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TF리뷰
댓글작성 +2 Points

KIMI-7

조회 8487·댓글 143
2.jpg
- 샌드위치 다이얼(사진 : 파네라이)

이탈리아 왕실 해군에 군용 장비를 납품한 파네라이(Panerai)는 일각을 다투는 극한의 상황에서 다이버의 생명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임무 완수를 위한 보좌관이 되어 줄 시계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핵심은 가독성과 방수였습니다. 오늘날 파네라이를 대변하는 라디오미르, 루미노르, 샌드위치 다이얼, 크라운 가드는 다이버 워치의 개념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파네라이가 내놓은 해답이었습니다. 수많은 파네리스티를 양산한 독창적인 디자인은 기실 철저하게 기능을 우선시한 합리주의의 산물이었습니다. 

1.jpg
- 1956년작 이기지아노. 라디오미르와 루미노르 버전으로 각각 출시됐습니다.(사진 : 파네라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파네라이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파네라이의 고객은 이탈리아 해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파네라이는 1956년 이집트 해군에 이기지아노(Egiziano, 이집트인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시계(GPF 2/56)를 공급했습니다. 케이스 지름이 60mm, 두께는 19mm나 된 이 시계는 잠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12시 방향에 야광 포인터를 삽입한 회전 베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안젤루스(Angelus)의 무브먼트는 최대 8일동안 멈추지 않고 작동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시계가 훗날 등장하는 다이버 워치 탄생에 단서를 제공할 것을 말입니다. 

190517_TF_Panerai_5602(2).jpg

파네라이는 올해 라인업 정비에 나섰습니다. 루미노르는 루미노르 1950와, 라디오미르는 라디오미르 1940와 통합했습니다. 손목이 얇은 사람과 여성을 겨냥한 루미노르 두에는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별도의 컬렉션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파네라이는 남은 한 자리를 루미노르의 구성원이었던 섭머저블에게 맡겼습니다. 파네라이는 신규 컬렉션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이기지아노의 후예들을 무더기로 공개했습니다. 이번 리뷰에서 소개하는 섭머저블 카보테크™ 47mm(PAM01616)는 2019년 신작으로, 2015년에 출시한 루미노르 섭머저블 1950 카보테크™(PAM00616)의 후속에 해당하는 제품입니다. 

190517_TF_Panerai_5617(2).jpg

지름이 47mm인 케이스는 카보테크™(carbotech™)로 제작했습니다. 파네라이가 시계 업계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이 합성 소재는 카본 섬유(carbon fiber)와 폴리머(polymer) 그리고 내열성이 뛰어나 자동차 및 항공, 우주 산업에서 주로 쓰이는 폴리에텔 에텔 케톤(polyether Ether Ketone, PEEK)을 혼합한 뒤 고온, 고압으로 압축해 얻어냅니다. 이 과정에서 카보테크™만의 독특한 무늬가 생겨납니다.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포지드 카본(forged carbon)이나 카본 씬 플라이(carbon thin ply)와 비교하면 무늬가 균일한 편입니다만 개체마다 분명 차이는 있습니다. 카본 계열의 소재가 그러하듯이 카보테크™ 역시 가볍지만 단단하며, 충격과 스크레치에 강합니다. 아울러 내부식성도 뛰어납니다. 모서리는 적당히 각을 살렸고, 전반적으로 거슬리는 부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잘 다듬었습니다. 방수는 300m로, 전문가용 다이버 워치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190517_TF_Panerai_5666(2).jpg
190517_TF_Panerai_5648(2).jpg

오작동을 피하기 위해 한쪽으로만 회전하는 베젤도 카보테크™로 제작했습니다. 1분에 한 칸씩 움직이는 베젤은 파형처럼 퍼져나가는 듯한 무늬를 띄고 있습니다. 5분 간격으로 구멍을 뚫고 동그란 인덱스를 삽입했으며, 15분까지는 별도로 파란색 표식을 남겼습니다. 측면에는 홈을 새겨 장갑을 낀 상태에서도 수월하게 조작할 수 있습니다. 

190517_TF_Panerai_5637(2).jpg
190517_TF_Panerai_5668(2).jpg

크라운 가드는 툴 워치의 성격이 짙은 섭머저블에서 더욱 돋보입니다. 레버를 젖히고 크라운을 돌리면 와인딩을 할 수 있습니다. 크라운을 한 칸 뽑으면 시침만 한 시간 단위로 조작하거나 날짜를 변경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각광받고 있는 GMT나 듀얼 타임 시계처럼 복수의 시간대를 표시하진 않지만 해외 여행과 출장이 잦은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적절히 대응합니다. 날짜는 시침의 움직임에 연동합니다. 크라운을 끝까지 뽑은 상태에서는 시간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해킹 레버가 밸런스 휠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아 정확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습니다. 

190517_TF_Panerai_5632(2).jpg

12각면으로 깎은 케이스백의 소재는 카보테크™가 아닌 티타늄입니다. 가장자리에는 브랜드와 컬렉션의 이름을, 손목과 밀착하는 중앙에는 파네라이의 뿌리를 상기시키는 글귀(Firenze 1860)와 스스로를 희생한 영웅들의 모습을 담은 유인 어뢰 ‘피그(pig)’를 각인했습니다. 

