었고, 그의 비품들을 비롯하여, 브레게의 물품들을 가져올 시간이 없었습니다. 모로는 베탕쿠르에게 아직까지 지급받지 못한 대금에 관해 쓴 문서들을 마꼈습니다.
브레게 있어서 “매죵 드 루시(러시아의 집, Maison de Russie)"를 접는 일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특히 영국과 스페인에서 자신의 고객들을 이미 잃어버린 이래로, 그는 다행히도 러시아의 귀족들의 대부분을 고객으로 확보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약 270여개가 넘는 작품들을 러시아에 팔았을 뿐만 아니라, 브레게란 이름은 러시아에서 크로노미티터(정밀 시계)와 동의어가 될 정도였으니까요.
이후에 러시아의 문학에서 여러번 브레게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그는 시계제작자로서의 명성이 대단했습니다.
1825년에 알렉산드르 뿌쉬킨(Alexander Pushkin)이 그의 예프네기 오네긴(Eugene Onegin)에 쎃기를 “그는 그의 아침 코트를 입고, 동시에 그의 머리에 길이가 긴 모자를 둘러쎃습니다. 그의 말은 광장을 산책할 것이며, 자유롭게 예프네기의 노트에 기록을 하는 중이다. 이 모든 것이 브레게가 만든 것의 도움이다. 점심먹을 시간이군..“
1814년에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브레게는 진취적인 대리자의 도움으로 러시아와 다시 사업적인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대리인의 이름은 러시아에서 판매되는 시계들의 확인서에 언급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브레게는 시계들의 유지보수를 위해 “모스코바는 Ferrier씨, St. Petersburg에서는 Perspective Nevski 66번가에 Wenham씨”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이 퇴위한 후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짜르 알렉산드르 1세는 1814년 8월 2일에 슬픔의 생 플로랑탱(Saint-Florentin)에 있는 탈레랑의 파리(Monsieur de Talleyrand’s Paris)란 저택에 머무는 중이었습니다. 짜르는 사람을 시켜 브레게를 부르고, 두 개의 시계를 샀습니다. 짜르가 이곳에 방문하는 동안에 아마도, 그는 No. 3825로 대변되는 “compteurs pour régler le pas des troupes”의 계열을 주문했습니다. 이 물건은 브로신 장군을 통해 짜르에게 배달되었습니다.(오늘날에는 브레게 박물관에 있습니다.). 그들의 황제처럼, 대부분의 러시아 귀족들은 그들이 파리를 여행할 때마다 브레게를 방문하여 대금을 지불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주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문한 물건들은 파리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을 통해 배달되었습니다. 코르시카인인 샤를 앙드레 포쪼 디 보르고(Count Charles André Pozzo di Borgo) 백작이 1826년 7월 18일에 파리에 러시아 대사로 왔었을 적에, 브레게에게 훌륭한 크로노미터 포켓 시계를 샀습니다.(오늘날 브레게 박물관에 있습니다.)
브레게가 러시아와 맺은 사업적인 관계는 지속되었고, 이후에 둘 사이의 좋은 관계는 1917년 10월 혁명에 의해 끝나게 되었습니다.
Breguet, No. 4821,
1842년 12월 3일에 파리에서 Fossin과 Fils가 당시의 프랑스 화폐로 2500Fr에 왕자인 A. Demidoff에게 팔았다.
특별한 이스케이프먼트(escpaement)가 있는 18K금과 하드스톤을 조합한 시계이다.
2001년 5월에 안띠꿔롬에서 경매되었으며, 프랑스 화폐로 160,000Fr 이다.
Breguet, No. 4288.
1823년에 시작했으며, 1831년에서 1833년 사이에 완성하였다. 1836년 10월 31일에 Théodore de Yermoloff에게 6,000Fr의 가격에 판매가 되었다.
18K 황금으로 되어있고, 두께가 얇으며, 초기의 키리스(keyless) 장치, 15분 리피터 장치가 있는 캘린더 시계이다. garde-temps의 원리에 맞추어 제작하였다.
2001년 8월에 안띠꿔롬에서 경매되었으며, 프랑스 화폐로 471,700Fr 에 팔렸다.
Written by Jean-Claude Sabrier(시계학 고문)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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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쓰
2007.06.26 19:27
아놔.. ㅠ_ㅠ 수정이 안되욤... 흑.. -
cr4213r
2007.06.26 19:34
헉!!! 역시 조용하시길래 잠수 타셨나했는데.. 이런 블럭박스터를.... 헉헉헉!!!!
