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는 파나메리카나 고속도로의 멕시코 구간이 개통되자, 당시 멕시코 대통령은 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랠리를 개최합니다. 정치적인 의도야 어찌되었든 즐길거리로는 훌륭했습니다. 까레라 파나메리카라(Carrera Panamericana)로 명명한 이 랠리는 30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에 코스에는 다이나믹함까지 곁들여져 있었죠. 게다가 출전자격조차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프로와 아마추어, 장거리를 달리기 위한 대배기량의 미국산 자동차와 날렵한 유럽산 자동차가 한데 뒤엉켜 달리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겁니다. 아쉽게도 까레라 파나메리카나는 개최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더 이상 개최되지 않게 됩니다. 다른 레이스에서 대규모 인명사고 난 터라 이전에도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까레라 파나메리카나는 안전을 이유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죠.
당시 호이어의 수장이었던 잭 호이어는 멀리서 까레라 파나메리카나의 이야기를 듣고 시동을 건 자동차 레이스에 어울리는 시계를 만들기로 마음먹습니다. 물론 시계의 이름은 까레라였죠. 까레라라는 이름 때문에 태그호이어는 한때 포르쉐와 상표권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사이 좋게 까레라를 쓰고 있는걸 봐선 원만한 합의가 이뤄진 것 같네요.
까레라는 자동차 레이스의 계측을 목적으로 태어나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쿼츠 시대인 1970~1980년대에는 쿼츠 무브먼트가 첨단기술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이를 탑재한 포뮬러 1에서 간판을 내준 적도 있지만, 줄곧 까레라가 태그호이어의 간판 모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브랜드의 레이스 DNA를 가장 확실하게 머금고 있는 시계이니까요. 때문에 상당히 방대한 모델로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크로노그래프 기능에 평균속도를 잴 수 있는 타키미터의 조합을 지닙니다.
리뷰의 까레라 칼리버 01도 그 맥락에서는 일치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다양한 시도를 해왔던 까레라 라인업에서 가장 파격적인 형태로 꼽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오픈워크 기법을 활용한 외관 때문일 것입니다. 다이얼, 무브먼트의 일부를 잘라내거나 투명한 레이어를 사용하는 오픈워크는 아름답지만 반대로 가독성을 저해합니다. 파일럿 워치가 가독성을 위해 검정색 다이얼에 커다란 아라빅 인덱스를 사용하는 이유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요. 다이얼 이곳 저곳을 잘라낸 다이얼은 아무래도 빠르게 시간을 읽기가 어렵죠. 때문에 계측을 중요시하는 까레라에서는 오픈워크를 시도하지 않았을 듯합니다. 하지만 라인업을 구성하는 모델이 많아졌고 또 실제로 기계식 시계로 계측을 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제는 기능성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시도가 더 중요해지며 까레라 칼리버 01이 탄생하게 됩니다.
때문에 이 모델 최대의 매력은 다이얼입니다. 다이얼은 큰 링과 그 보다 작은 몇 개의 링이 뼈대역할을 합니다. 시간 인덱스를 배치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며, 여기에 30분과 12시간 카운터, 영구초침을 둘 수 있도록 작은 링을 더합니다. 영구초침은 링의 색상을 달리해 역할을 구분하죠. 오픈워크이면서도 데이트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스켈레톤 기법으로 만든 데이트 링 덕분입니다. 광택, 톤을 억제한 이들 링과 카운터에 비해 시간 인덱스, 시, 분, 영구초침은 반짝임을 강조한 가공을 했습니다. 가공 수준으로 보면 꽤 공을 들인 듯 한데요. 오픈워크 레이어와 대비를 이루면서 입체감 부여에 한 몫 하지 않나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크로노그래프 바늘, 카운터 바늘은 빨간색을 사용해 시각적, 기능적으로 분명히 구분을 했습니다. 다이얼을 덮는 사파이어 크리스탈은 측면에서 봤을 때 베젤 보다 솟아있습니다. 중심점으로 향하면서 점점 더 볼록해지면서 케이스 전체 입체감을 주게 됩니다. 시간 인덱스와 시, 분침에는 야광 도료를 올렸습니다. 시간 인덱스는 빨간색으로 포인트를 주었는데 단순한 포인트가 아니라 어두운 곳에서 빛을 낼 수 있습니다. 덕분에 밤에는 투 톤 야광을 감상할 수 있게 되죠.
