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시린 음악과 함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나 우수아이아로 향합니다.
바람마저 얼어붙어 정지할 것 같은 이 곳은, 남미의 최남단, 더 내려가면 남극 밖에 없는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입니다.
우수아이아는 비글 해협을 끼고 발달한 항구 도시입니다. 티에라 델 푸에코(Tierra del Fuego - "불의 땅") 제도의 주도인데, 이렇게 추운 곳에 어울리지 않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티에라 델 푸에고는 1520년 이 곳을 처음 발견한 마젤란이 붙인 이름으로, 당시 원주민들이 매우 추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반나체로 생활해 항상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모습에서 따온 것이랍니다.
우수아이아에서는 고개만 들면 어디서나 "세상 끝"이라는 뜻의 문구 Fin del mundo를 만납니다. 거리에 즐비한 상점 간판도 이런 식입니다. 세상 끝 세탁소, 세상 끝 카페, 세상 끝 마트...Fin del mundo 문구에 둘러싸여 거리를 걷다가 문득, 한 호스텔 입구의 표지판에 눈길이 갑니다.
한국에서부터 15,811Km. 지구 반대편 끝으로 참 멀리 떠나왔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먼 거리를 떠나온 것일까? 묻고 또 물어봅니다.
무거워진 머리를 식힐 겸, 우수아이아 뒤를 병품처럼 감싸고 있는 산에 오릅니다. 여기서는 작지만, 생생한 빙하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산하는 길에 예쁜 카페에 들러 핫초코로 몸을 데웁니다. 카페 분위기가 꼭 크리스마스 같습니다. 5월의 크리스마스.
우수아이아에서는 킹크랩을 싼 값에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수기인 5월에는 킹크랩 전문점들이 대부분 문을 닫습니다. 힘겹게 한 가게를 찾아 킹크랩을 맛 봤는데, 제철이 아니라 그런지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습니다.
우수아이아에 오면, 많은 여행자들이 지인에게 엽서를 보냅니다. 한국까지 보내려면 우표값만 35,000원 드는데다, 도착하려면 짧게는 한달, 길게는 석달 이상 걸립니다. 그래도 세상 끝 우수아이아아의 소인이 찍힌 엽서를 선물하고자, 부모님, 조카들, 친구들에게 빼곡이 엽서를 적어 보냅니다. 엽서 쓰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늦게 잠 들었습니다.
다음날, 비글해협 투어를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부두로 향합니다. 이곳은 위도가 높아 겨울인 5월에는 해가 늦게 뜹니다. 우수아이아의 거리는 오전 9시인데도 컴컴해서 가로등을 켜둡니다.
배를 타고 부두를 떠나 비글해협으로 나섭니다.
비글해협에서 늦은 아침을 맞는 물개떼를 만납니다. 비글해협은 펭귄의 서식지로도 유명한데, 이미 겨울이 되어 펭귄들은 더 따뜻한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물개들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어보세요. 사람의 생활공간이 넓어질수록 이 녀석들의 터전은 줄어간다고 합니다. 물개들이 건강하게 겨울을 났으면 좋겠습니다.
동물들이 살지 않는 작은 섬에 내려 짧은 산책도 즐깁니다.
배를 타고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영화 [해피투게더]에 나왔던 세상 끝 등대에 도착합니다. 최남단에 홀로 외로이 서 있는 에끌레르 등대.
스무살 때 [해피투게더]를 본 후, 아물지 않는 슬픈 기억들은 고이 간직해뒀다가 영화에서처럼 여기서 버리자고 마음 먹어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알겠더군요. 슬픔은 세상 끝에서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도무지 아물지 않을 것 같던 상처들도 긴 시간이 지나면서 딱지가 앉아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상처입은 나를 끌어안고 세상 끝을 너머 더 나아가는 것이 결국 삶이라는 생각에, 슬펐던 기억을 꺼내는 대신, 아내와 함께 즐겁게 웃어 봅니다.