혁쓰님 우수방으로 빨리 오세요~ 그럼 글작성이 편해지십니다~~~ 정말요~~~
선리플 후정독!!! -
bottomline
2007.06.26 20:07
우앗! 나른한 오후에 충격적인 글을 올려주셨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또 새로운 많은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 -
클래식
2007.06.26 20:12
오~ 이제 시계 전문 번역가로 나서도 되실 것같습니다.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
때똥
2007.06.26 21:17
흥미진진한 얘기 너무 재밋게 잘 보았습니다.. 출근하면 천천히 다시 잘 읽어봐야 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죠? ^^ -
토리노
2007.06.26 23:11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재밋는 역사의 한편을 보았네요..
러시아 사람들은 예전부터 국민성 자체가 시계를 좋아하는거 같습니다.
지금도 제 주위에서 가장 시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러시아인 선생님 두분인데요
가끔 틈나면 브랜드나 기계식시계에 관해 이야기를 하곤합니다.
마지막으로 어차피 영어권 발음이라 통용되면 크게 상관은 없지만
오타하나 지적해 드리면
"1825년에 알렉산더 푸스킨이 그의 유진 오네긴에 쎃기를... "
이라는 문장에서 "쎃기를"이 오타나신거 같고
- 말씀드린것처럼 영어권 발음이겠지만 원문으로는 "알렉산드르 뿌쉬킨"입니다.
워낙 러시아에서는 국민작가라 상식선에서도 아시는것이 좋을듯해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로 시작되는 시로 우리에게도 익숙하지요..
그리고 하나더 말씀드리자면 "유진 오네긴"이 아니라 "예브게니 오네긴"입니다. ^^
- 언급된것처럼 뿌쉬킨의 대표작 중 하나이지요.. -
혁쓰
2007.06.27 08:41
모두들.. 감사합니다.
토리노님, 알렉산드르 이군요.. ^^;; 근데요.. 수정할려고 하는데 수정버튼이 누가 먹었나 읎써용 ㅠ_ㅠ
근데 혹시 Zarenne 란 뜻을 아시나요? 모로의 별명인데, 제가 저 뜻을 몰라서 그냥 써놨다는 아시는 분?? 손? 아니 리플~~ -
토리노
2007.06.27 10:03
Zarenne도 러시아어 같은데 원어를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Z는 두가지 발음이 있는데 ЗАРЕННЫЙ라고 하면 뭔가 탐내는 욕심장이 정도로 뜻이되고
ЖАРЕННЫЙ하면 튀긴~ 의 뜻이 됩니다.
별명이니까 이유가 있겠지요.. ^^ -
헌터
2007.06.27 10:21
매우 매우 잘 읽었습니다. 두고 두고 다시 읽어봐야 할 글. -
알라롱
2007.06.27 10:33
오홋. 토리노님이 이렇게 정상적인 댓글 다는걸 정말 오래간만에 봅니다. 혁쓰님의 멋진 글 감사합니다. 수정 버튼을 얼릉얼릉 만들어 드려야죵~~ㅎㅎㅎㅎ (수정 완료가 되면 번역게시판으로 복사하겠습니다. 수정 완료후 댓글로 완료를 알려주시기를) -
혁쓰
2007.06.27 13:31
아.. 토리노님 그렇군요.. 짜레네.. 가 원어가 아니라, 그냥 영문으로 되어있어서요.
욕심꾸러기? 욕심쟁이? 욕심이? 욕심많은넘? 기타등등으로 해석할수 있겠네요 ^^ -
때똥
2007.06.27 14:26
토리노님의 러시아어 입력도.. 대단하시네요.. ^^ -
혁쓰
2007.06.28 09:17
완료요 ^^;; -
운리끼
2007.07.20 23:28
젠장 브레게 정장용 반드시 구매합니다!!! -
혁쓰
2008.03.01 03:19
아.. 번역 잘못된 것 수정합니다. telegraph 전신기라고 했는데, 전신기가 아니라 시계를 이용한 시간측정장치의 일종입니다. -
위하여
2011.10.25 11:20
열정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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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암
2013.12.23 16:01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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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
2014.07.07 22:51
브레게 역사가 한눈에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