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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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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탐험의 미래이야기들 : 미지의 세계
 
링고의 시계탐험을 읽어온 분들은 단순하게 생각했었던 시계라는 작은 생활용품의 다양성에 조금 놀란 기분이실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링고가 쓴 시계 탐험 시리즈나 다른 게시판에 올린 수 많은 이야기들은
 
시계에 대한 모든 이야기의 1%도 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실지요?
 
실은 1%는 고사하고 0.001 %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2001년 독일의 Harmut Zantke는 사진의 책을 발간하게 됩니다.
 
Louis Benjamin Audemars라는 책입니다.
 
Audemars Piguet라는 브랜드에 익숙한 분들은 혹시 그 Audemars인가 하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AP의 Jules Audemars라인의 시계를 떠올리신다면 Louis Benjamin Audemars는 AP의 창업자인
 
Jules Audemars와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물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Jules Audemars는 바로 Louis Benjamin Audemars의 형제의 후손이므로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Louis Benjamin Audemars와 그의 아들들이 만든
 
Audemars Freres와 AP는 실상 큰 관계는 없는 서로 다른 회사입니다.
 
 
이 시계들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Louis Benjamin Audemars와 그의 아들들이 만든 시계들입니다.
 
그러나, Louis Benjamin Audemars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필립 듀포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매력적인 시작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1. 필립 듀포와 발레 드 쥬
 
 
필립 듀포는 여러번의 인터뷰를 통해 밝혔지만, Vallee de Joux의 유명한 시계산지인 Le Sentier에서 태어나
 
이곳의 시계학교를 졸업한 후 쿼츠혁명이 닥치기 얼마전인 1967년에 Jaeger LeCoultre에 취직하여
 
시계애프터서비스(오버홀, 수리 등)로 경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몇 년 후 쿼츠 혁명이 시작되었고....
 
쿼츠 혁명이 시계에 대한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1970년대말 JLC를 떠나 독립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IMF시기에 회사에서 밀려난 30 대의 젊은 남자와 비슷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는 친구가 Le Sentier에 설립한 엔틱시계수리공방에서 엔틱시계수리로 쿼츠시대의 기계시계기술자로서의
 
암울한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이 때 젊은 30 대의 필립 듀포는 유명 브랜드의 엔틱 복잡시계들의 수리를 의뢰받고
 
그 시계들을 수리하면서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발견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브레게, 르 로이, 덴트, 유르겐센 같은 시계역사에서 매우 유명한 시계가문들의 이름이 표기된
 
시계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다이얼에 적힌 위대한 가문의 이름들과는 달리 그가 오버홀이나 수리를 위해 분해한 무브먼트에서 발견한
 
각인들은 Audemars, Capt, LeCoultre, Piguet, Aubert, Meylan 등과 같은 발레 드 쥬에서 태어나 무브먼트를 만들었던
 
장인들의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발레 드 쥬
 
 
현대의 매니아들에게는 이를 축약하여 브랜드 명으로 사용한 "밸쥬"(발레 드 쥬를 축약한 브랜드명)로 더 익숙한
 
스위스의 쥬라 산맥 밑의 Le Sentier, Le Brassus, L'Orient 등과 같은 지역을 통칭하는 지역 명칭인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필립 듀포는 이렇게 다짐했다고 합니다.
 
"선배들이 할 수 있었다면 분명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나는 나의 첫 그랜드 조네리 회중시계 무브먼트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1982, 34세)
 
 
오늘 이야기하려는 Louis Benjamin Audemars는 아마도 필립 듀포가 수리했던 유명 브랜드의
 
시계 속에서 발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발레 드 쥬 출신의 유명한 장인입니다.
 
이제, 그를 발견한 매니아의 이야기로 돌아가도 좋은 듯합니다.
 
 
2. Louis Benjamin Audemars의 발견
 
 
링고가 전해 주었던 다른 시계 이야기들과 마찮가지로....
 
루이 벤자민 오데마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낸 것은 시계 학자도 아니고 시계 브랜드도 아닌 시계 매니아입니다.
 