다시 부두로 돌아와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으로 향합니다. 국립공원에서는 빼어난 경관을 볼 수 없지만, 긴 세월 동안 떼묻지 않은채 보존된 자연상태 그대로의 숲과 호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무가 죽어 하얗게 굳거나, 그 위에 이끼와 곰팡이가 피고, 다시 그 위에 덩쿨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 완벽한 보존 상태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숲을 찾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어떻게 이렇게 잘 보존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던 찰라, 숲의 파수꾼이 곁을 지나갑니다.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에는 식물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야생동물들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비버나 여우를 만날 수 있다는데, 아쉽게도 그 둘은 보지 못 했고, 대신 거대한 야생마를 만났습니다. 이 녀석 키가 사람 만하더군요. 굵고 튼튼한 다리를 보니, 저게 원래 말의 모습이구나 싶습니다.
2. 지상 낙원, 칼라파테
우수아이아의 짧은 여정을 마치고, 북으로 방향을 틀어 칼라파테로 향합니다. 누군가 남미에서 딱 한군데만 방문하기를 원한다면, 저는 주저없이 칼라파테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빼어난 경관, 깨끗한 물과 공기, 넘치는 삶의 여유가 여행자의 발을 붙들어 눌러 앉고 싶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인 곳입니다. 아르헨티나 국기도 칼라파테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3대 대통령인 마누엘 벨그라노가 칼라파테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칼라파테의 하늘, 하얀색의 빙하, 칼라파테를 둘러싼 호수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었답니다. 칼라파테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은퇴한 후에 가장 살고 싶어하는 곳이라는데, 며칠만 머물러본 저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칼라파테에서, 이번 여행 최고의 경관을 만납니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 그동안 제 인생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풍경은 그랜드 캐넌이었는데, 이번 여행을 하면서 그랜드 캐넌이 3위로 밀려나 버렸습니다. 모레노 빙하가 첫번째, 그리고 이과수 폭포가 두번째입니다.
모레노 빙하를 전망대에서 마주한 모습인데, 사진이나 동영상으로는 그 장엄함을 표현하는 게 역부족입니다. NASA에서 위성으로 촬영한 사진을 보면 그 크기가 대충 짐작될 것입니다.
모레노 빙하는 거대한 빙하의 작은 일부분이고, 저 위의 사진은 빙하의 가장자리만 찍은 것입니다. 상공에서 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그래도 감이 잘 안 오신다면, 아래 사진에서 사람을 찾아보세요. 빙하가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할 수 있을겁니다.
전망대에서 사람들이 몇 시간동안 숨죽여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빙벽이 붕괴하는 순간입니다.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와 함께 거대한 빙벽이 주저앉는 장면은 정말 장관입니다.
이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빙하 위를 걸어볼 차례입니다.
아이젠을 신고 빙하 위에 오릅니다. 처음에는 뒤뚱뛰둥 발걸음 옮기기가 어려운데, 금새 익숙해져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빙하 위를 가이드 없이 혼자 돌아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빙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입니다. 모레노 빙하는 가운데 부분이 하루 2m, 가장 자리가 하루 40cm씩 확장되고 있습니다.
위 사진이 빙하가 하루만에 움직인 정도라면 실감이 가실 겁니다. 가이드들도 똑같은 길로 다니는 게 아니라, 매일 아침 안전한 지대를 미리 점검하고 움직인다고 합니다.
빙하의 푸른 빛은 정말 오묘합니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흰색인데, 멀리서 바라보면 신비한 푸른빛이 돕니다.
빙하 트래킹을 무사히 마치고, 깨끗한 빙하 얼음을 쪼개 위스키를 한 잔 마십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저에게도 꿀맛입니다. 위스키보다 맛있는 얼음 덕분인 것 같습니다.
지구별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감탄하며 선착장 바위에 올라서서 모레노 빙하를 다시 한 번 둘러봅니다. 이런 장관을 만나다니! 역시 태어나길 잘 했습니다.
모레노 빙하 투어를 마치고 돌아와, 가우초의 집을 방문합니다. 미국에 카우보이가 있다면, 아르헨티나에는 가우초가 있습니다. 카우보이가 단순한 목축업자가 아닌 서부의 개척자인 것처럼, 가우초들도 이민 초기에 척박한 땅을 일구며 말과 소들을 키워낸 개척자입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에선 가우초에대한 존경심이 높고, 많은 가우초들이 대를 이어 가업을 이어간다고 합니다. 마테차를 나눠 마시며 가우초의 삶을 들으니, 부럽기 그지 없습니다.
가우초의 도움을 받아, 난생 처음 승마에 도전해 봅니다.
