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포럼이 모처럼 오피치네 파네라이(Officine Panerai, 이하 파네라이)의 시계 리뷰를 하고자 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2017년 말에 출시된 모델이지만 국내 매장에는 올해 입고된 신제품, 라디오미르 3 데이즈 아치아이오 - 47mm(Radiomir 3 Days Acciaio - 47mm) Ref. PAM00720이 그 주인공입니다.
특허 등록된 독창적인 크라운 보호 장치를 특징으로 하는 루미노르 시리즈에 비해 라디오미르는 상대적으로 인기는 다소 못 미치지만, ‘파네리스티’로 불리는 소위 마니아들 특히 빈티지 파네라이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각별한 존재로 통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초의 파네라이 손목시계로 알려진 Ref. 2533과 뒤를 이은 Ref. 3646 모델들이 바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라디오미르 컬렉션의 원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라디오미르는 군용 다이버 워치의 전설에서 어느덧 현 파네라이를 대표하는 아이코닉 컬렉션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오리지널 프로토타입의 디자인적인 특징들과 고유의 DNA를 훼손 없이 충실하게 계승함으로써 골수 파네리스티들의 특별한 애정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 1936년 최초의 파네라이 프로토타입 Ref. 2533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라디오미르 S.L.C. 3 데이즈 아치아이오 - 47mm PAM00425
오리지널 모델과 달리 다이얼 하단에 토피도(어뢰)를 탄 잠수대원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일명 '피그(Pig)' 엠보싱 로고를 확인할 수 있다.
- Ref. 2533을 원형에 가장 가깝게 재현한 스페셜 에디션, 라디오미르 S.L.C. 3 데이즈 아치아이오 - 47mm PAM00449 (750피스 한정)
오리지널 프로토타입과 마찬가지로 블루 스틸 핸즈를 사용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라디오미르’는 원래 파네라이가 1916년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특허를 출원한 라듐 베이스의 방사성 야광 도료를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1860년 지오바니 파네라이(Giovanni Panerai, 1825~1897)가 피렌체에 회사를 창립한 이래 이탈리아 왕실 해군에 작전용 장비들(ex. 어뢰 발사기, 나침반, 수심계 등)을 공급해온 파네라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시계제조사로서 사업 영역을 확장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왕실 해군의 요청으로 잠수 특수부대원들이 작전 도중 착용할 수 있는 튼튼한 손목시계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1926년 세계 최초의 손목시계용 방수, 방진 케이스 오이스터(Oyster)를 개발해 실력 있는 시계제조사로 급부상한 롤렉스(Rolex)의 도움을 받아(케이스 및 무브먼트 등) 1936년 첫 프로토타입을 완성하게 됩니다.
- 이탈리아 왕실 해군 소속 잠수 특수부대원들
애초 해군 잠수부대원들을 위해 특별 주문 제작된 만큼 파네라이 최초의 손목시계에는 몇 가지 엄격한 선결 조건이 요구되었는데, 다이빙 수트 위에 착용시 단번에 시간을 확인하기 좋도록 커다란 직경(47mm)의 방수 케이스에 이를 손목 위에 고정할 수 있는 별도의 고정 장치와 긴 가죽 스트랩을 갖추고, 혹독한 작전 환경에서도 정확한 시간을 보장하는 튼튼한 설계의 크로노미터급 무브먼트를 탑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단 1피스 제작된 최초의 프로토타입 Ref. 2533과 이어진 좀 더 제너럴한 버전인 Ref. 3646은 이러한 조건에 이상적으로 부합했고, 시계 다이얼에 사용된 특허 야광 물질에서 착안해 차츰 라디오미르라는 이름을 시계명처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 라디오미르 오리지널 프로토타입 Ref. 3646
라디오미르는 20세기 초반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특징들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비단 파네라이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계제조사들은 기존의 회중시계 케이스에 납땜으로 와이어를 부착해 스트랩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손목시계를 제작하곤 했는데, 손목시계의 기본적인 개념조차 형성되지 않았던 시대인데다 손목시계용 무브먼트도 따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중시계용 무브먼트를 재활용하기 위한 나름의 방안인 셈입니다. 193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시계제조사로서의 경력이 전무함에도 파네라이가 라디오미르와 루미노르와 같은 전례 없이 독창적인 시계들을 선보일 수 있었던 데는 어찌 보면 시대적인 특수성과 비통상적인 제작 배경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애당초 이탈리아 왕실 해군의 요청이 없었더라면, 당시 라디오미르와 같은 혁신적인 특허 발광도료를 개발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파네라이 컬렉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새로운 라디오미르 3 데이즈 아치아이오 - 47mm 스페셜 에디션은 1930년대 말 탄생한 오리지널 라디오미르 프로토타입의 향취를 느끼기에 충분한 제품입니다. 오리지널 모델과 동일한 47mm 직경의 오버사이즈 쿠션형 스틸 케이스에 일반적인 러그를 대신하는 와이어 루프와 야광 도료를 듬뿍 도포한 특유의 미니멀한 다이얼, 로버스트한 수동 무브먼트, 빈티지한 느낌의 스트랩까지 마니아들의 기대치를 조금도 빗겨가지 않습니다. 매우 보수적이고 일견 안전해 보이는 선택이지만 컬렉션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그 어느 브랜드보다 강조하는 파네라이로서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계애호가가 아닌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전작들과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파네리스티들에게는 이 미묘한 차이야말로 파네라이 컬렉션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라 할 것입니다.