루이 벤자민 오데마의 복잡회중시계들은 엔티쿼럼 등 해외 경매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는 복잡한 시계들에 속합니다만...
 
컬렉터들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이름이기 때문에 브레게, 르 로이,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이나 오데마 피게는 물론
 
롤렉스 보다도 훨씬 낮은 가격에 판매되는 시계들입니다.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는 이 시계를 만들었던 L B Audemars와 그의 아들들이 만들었던 몇 개의 회사가
 
시계들이 컬렉터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집되기도 전에 망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의 역사를 기억해줄 그의 후손들은 이제 더 이상 시계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가문을 기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독일의 회중시계 컬렉터였던 Harmut Zantke는 회중시계를 수집하면서 경매 설명서 등을 통해
 
Louis Audemars, Le Brassus라고 설명된 매우 멋진 시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도무지 이 브랜드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제대로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요즘 TF를 방문하여 "이 시계 어떤건가요?"하는 질문을 던지는 초보 매니아와 비슷한 의문을 느낀 셈입니다.
 
물론, Harmut Zantke는 결코 초보 매니아가 아니며 오랜 기간 엔틱회중시계들을 수집해왔던
 
매우 전문적인 고참 매니아(속칭 "고수")였던 것이지요....
 
그런 그 조차 여러 신뢰할만한 경로를 통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들이 만든 시계 몇 개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준높은 감식안으로 보기에 Louis Audemars의 무브먼트들은 파텍 필립이나 A. Lange & Sohhne의
 
무브먼트들 보다 수준이 높을 지언정 결코 떨어지는 시계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Louis Audemars의 걸작 회중시계들은 경매에서
 
항상 너무 낮은 가격으로 낙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로서는 이를 수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으로 따진다면 파텍 필립의 시계가 티솟이나 해밀턴의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 데 이를 보고서
 
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스위스와 직접 접촉해서 이 브랜드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로 작심하고 스위스의 시계 박물관에 문의를 보내고
 
가능한 모든 범위의 시계책들이며 관련 자료들을 정리합니다.
 
스위스로 조사차 몇 번의 여행을 가기도 하고 거기서 케이스에 넣어지지 않은 무브먼트들도 수집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Paul Audemars라는 Louis Benjamin Audemars의 후손이 남아 있다는 것과 전화번호를 알게 되어
 
루이 오데마 가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줄 유일한 증인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소 놀랍게도 Louis Benjamnin Audemars(1782-1833)를 기억하는 마지막 후손은 발레 드 쥬도 스위스의 다른 지역도
 
아닌 영국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폴 오데마의 만남을 통해 Harmut Zantke는 비로서 이 가문의 상세한 역사에 대해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전해 들은 이 가문의 역사와 그가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한 3 년동안 발견한
 
그들이 만든 시계들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위의 책을 발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Louis Benjamin Audemars 가문 이야기
 
Harmut Zantke가 정리한 이 가문 이야기의 간단한 요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Louis Benjamnin Audemars(1782-1833)는 그의 탄생일과 사망일을 본다면,
 
유명한 아브라함 루이스 브레게(1747~1823)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시계기술자입니다.
 
아브라함 브레게 보다 35 년 정도 늦게 태어나 다음 세대에 속합니다만....
 
인생역정이 힘들었던 때문인지, 브레게 처럼 70 대까지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50 대초에 사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브레게의 전성기를 보면서 살았으며 그 역시 탁월한 시계기술자였으므로 그의 인생은 브레게와 잠시
 
교차하기도 합니다.
 
Louis Audemars는 보석세공사였던  Pierre-Henri Audemars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6세에
 
당시 이 지역에서 시계 에보슈와 무브먼트 부품들을 만들던 Philipe Samuel Meylan의 도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곳에서 도제 생활을 통해 시계기술을 익힌 Louis Audemars는 도제생활 후에 Meylan의 추천을 받아
 
Breguet의 공방에서 2 년간 근무하게 됩니다.
 