칼라파테에서 하는 승마는 정해진 트랙을 따라 천천히 말을 타는 게 아니라, 초원을 내달랍니다. 말이 워낙 말을 잘 들어서, 처음인데도 아주 쉽게 탔습니다.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말탄채 사진을 찍는 여유까지 부립니다.
이 소중한 여행에 Sinn 857 UTC가 함께 해 주었습니다.
세상 끝에서도, 빙하 위에서도, 눈 덮힌 산 속에서도 Sinn은 정확하게 뛰어주었습니다.
세상 어디를 가건, 여행에서 Sinn은 진리입니다.
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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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우노
2015.06.16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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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매
2015.06.16 02:03
857이 호강하네요!! 세계일주 할 기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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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sate
2015.06.16 07:24
정말 멋진 사진들입니다~! 저는 방안에만 있어도 좋으니 일 걱정 없이 딱 일주일만 놀아봤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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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i99
2015.06.16 07:55
늘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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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abiyau
2015.06.16 08:56
정성어린 여행기 잘 봤습니다.
저도 여행가고 싶어지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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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man
2015.06.16 09:19
좋은 사진 많이 보고 갑니다. 영화도 찾아봐야 겠습니다.
특히 야생마 사진 너무 멋집니다.
간접 경험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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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미스훈
2015.06.16 10:56
너무멋진 사진으로 대리만족하게 해주셔서 추천 10방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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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erome
2015.06.16 12:51
조용히 추천 남깁니다. 정말 멋집니다. 시원하니 눈이 상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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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롱이형
2015.06.16 14:57
오멘티에님, 사진도, 글도, 동영상도 전부 멋지네요!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해서 봤습니다.
"대박~!" 하고 외치신 부분에서는 웃음이! ㅎㅎ
BBC의 지구별 여행 동영상은 너무 아름답네요.
집에서 아가랑 함께 봤습니다.
아름다운 여행기에 추천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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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만량
2015.06.16 16:17
추천을 한번밖에 못드린다는게 아쉬울 정도의 말그대로 "안구정화" 포스팅인거 같습니다!! 정말 멋지고 정성스러운 포스팅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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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알라
2015.06.16 18:12
엄청난 양의 포스팅
좋은 여행... 좋은 사진... 좋은 시계는 덤...
정말 잘 보았습니다.
이런글은 추천해야할거같아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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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2386
2015.06.16 20:00
와~~~ 경치 끈내주내요~~~! 시계역시~!!!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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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덕시덕열매
2015.06.16 21:27
정말 정성이 가득합니다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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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assik
2015.06.16 21:31
마지막 시계사진이 인상적입니다. 여행기 잘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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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크쟁이
2015.06.17 02:19
아..남미 끝장이네요..다시 한번 꼭 가야겠단 맘이 드네요..
좋은 여행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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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aeugene
2015.06.17 09:56
5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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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시계
2015.06.17 23:26
이런 멋진 사진과 설명 참 고맙습니다.
간접여행이 되었는 것 같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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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매
2015.06.19 10:02
잘봤습니다. 아주 멋진 사진들이 많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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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거북이
2015.06.19 10:03
대박입니다.. 자연의 웅장함에 왠지 숙연해지네요.
특히 모레노 빙하는 정말 가보고 싶습니다.
일단 Sinn 을 하나 들이고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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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자르
2015.06.22 02:04
여행기 정말 잘 보았습니다. ㅎㅎ 그동안 정말 쉬지않고 달려오셨을것에 짐작하여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ㅎ 같으면서도 약간 다른 분야의 길을 걷고있는 저도 상당히 감회가 새롭게 다가오는 여행기인것 같습니다. 엊그제 저도 일을 그만두고 약 한달정도 미국을 다녀왔는데 여행하면서 들었던 생각이나 여러가지로 비슷한 좋은 경험이셨을거라 생각됩니다 저도 꼭 남미에 가보고싶네요 잘보았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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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dy
2015.06.30 13:43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유럽북구의 모습과 비슷한것 같습니다. 보는것만으로도 환상속으로 빠져드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worb
2015.06.30 23:56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여행기입니다. 보고 있는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오셨겠지요..
너무 부럽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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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따뜻한나라만 찾는 저로선 신기하고 멋진 영상과 사진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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