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게의 트래디션은 꽤나 매력적인 컬렉션입니다. 시계의 심장인 무브먼트를 전면에 대놓고(!) 드러낸 것이 특징이죠. 그래서 시계가 구동하는 모습을 언제나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트래디션의 유래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1700년대 말 선보인 브레게의 서스크립션(souscription) 워치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생전에 세상(!) 복잡한 시계들을 많이 선보였지만 동시대에 시계 역사상 가장 단순한 시계를 제작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바로 서스크립션 워치가 주인공입니다. 브레게가 1797년 발행한 브로셔에서 그는 "이 시계 가격은 600 리브르로 책정된다. 이 시계를 주문할 때는 총 금액의 1/4을 선금으로 지급해야 한다"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서스크립션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_서스크립션 워치
중앙의 커다란 배럴, 그리고 배럴 양쪽에 대칭으로 자리하고 있는 고잉 트레인이 특징인 서스크립션 칼리버는 시간과 분을 동시에 표시하는 하나의 바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듯 하면서 에지 넘치는 디자인은 지금 봐도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실제로 브레게는 이 서스크립션 워치를 새로운 구조의 시계라고 칭하며 직접 이렇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이 시계는 단순한 디자인, 그리고 위에서 떨어지는 꽤나 큰 충격에서도 이스케이프먼트를 보호해주는 레이아웃이 특징이다. 고잉 트레인, 이스케이프먼트, 레귤레이터, 온도 보정기 등을 모두 전면에 배치해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를 모두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서스크립션 워치를 개발한 지 3년 후인 1799년 브레게는 서스크립션 칼리버의 진화한 버전인 '택트' 워치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케이스 주변에 자리한 두 개의 솟아있는 마커를 이용해 시계를 '만져서' 시간을 읽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착용한 이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지 않고도 은밀하게 시간을 확인하게 해주었고, 때로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시계'라고 불리기도 했죠.
_택트 워치
후에 니콜라스 G. 하이예크와 브레게의 디자인팀은 보통의 경우 시계를 뒤로 돌려야만 볼 수 있는 부분들을 시계 앞면에서 모두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레이아웃이 분명히 워치메이킹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을 매료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2005년 브랜드 유산에서 영감을 받은 트래디션 워치를 선보이게 됩니다. 브레게가 2백 년 전 이미 선보인 중앙 배럴, 그리고 기어 트레인과 밸런스를 대칭으로 놓은 아름다운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죠.
브레게의 트래디션 컬렉션은 탄생한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자체로 강렬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단순한 수동 모델이나 자동 모델에서부터 듀얼 타임, 퓨제 투르비용, 인디펜던트 크로노그래프, 미닛 리피터 기능 등을 갖춘 복잡한 모델까지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이얼과 시계의 주요 부품을 시계 한쪽 면에서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시계 애호가들에게 어필하고 있죠.
_트래디션 7047
_트래디션 7057
_2015년 선보인 트래디션 미닛 리피터 투르비용 7087
기계적이면서 구조적인 느낌이 강하다보니 이제까지 트래디션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진 것이 사실입니다(하지만 일전에 취재 차 방문한 바젤월드에서 이 남성을 위한 트래디션에 핑크 톤 앨리게이터 스트랩을 매치해 착용한 여성을 본 적이 있는데, 매우 스타일리시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트래디션 컬렉션에서 올해 처음으로 여성을 위한 모델을 선보였습니다. 이름은 트래디션 담므 7038(Tradition Dame 7038)입니다. 프랑스어로 여성이라는 의미를 담은 '담므'를 살포시 뒤에 덧붙였습니다.
우선 트래디션 특유의 입체적이고 그래픽적인 구조는 그대로 가져왔지만 여성 고객을 배려한 여러 가지 장치들을 적용했습니다. 여전히 메인 플레이트 양쪽을 통해 무브먼트의 거의 모든 부품을 볼 수 있지만, 기존 느낌과는 사뭇 다릅니다.
37mm 사이즈 케이스 위 12시 방향에 자리한 시와 분을 표시하는 서브 다이얼에는 엔진 터닝 패턴을 새긴 어두운 톤의 타히티산 머더오브펄 소재를 적용했습니다. 서브 다이얼 위 브레게 핸즈가 클래식한 느낌을 줍니다. 기존 트래디션 컬렉션에서는 주로 NAC 처리로 만들어낸 그레이나 짙은 먹색, 혹은 로즈 골드 톤의 무브먼트를 사용했지만 트래디션 담므에서는 마치 서리가 낀 듯 무브먼트를 화이트 빛으로 꾸몄습니다(!). 확실히 기존 버전에 비해 훨씬 화사해진 느낌으로 고유의 텍스처가 있어 더욱 고급스럽습니다. 이 화이트 빛은 18K화이트 골드 케이스와도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것은 물론 덕분에 12시 방향의 서브 다이얼도 돋보여 가독성도 높여줍니다. 다이얼 곳곳의 핑크 주얼은 여성여성한(!) 느낌과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중심부에서는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듯한 잔잔한 패턴의 배럴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4시 방향의 밸런스 휠을 비롯해 이스케이프먼트를 탑재한 브릿지에서는 손으로 직접 챔퍼링(chamfering)한 파라슈트(pare-chute)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파라슈트는 충격으로부터 밸런스 관련 부분을 보호해주는 장치로 시계 업계의 발명왕(!)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고안한 발명품 중 하나입니다. 무브먼트 위 10시 방향에서는 레트로그레이드 방식으로 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이얼 구석구석 나름 볼거리가 상당합니다.
베젤에는 1캐럿이 조금 안 되는 68개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를 세팅해 여성스러움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사실 트래디션 담므에서 진짜 주목해야 할 '주얼리'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크라운에 있는데요. 바로 무브먼트를 장식하는 데 사용하는 핑크빛 주얼을 크라운에 가져온 것입니다. 여타 주얼리보다는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측면의 섬세하게 홈이 파인 케이스밴드나 스크루 바 웰디드 러그 등 브레게의 시그너처 디테일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계를 뒤로 돌리면 투명한 크리스털 케이스백을 통해 무브먼트 뒷면을 살펴볼 수 있는데요. 앞부분의 배럴에서 발견할 수 있는 플라워 패턴을 로터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좌우로 미끄러지며 움직일 때마다 마치 꽃잎이 휘날리는 듯 우아한 자태를 자랑합니다.
브레게 밸런스 스프링을 장착한 자동 무브먼트 505SR 칼리버를 탑재했고, 여성을 위한 컬렉션인 만큼 핫 핑크 컬러 스트랩을 매치해 화려한 트래디션의 변신을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개인적으로 오히려 대놓고(!) 핑크보다는 화이트나 그레이, 그린 톤 스트랩을 매치해도 매우 시크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합니다). 최근 워낙 여성 고객들도 큰 사이즈 시계를 즐겨 착용하기 때문에 37mm 사이즈가 무난하게 잘 어울리는 여성들도 있겠지만, 더욱 다양한 여성들이 착용할 수 있도록 (물론 무리(!)가 다소 따르긴 하겠지만) 조금 더 작은 버전도 함께 출시해 선택의 폭을 넓히면 어떨까 하는 기대도 해봅니다.
메인다이얼이 12시가 아닌 모델도 있었군요! 오히려 더 신선한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