케이스는 이전 까레라에 비해 더욱 남성적입니다. 또한 복잡해졌는데 여러 파트로 구성되는 멀티피스 케이스의 도입해 의한 변화입니다. 다이얼을 둘러싼 베젤은 폭이 증가했고, 검정으로 표면을 덮은 뒤 음각으로 정교하게 타키미터를 올려 까레라의 정체성을 머금고 있습니다. 오픈워크의 화려한 다이얼을 넓은 베젤로 둘러싸면서 안정감을 부여합니다. 베젤은 케이스 위에 올리는 일반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케이스로 자연스럽게 연장되며, 그 경계는 다이얼의 포인트가 된 빨간색을 이용한 링으로 구분합니다. 케이스 역시 베젤과 같은 색상을 띕니다. 베젤, 케이스는 하나의 납짝한 원통 모양이며 이것은 미들 케이스로 연결된 러그와 합체합니다. 러그는 표면에 색상처리를 하지 않고 헤어라인의 표면을 드러내어, 다이얼 속 인덱스처럼 대비를 이루며 재미를 줍니다. 45mm 지름에 스레인리스 스틸 소재로 착용시 느끼는 무게는 제법 묵직합니다.
탑재한 무브먼트는 칼리버 호이어 01이며, 베이스 무브먼트는 칼리버 1887입니다. 스윙잉 피니언 방식의 클러치, 컬럼 휠 구성으로 버티컬 클러치가 상당수인 요즘의 구성으로 볼 때 클러치 방식이 눈에 띕니다. 이는 창업자인 에드워드 호이어가 스윙잉 피니언을 개발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헌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클러치는 장단점이 있으며 스윙잉 피니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크로노그래프 스타트시 크로노그래프 바늘이 튕기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스윙잉 피니언의 접촉순간 매끄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장점은 공간을 매우 작게 요구하여 컴팩트한 구조를 꾸릴 수 있는 것인데요. 리뷰 촬영, 리뷰하는 내내 계속 크로노그래프를 사용해 봤으나 약점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수정을 통해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게 아닐까 싶은데, 같은 방식의 ETA의 칼리버 7750도 요즘은 그런 현상이 많이 줄어든 편입니다.
크라운 포지션은 0, 1, 2이며 0에서 수동 와인딩, 1에서 날짜 변경, 2에서 시간 변경입니다. 수동 와인딩은 칼리버 1887만의 특유의 감촉이 있습니다. 오픈워크로 수정한 칼리버 01에서도 변함이 있을 수 없는 요소죠. 날짜 변경과 시간 변경은 큰 특징이 없습니다. 무난하네요. 크로노그래프 작동은 컬럼 휠 덕분에 매우 부드럽습니다. 푸시 버튼을 가볍게 눌러도 크로노그래프는 곧바로 작동으로 이어지며, 스톱도 가볍습니다. 리셋 역시 경쾌해 연속 계측을 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군요.
시스루 백으로 보이는 무브먼트는 칼리버 1887과 달리 좀 더 치장에 신경을 썼습니다. 검정색을 입힌 로터의 색상과 자동차의 휠을 잘라낸 듯한 모양이 스피드, 레이스라는 테마를 드러냅니다. 컬럼 휠은 일부에 빨간색을 사용해 공격적(?)으로 보입니다. 고급의 피니싱이라고 할 수 없지만 잘 마감한 인상을 주는 칼리버 호이어 01입니다.
케이스를 지탱할 수 있는 충분한 두께의 러버 밴드를 사용합니다. 펀치홀 디테일은 기능적이라기 보다 레이스 타입 스트랩 혹은 까레라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원터치 방식의 디-버클과 매치하며, 버클은 러버 밴드 어디라도 위치시킬 수 있기에 자신의 손목에 딱 맞게 착용 할 수 있습니다. 손목이 가는편이면 불필요한 러버 밴드 일부를 잘라내는 편이 보다 나은 착용감을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다. 러버 밴드는 소모품이라 과감하게 잘라내면 좋지만 컨디션에 따라 손목 두께도 달라지므로 여유를 두고 잘라야겠죠.
오픈워크 다이얼과 멀티피스 케이스를 사용한 파격적인 시도는 까레라 답지 않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크로노그래프, 타키미터, 케이스에 녹여내려고 한 특유의 라인은 까레라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디테일 들입니다. 따라서 까레라 패밀리의 새로운 시도 수용할 수 있다면 나름의 매력을 즐겁게 즐길 수 있을 듯합니다. 이 모델은 스마트워치인 태그호이어 커넥티드와 같은 디자인을 하고 있기도 하죠. 다른 기술과의 접점, 과거와 현재와의 연결을 위한 가교 역할을 맡기기 위함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게 하는 모델로, 태그호이어의 향후 지향점을 시사하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디자인은 멋진데 두께감이 상당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