- PAM00720(좌) & PAM00721(우)
라디오미르 3 데이즈 아치아이오 - 47mm 스페셜 에디션은 두 가지 버전으로 출시됩니다. 하나는 다이얼에 브랜드 로고가 있는 Ref. PAM00720이고, 다른 하나는 로고가 아예 없는 그래서 이탈리아어로 무명을 뜻하는 아노니모(Anonimo)라는 별칭이 붙은 Ref. PAM00721입니다. 다이얼 디테일을 제외하면 두 모델의 스펙은 거의 동일하지만, 로고가 있는 쪽(PAM00720)이 500개 한정으로 좀 더 귀한(?)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 1938년 제작된 첫 샌드위치 다이얼 샘플
두 버전 모두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에 걸쳐 제작된 역사적인 Ref. 3646 모델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Ref. 3646 프로토타입은 과거 몇 가지 베리에이션으로 제작되었는데, 로마 숫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다이얼 상하로 분할 사용한 일명 캘리포니아(California) 다이얼 버전을 비롯해, 바와 아라비아 숫자(12-3-6-9)를 사용한 특히 샌드위치(Sandwich) 다이얼(두 겹의 플레이트를 중첩하고 인덱스 자리에 야광 도료인 라디오미르를 채운 다이얼) 버전은 가장 유명해서 현재까지 파네라이하면 떠오르는 아이코닉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무-로고 다이얼 버전은 독일의 해군 특수부대 캄푸슈비머(Kampfschwimmer)에 납품된 적이 있습니다. 로고 및 기타 프린트를 생략한 이유는 당시 독일 군납용 시계(일례로 파일럿 시계)가 대부분 무-로고 다이얼이었던 것을 상기할 때 독일군 측에서 사전에 요청했기 때문이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차치하더라도 무-로고 샌드위치 다이얼은 특유의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미니멀한 다이얼 디자인이 한층 부각되는 측면과 함께 오롯이 시계 고유의 특성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라디오미르 3 데이즈 아치아이오 - 47mm 스페셜 에디션은 매트한 질감의 블랙 컬러 샌드위치 다이얼은 물론, 테두리 열처리한 블루 스틸 핸즈까지 오리지널 프로토타입의 그것을 그대로 재현해 인상적입니다. 타임포럼은 두 스페셜 에디션 중 다이얼에 로고가 살아있는 500개 한정 모델인 Ref. PAM00720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스테인리스 스틸(316L) 소재의 케이스는 전체 세심하게 폴리시드 가공 마감되었습니다. 오리지널 모델과 동일한 사이즈(47mm)로 케이스 직경이 꽤나 크지만, 손목에 올렸을 때 그리 위화감이 들지 않은 이유는 아무래도 일반적인 시계들처럼 케이스 본체와 일체화된 돌출형 일자 러그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케이스 양쪽에 마치 짐승의 뿔처럼 연결된 두 쌍의 와이어드 러그는 일자형 드라이버를 이용하면 쉽게 탈착이 가능해 파네라이 시계의 또 다른 매력인 스트랩 교체(일명 ‘줄질’)의 묘미를 즐길 수 있습니다.
케이스 본체에서 위로 돌출된 베젤 역시 폴리시드 가공하고, 전면 글라스는 위로 불룩하게 솟은 돔형의 플렉시글라스를 사용해 특유의 빈티지한 감성을 더합니다. 참고로 원목 프레젠테이션 박스에는 기본 구성품 외 과거 PAM00372가 그러했듯 교체 가능한 플렉시글라스 하나를 추가로 더 제공하고 있습니다.
블랙 샌드위치 다이얼에는 의도적으로 올드 라듐톤을 연상시키는 베이지 컬러 야광도료를 사용해 레트로한 감성을 더합니다. 12시 방향의 라디오미르와 파네라이 영문 로고 역시 일반적인 프린트 방식이 아닌 음각으로 파낸 다음 베이지 컬러를 채워(단 야광도료는 아님) 바탕의 샌드위치 다이얼과 어울리는 조합을 보여줍니다. 이 또한 PAM00372 등 기존 모델에서 볼 수 있는 구성이기에 새롭지는 않습니다만 이러한 익숙함이야말로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분필을 연상시키는 길쭉한 바통 핸즈는 오리지널 Ref. 3646과 마찬가지로 열처리한 블루 스틸 핸즈입니다. 특히 시를 가리키는 핸드의 디테일(가운데 분절된 형태)부터 오리지널 그대로입니다. 오리지널 3646 캘리포니아 다이얼 버전의 충실한 재현이라 할 만한 현행 모델(PAM00424)이 골드톤 핸즈를 사용한 것을 상기할 때 블루 핸즈의 사용은 빈티지 모델의 가치를 중시하는 마니아라면 더욱 반색할 만합니다. 시분 핸즈 중앙에는 또한 다이얼의 아워 마커와 마찬가지로 베이지 컬러 야광도료를 사용했습니다.