 
그의 성설성은 물론 타고난 시계기술자로서의 재능은 위대한 브레게로부터 "탁월한 후배"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루이 오데마로서도 당시 이미 세계 최고의 시계기술자였던 아브라함 브레게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루이 오데마가 자신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그가 처음 시계기술을 배웠던 Meylan의 부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업상 큰 성공을 거두고 있던 Meylan은 시골인 발레 드 쥬를 떠나 스위스 고급 시계의 중심지인 제네바에 정착하여
 
자신의 브랜드로 시계를 만들기로 하고, 자신의 에보슈 제조 설비들과 남은 부품들을 탁월한 실력을 가진
 
고향 후배인 Louis Audemars에게 물려주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811년 Louis Audemars의 사업이 시작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Breguet No. 4273, made by Louis Audemars, Brassus
 
 
일단 그의 첫 고객은 그의 능력과 성실성을 높게 평가한 프랑스 파리의 시계 황제 아브라함 브레게였습니다.
 
그는 2 년간 브레게 밑에서 일하는 동안 브레게 스타일의 시계만들기를 배웠으므로 아브라함 브레게로서도
 
자신의 복잡시계 에보슈를 납품할 적임자였던 셈입니다.
 
당시 아브라함 브레게에게 무브먼트를 납품한다는 것은 그 실력에 대한 공인된 평가서와 다름 없었습니다.
 
더우기,루이 오데마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무브먼트들에 조그마한 하자가 있는 것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그의 무브먼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은 것이었고 브레게를 필두로 프랑스는 물론 영국과 덴마크
 
그리고 제네바의 유명 가문들로부터 복잡시계무브먼트에 대한 주문을 받게 됩니다.
 
루이 오데마는 복잡시계들 중에서도 특히 리피터 무브먼트를 잘 만들었고 리피터 무브먼트야말로
 
미래에 큰 인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이에 대한 기술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여
 
1816년과 1816년에 찾아온 엄청난 불경기에 리피터 무브먼트로 도리어 번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Louis Audemars, Brassus (Swiss) made for Le Roy & Fils
 
 
Breguet, Henry Capt, Le Roy & Fils, Dent, Jurgensen 등은 그의 많은 고객들중 일부의 이름들이며
 
당시 프랑스, 스위스, 영국, 덴마크 등을 대표하는 왕의 시계를 만들던 유럽지역의 유명 가문들입니다.
 
필립 듀포가 1980년대 오데마 피게 등 명문 가문들을 위해 리피터 무브먼트를 개발하면서
 
느꼈던 울분이라면 울분같은 것이 루이 오데마에게도 생겨났을 것입니다.
 
왜 내가 만든 무브먼트(실질적으로 시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셈인데...)를
 
나는 다른 유명인들의 이름으로 판매해야 하는 것인가....
 
 
자신의 일에 대해 완벽주의자였던 루이 오데마로서는 생활이 안정되자 내심 그런 처량한 생각들이 들게 됩니다.
 
자신이 파리에서 보았던 아브라함 브레게의 귀족적인 화려한 생활들....
 
그러나, 실제로 고가로 판매되는 브레게의 시계를 만드는 자신은 시골에서 하루 종일 금속 가루를 마셔가며
 
그의 이름으로 팔릴 시계들을 만드는 생활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의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은 그의 건강까지도 심하게 해치고 있었습니다.
 
일손이 부족했으므로, 그의 8 명의 아들들이 가업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완벽주의자였지만 가슴 속에 한을 품고 살았던 아버지의 꿈은 아들들의 노력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이름인 Louis Audemars의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사용하여
 
드디어 위대한 가문들의 사이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인 Louis Audemars가 마련한 탁월한 설비들과 기술들을 이용하여
 
브레게나 르 로이 못지 않은 복잡시계들을 만들어 당시 유럽에서 열리는 각종 박람회에 출품하게 됩니다.
 