190517_TF_Panerai_5692(2).jpg

슈퍼루미노바를 블록 형태로 가공한 인덱스는 다이얼을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생존을 위한 장치를 표방하는 시계답게 평범한 일상은 물론이고 빛이 온전히 도달하지 못하는 심해나 어두운 곳에서도 빠르게 시간을 확인하는 데에 중점을 뒀습니다. 베젤 12시 방향에 설치한 포인터와 분침은 초록빛을 뿜어내며 파란색으로 발광하는 시침 및 인덱스와 대비를 이룹니다. 동 컬렉션의 많은 모델이 분침과 베젤 포인터에 파란색 슈퍼루미노바를 쓰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190517_TF_Panerai_5655(2).jpg

거친 질감으로 표현한 다이얼은 흰색과 파란색을 섞어 청량한 느낌을 살렸습니다. 투박한 구성이지만 파네라이를 정의하는 요소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섭머저블이 독립을 쟁취하면서 루미노르라는 글자는 사라졌습니다. 6시 방향에는 오토매틱과 방수 능력을 기재했습니다. 전에는 기술적 성취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 카보테크를 적었으나 여기서는 삭제했습니다. 속을 파낸 시침과 분침은 축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집니다. 아울러 축을 넘어서도 형태가 지속되면서 세련되고 날렵한 맵시를 뽐냅니다. 9시 방향의 빈 공간은 스몰 세컨드 다이얼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초침에도 파란색 슈퍼루미노바를 칠했습니다. 15초 간격으로 설치한 바 인덱스와 달리 흰색 원형 인덱스는 야광 기능이 없습니다. 3시 방향에는 날짜 창이 있습니다. 큼직큼직한 요소가 많아서인지 상대적으로 날짜가 작게 느껴집니다. 

1325312.jpg

매뉴팩처 셀프와인딩 칼리버 P.9010은 과거에 워크호스로 활약한 셀프와인딩 칼리버 P.9000의 성능을 넘어섭니다. 칼리버 P.9010은 밸런스 휠을 양쪽에서 지지하는 브리지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한쪽에서 고정하는 것보다 안정적이고 견고합니다. 브리지 아래에는 밸런스의 높이를 정교하게 조정할 수 있는 나사도 있습니다. 이스케이프 휠은 무게를 줄여 에너지 전달 효율을 높인 것으로 보입니다. 셀프와인딩 메커니즘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칼리버 P.9000은 두 개의 갈고리(pawl)가 달린 레버가 로터의 회전 방향에 관계없이 와인딩 휠을 감아주는 래칫 방식을 채용했습니다. 동 그룹 내 자매 브랜드의 베이스 무브먼트에서 자주 발견되는 양식입니다. 보메 메르시에의 보매틱(Baumatic), 까르티에의 칼리버 1904(바쉐론 콘스탄틴 칼리버 1326)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리치몬트 그룹의 싱크탱크 발 플러리에(Val Fleurier)가 개발에 깊이 관여했다는 겁니다. 그에 반해 칼리버 P.9010은 ETA나 롤렉스에서 볼 수 있는 리버싱 휠(reversing wheel)을 사용했습니다. 

190517_TF_Panerai_5664(2).jpg

범용성 측면에서도 칼리버 P.9010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칼리버 P.9010의 지름은 13¾리뉴(약 31mm)로 칼리버 P.9000과 동일합니다. 두 개의 배럴로 구현하는 72시간 파워리저브를 비롯해 시간당 진동수(4Hz)도 똑같습니다. 둘의 뚜렷한 차이는 두께입니다. 칼리버 P.9000의 두께가 7.9mm인 반면, 칼리버 P.9010은 6.0mm에 불과합니다. 시계의 세계에서 1.9mm는 엄청난 격차입니다. 덕분에 칼리버 P.9010은 육중한 크기를 자랑하는 섭머저블 47mm 모델은 물론이고 루미노르 42mm처럼 작은 모델에까지 폭넓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190517_TF_Panerai_5623(2).jpg

물속에서도 걱정 없이 착용할 수 있는 검은색 러버 스트랩은 파란색 OP 로고로 장식했습니다. 파네라이의 이름을 새긴 버클은 블랙 DLC 코팅한 티타늄으로 제작했습니다. 카보테크™ 케이스와 러버 스트랩은 궁합이 좋은 데다가 생김새와 다르게 가벼워 산뜻한 착용감을 선사합니다. 

190517_TF_Panerai_5675(2).jpg

섭머저블 카보테크™는 47mm(PAM01616)와 42mm(PAM00960),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뉩니다. PAM00960은 칼리버 P.9010 대신 칼리버 OP XXXIV를 탑재했습니다. 파워리저브는 72시간, 시간당 진동수는 28,800vph(4Hz)입니다. 그 밖의 제원은 PAM01616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격은 PAM01616이 2100만원, PAM00960이 2050만원으로 같은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스테인리스스틸 모델보다 두 배 가까이 비쌉니다. 카보테크™의 장점은 분명 특기할 만하나 단순히 이것만으로 높은 가격을 논하기에는 조금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일 수 있습니다. 

190517_TF_Panerai_5619(2).jpg

파네라이는 역사적 배경과 연관된 세밀한 디테일을 교묘하게 조합해 수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갖가지 기능으로 무장한 무브먼트와 카보테크™처럼 독특한 소재까지 끌어들여 자신들의 세계를 무한히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제품 촬영:
권상훈 포토그래퍼


타임포럼 뉴스 게시판 바로 가기
인스타그램 바로 가기
유튜브 바로 가기
페이스북 바로 가기
네이버 카페 바로 가기

Copyright ⓒ 2024 by TIMEFORUM All Rights Reserved.
게시물 저작권은 타임포럼에 있습니다. 허가 없이 사진과 원고를 복제 또는 도용할 경우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