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엔드 스포츠 워치를 언급할 때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의 로열 오크(Royal Oak)는 단골처럼 빠지지 않는 클래식 중의 클래식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시계 디자이너 故 제랄드 젠타(Gérald Genta)의 스케치를 기반으로 1972년 탄생한 로열 오크는 이내 손목시계 역사에 길이 남을 컬트가 되었고, 어쩌면 오데마 피게가 지금껏 독립 브랜드로 존재할 수 있게 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컬렉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1970년대 중후반 로열 오크 광고 비주얼
클래식 로열 오크가 초창기 파격의 아이콘에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제는 드레시함과 스포티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양면적인 매력으로 어필되고 있다면, 1993년 런칭한 로열 오크 오프쇼어(Royal Oak Offshore)는 누가 봐도 부인할 수 없는 남성적인 스포츠 워치의 한 전형을 보여줍니다.
로열 오크 오프쇼어는 오리지널 ‘점보’ 사이즈의 로열 오크(Ref. 5402) 보다 더 볼드하고 실제 스포츠 활동에 적합하도록 방수 사양을 강화한 새로운 로열 오크 시리즈를 갈망하는 일부 젊은 고객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당시 오데마 피게의 최고경영자였던 스테판 우콰트(Stephen Urquhart, 훗날 오메가의 CEO로 활약하다가 작년에 은퇴한 인물)의 적극적인 지휘 하에 가시화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젊은 디자이너 엠마누엘 귀트(Emmanuel Gueit)를 독려하여 젠타의 시그너처 디자인 코드를 해치지 않으면서 보다 파워풀한 디자인을 주문했는데요. 마침 로열 오크 20주년을 맞은 1992년 최종 디자인이 완성되었고, 이듬해 바젤 페어(당시 오데마 피게는 바젤 박람회에 참가했음)에서 이를 제품화한 첫 로열 오크 오프쇼어 모델을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 초창기 로열 오크 오프쇼어 모델
1993년 25721ST란 레퍼런스를 달고 처음 등장한 로열 오크 오프쇼어는 직경 42mm 스틸 케이스에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갖추고, 블랙 실리콘을 몰딩한 두툼한 크라운과 푸셔를 사용(이 또한 당시에는 매우 생소한 소재 조합이었음!), 수영, 요트 등 해상 레저 활동에도 안심할 수 있는 100m 방수 사양을 보장했습니다. 눈에 띄게 커진 케이스 직경과 자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의 사용으로 기존 울트라씬 베이스의 로열 오크 모델보다 두께까지 2배 가량 늘어남으로써 어지간한 체격의 성인 남성이 아닌 이상 소화하기 힘들 만큼 볼드했는데요. 물론 현재는 오버사이즈 시계를 대수롭지 않게 즐기는 문화가 형성돼 있지만,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로열 오크 오프쇼어의 등장은 1970년대 클래식 로열 오크의 등장 못지 않게 대중들에겐 매우 낯설게 느껴지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로열 오크 오프쇼어에 야수를 뜻하는 ‘비스트(The Beast)’라는 별명까지 붙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 지금은 단종된 이전 로열 오크 오프쇼어 크로노그래프 44mm 핑크 골드 모델
이렇듯 로열 오크 오프쇼어는 시대를 앞선 젊은 감각과 특유의 남성적인 볼드함때문에 출시 초반에는 실패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젊은 고객들은 새로운 종류의 시계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영화배우 아놀드 슈왈제네거, 힙합스타 제이-지 등 유명 셀러브리티들에 의해 애용되면서 한층 더 유명세를 얻었으며, 런칭 20년을 넘긴 지금은 클래식 로열 오크 못지 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사랑받는 브랜드를 대표하는 컬렉션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기에 이릅니다.
- 신형 로열 오크 오프쇼어 크로노그래프 44mm 핑크 골드 모델
로열 오크 오프쇼어의 가장 큰 강점은 런칭 이래 크게 변하지 않은 외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42mm 버전의 로열 오크 오프쇼어는 1993년 출시 당시나 지금이나 거의 변화가 없고, 이후 추가된 44mm 버전도 몇 가지 눈에 띄는 디테일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42mm 버전과 많은 부분을 공유합니다. 다이버나 여성용 라인업을 배제하면 로열 오크 오프쇼어는 기본적으로 볼드한 사이즈의 자동 크로노그래프 제품군이 컬렉션의 메인을 장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신형 로열 오크 오프쇼어 크로노그래프 44mm 티타늄 모델
이번 타임포럼 리뷰에서는 가장 최근에 출시된 로열 오크 오프쇼어 크로노그래프 44mm 신제품 두 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존의 로열 오크 오프쇼어 크로노그래프 버전에서 다이얼 디테일에 몇 가지 마이너한 변화가 있긴 하지만, 42mm 버전이 지난 20여 년의 세월 속에서 그러했듯 리뉴얼의 흔적은 크게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혹자에게는 이점이 단점처럼 비춰질 수 있겠지만 오데마 피게 정도의 하이엔드 시계를 구매하는 고객층이라면 이러한 보수적인 제품 구성을 오히려 반색할 터입니다.
이제 리뷰의 주인공인 로열 오크 오프쇼어 크로노그래프 신형 티타늄 버전(Ref. 26400IO.OO.A004CA.01)과 핑크 골드 버전(Ref. 26401RO.OO.A002CA.02)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직경 44mm 멀티 피스 케이스 중 미들 케이스 및 크라운 가드, 케이스백의 소재가 다르긴 하지만, 육각 스크류로 고정된 베젤부와 각 크로노그래프 푸셔, 스크류다운 크라운의 소재는 공통적으로 블랙 세라믹을 사용했습니다. 케이스는 전체적으로 유광과 무광 피니시가 적절하게 배합되었으며, 특히 각 모서리 상단은 브러시드 가공하고 측면 모서리는 폴리시드 가공하는 식으로 은근하게 포인트를 준 점도 컬렉션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디테일한 사진은 로열 오크 오프쇼어 크로노그래프 티타늄 모델 위주로 감상하시겠습니다.