시와 분만을 표시하는 타임온리 형태는 파네라이가 추구하는 컬렉션의 방향성과도 부합합니다. 군용 다이버 워치의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디테일을 최대한 배제하고 단순한 디자인을 고수한 것이 현재는 파네라이 스타일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로 인식되고 있듯이, 파네라이는 자신들이 취해야 할 바를 영리하게 잘 알고 있습니다. 시와 분을 가리키는 핸즈는 스크류 다운 크라운을 풀러 조정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시계들처럼 크라운을 끝까지 뺀 상태에서 시분침을 모두 움직일 수 있고(단 핵기능은 지원하지 않음), 크라운 1단에서 시계 방향으로 조작하면 시침만 흡사 GMT 핸드처럼 1시간 단위로 개별 조정이 가능합니다. 이는 12각이 있는 스타 휠과 작은 스프링 클러치 부품에 의해 제어되고, 최근 여러 브랜드들의 인하우스 무브먼트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무브먼트는 스위스 뇌샤텔에 위치한 파네라이 매뉴팩처에서 자체 개발 제작한 인하우스 수동 칼리버 P.3000를 탑재했습니다. 2010년 데뷔한 파네라이의 대표적인 쓰리 데이즈(약 72시간) 파워리저브 수동 베이스로 직경 16½ 리뉴, 두께 5.3mm 크기 안에 더블 배럴을 포함한 총 161개의 부품과 21개의 주얼로 구성돼 있습니다. 3/4 플레이트 구조로 견고함을 특징으로 하며, 기존의 P.3000과 달리 하단 브릿지를 투 피스로 쪼개 좀 더 곡선미를 강조하고 기어 트레인의 주요 휠을 더욱 잘 보이게 한 점이 돋보입니다. 파네라이는 최근 들어 일부 스페셜 에디션에 이러한 차별화된 형태의 P.3000 칼리버를 적용한 바 있습니다(ex. 루미노르 1950 마리나 밀리타레 PAM00673).
4개의 조정 스크류를 갖춘 프리스프렁 타입의 대형 밸런스 휠(직경 13.2mm)은 양쪽으로 지지하는 브릿지에 의해 중심을 잡고 있으며, 브릿지 전체를 함께 들어내지 않고도 각 축의 엔드셰이크에 해당하는 부품을 조정해 가변 속도를 제어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영리하고 튼튼한 설계를 기반으로 작동 안정성에 중점을 둔 이러한 특징들은 리치몬트 그룹 산하 무브먼트 스페셜리스트이자 파네라이의 테크니컬 파트너인 발플러리에(Valfleurier)의 무브먼트를 관통하는 한 주요한 특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투명 사파이어 크리스탈 케이스백을 통해 독자적인 무브먼트를 감상할 수 있으며, 스틸 케이스백 테두리에는 ‘파네라이 공방이 특허권을 획득한’ 시계라는 뜻을 담은 오피치네 파네라이(Officine Panerai)와 브레베타토(Brevettato) 각인을 새겨 특별함을 더하고 있습니다(이 또한 오리지널 모델의 특징을 계승하는 요소임).
스트랩은 라이트 브라운 컬러의 부드러운 송아지 가죽을 러프하게 가공 처리한 일명 어쏠루타멘테(Assolutamente) 스트랩을 적용했습니다. 러그 폭이 27mm, 버클 쪽이 22mm로, 베이지 컬러 스티칭을 더해 나름대로 포인트를 주고 있으며, 양 러그 쪽 상단에는 오피치네 파네라이를 상징하는 ‘OP’ 로고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균일하게 두툼한 두께의 스트랩 단면은 엣지코트(기리메) 처리하지 않아 시계 특유의 레트로한 감성과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룹니다.
라디오미르 시계를 실제 소유해본 파네리스티 분이라면 공감하시겠지만 라디오미르는 그냥 보는 것보다 직접 착용했을 때의 느낌이 또 사뭇 다릅니다. 오버사이즈임에도 와이어 루프를 통해 스트랩이 들뜨는 부분 없이 손목 둘레를 따라 찰싹 감기는 형태이기 때문에 고시된 스펙에 비해 시계 크기가 심지어 작게 느껴지고 착용감도 좋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라디오미르 3 데이즈 아치아이오 - 47mm PAM00720의 국내 리테일가는 1천 68만 원으로, 기존의 라디오미르 모델보다는 다소 높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스페셜 에디션 보다는 다소 낮게 책정되어 나름의 이점이 있습니다. 전 세계 500피스 한정으로 국내 판매가 완료되면 다시 입고될 확률이 희박하다는 점도 보다 특별한 모델을 찾는 파네리스티들에게는 매력적으로 어필할 터입니다. 오리지널 라디오미르의 DNA를 충실하게 재현한 신모델에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를 부여할지는 개개인의 몫이겠지만, 전통의 가치를 현대에 오롯이 잇고자 애쓰는 파네라이의 집요한 노력만은 분명 인정해줘야 할 것입니다.
멋진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