그리고 다이얼에는 예외없이 일명 ‘와플 다이얼’로도 불리는 브랜드 특유의 두툼한 '메가 태피서리(Mega Tapisserie)' 패턴 가공이 적용되었습니다 핑크 골드 버전에는 올블랙 컬러 메가 태피서리 다이얼을, 티타늄 버전에는 슬레이트 그레이 바탕에 실버-화이트 컬러 카운터를 사용해 투톤의 조화를 보여줍니다. 각 인덱스와 핸즈는 폴리시드 마감한 골드 소재이며 가운데에 야광도료를 두툼하게 채웠습니다. 두 케이스 버전 공통적으로 크로노그래프 핸즈 끝부분과 시분 카운터 핸드 끝에는 레드 컬러 액센트를 더해 경쾌함과 가독성을 고려했으며, 다이얼 외곽(플란지)에는 특정 구간의 평균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타키미터 눈금을 프린트했습니다.
다이얼 3시 방향에는 원형의 어퍼처(창)로 날짜를, 6시 방향에 12시간 카운터를, 9시 방향에 30분 카운터를, 12시 방향에 스몰 세컨드(영구 초침)를 각각 표시하며, 그 배열(12-9-6)이 익숙한듯 보이지만 ETA/밸쥬 7750 계열이나 여느 제조사의 그것과도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스크류다운 크라운을 풀어 0단에서 와인딩을 할 수 있으며, 1단에서 날짜 조정을, 2단에서 시간 조정을 할 수 있는데 조작상의 다른 특이사항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명성이 자자한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다이얼 역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완벽한 피니싱을 자랑하며, 새로로 길쭉한 직사각형의 푸시피스와 각이 진 크라운 가드 부분조차도 손끝으로 느껴지는 마감은 날이 선데 없이 매끈하면서도 즉각적으로 견고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무브먼트는 이전 버전과 마찬가지로 인하우스 자동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3126/3840를 탑재했습니다. 기존의 자동 베이스(AP 3120)에 뒤부아 데프라(Dubois-Depraz)의 크로노그래프 모듈을 얹은 형태로, 애초부터 통합된(Integrated) 설계의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가 아니라는 점과 컬럼휠이 아닌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캠 방식이라는 점 때문에도 일부 순수주의자들에겐 감점 요인이 되긴 하지만, 사파이어 크리스탈 케이스백을 통해 드러나는 아름답게 가공된 무브먼트를 보는 순간 이러한 불평들은 이내 사라질 것입니다.
캠 방식이지만 크로노그래프 조작시 느껴지는 일종의 손맛(?!)은 여느 컬럼휠 방식 못지 않게 부드럽고 끊김없이 자연스럽게 스타트, 스톱, 리셋을 제어하는 느낌입니다. 르 브라쉬스 매뉴팩처의 베테랑 워치메이커들에 의해 깐깐하게 수정 및 보완을 거친 결과일 터이지만, 한편으로는 뒤부아 데프라 모듈의 탁월한 안정성과 기존 베이스와의 궁합 등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입니다.
총 365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3126/3840 칼리버의 직경은 29.92mm(13¼ 리뉴)이며, 두께는 7.16mm, 시간당 진동수는 21,600 v/h(3 헤르츠)이며, 파워리저브는 약 50시간을 보장합니다. 캠 베이스의 크로노그래프 구동 관련 부품들은 대부분 톱 브릿지와 양방향 회전하는 22K 골드 로터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베벨링 마감된 밸런스 브릿지와 모바일 스터드가 달린 프리스프렁 밸런스, 플랫 밸런스 스프링 등의 부품은 그나마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로열 오크 오프쇼어 크로노그래프의 방수 사양은 이전 버전과 마찬가지로 100m입니다. 멀티 피스 케이스 접합부를 여러 개의 스크류로 고정하는 로열 오크 케이스 구조상 방수에 다소 취약한 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베젤부와 사파이어 크리스탈 케이스백 안쪽, 그리고 크로노그래프 푸셔와 스크류다운 크라운 안(오링)에도 각각의 규격에 맞는 방수링을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스트랩 역시 그레이(티타늄 케이스 버전) 혹은 블랙(핑크 골드 케이스 버전) 컬러 러버 스트랩을 매칭해 활동성을 고려했습니다.
지금까지 보신 로열 오크 오프쇼어 크로노그래프 44mm는 하이테크 소재와 스위스 파인 워치메이킹 노하우가 조화를 이룬 박력 넘치는 스포츠 워치 신작입니다. 이전 버전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다이얼 디테일에서 미묘하나마 스포티한 인상이 강조되었으며, 전체적인 마감 상태도 보다 고급스럽게 거듭난 느낌입니다.
비교적 접근 가능한 가격대에 매력적인 하이엔드 스포츠 워치 제품군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 오프쇼어 크로노그래프는 그 역사성과 기술력, 시계 자체의 존재감과 완성도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대적할 만한 시계가 많지 않은 최고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물론 젠타로부터 파생한 특유의 볼드하고 유니크한 디자인과 특정 기능(크로노그래프)을 특별히 선호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지요.
제품 협조:
스타일리더
촬영:
포토그래퍼 제이미 스튜디오 권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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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RO의 블링함이 없는 것 같아 눈길이 안갔는데 볼수록 매력적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