품질에서 브레게나 르 로이, 쥬르겐센 등의 시계와 동등한 루이 오데마 가문의 시계들은
 
박람회를 찾아온 왕족과 귀족들이며 부유한 상인들의 눈길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가 사는 인생이 그렇듯이, 실력이 곧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프랭크 뮬러의 최고 난이도의 복잡시계 무브먼트를 조립하던 발레 드 쥬 출신의 피에르 쿤츠가
 
프랭크 뮬러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사용한 시계를 만들었지만
 
프랭크 뮬러와 같은 성공을 거두고 있지 못하듯이....
 
루이 오데마 가문의 성공가도는 짧은 화려한 시절 후에 찾아오는
 
급격한 그러나 기나긴 몰락의 변곡점에 봉착하게 됩니다.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과도한 투자를 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무브먼트를 만들어 명문 가문에 납품하는 일과, 자신의 시계를 만들어 전세계 각지에 판매하는 일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Breguet made by Louis Audemars, Brassus
 
 
무브먼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설비와 기술자 몇 명을 더 고용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케이스며 다이얼 등을 직접 만들거나 외주로 주문해야 하므로 많은 비용이
 
추가로 들게 되며, 판매망을 넓히게 위해서는 주요 판매거점에 판매점 계약을 하거나 직영점도 만들고
 
영업사원(당시는 저지맨)들도 고용해야 합니다.
 
그 결과, 오로지 시계 만드는 기술만으로는 세계 최고였던 루이 오데마 가문의 아들들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들의 명성과 성공을 믿고 있는 은행들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돈을 빌리게 됩니다.
 
그 결과 그들이 만들어 판매하는 시계들의 판매이익은 그 많은 은행빚을 갚기도 어려운 처지가 된 것입니다....
 
즉, 위대한 기술자가 동시에 탁월한 경영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평범한 역사의 진리가 순수했으나 명예에
 
목말라했던 위대한 장인의 가문에 거대한 암운을 드리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형제들간에 분란도 생겨난 듯 합니다.
 
이런 무모한 투자를 강행하는 결정을 한 형과 그에 반대했던 동생의 다툼 같은 것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결과 Louis Audemars가문의 형제들은 그들의 아들대인 1885년에 서로 헤어져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시계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은행에 지고 있던 빚이 너무 많았으므로, Louis Audemars의 형제들과 손자들은 아버지나 할아버지 처럼
 
완벽한 시계를 만들기 보다는 빨리 만들어서 현금을 확보할 수 있는 염가 시계 만들기로 전향하게 되고....
 
그것도 다시 불황을 맞이하여 도산하게 되는 흔하디 흔한 기업의 창업과 성공 그리고 몰락의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Louis Audemars를 성공시켰지만, 한편 그 성공의 그늘처럼 느껴지던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명예에 대한 욕망은 그의 사후 1840년대와 1870년대에 걸쳐 세계 각지의 왕가에서 구입하는 시계의 반열에 오르고
 
각종 박람회에서 수 많은 상을 받는 화려한 결실을 거두기는 합니다만....
 
그 화려한 결실은 그들에게 오랫동안 지속될 명예와 부를 가져다 주는 대신에 몰락을 선사했던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꿈을 실현한 아들들이 모여서 만든 Louis Audemars의 시계는 대략 9,000 개 정도로 끝이 나게 됩니다.
 
 
아들들이 경영난 때문에 다툼으로 번지고 그 결과 서로 헤어지면서, 이제 Louis Audemars의 이름을 사용한
 
고급시계들도 함께 시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인생을 보상받으려했던 그의 아들들은 너무 성급했고
 
그 결과 그들의 도전은 점점 더 무모한 도전으로 변질되었으며, 19세기 말에서 1960년까지
 
그의 아들들이 독립하여 만들었던 브랜드들은 완벽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시계와 같은 고급시계를 더 이상 만들지 못하고
 
이름 없는 싸구려 시계들을 만들다가 하나, 둘 사라져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4. 시계가문들의 명과 암 : 인간들의 이야기는 언제든 죽음으로 끝이 나는 법
 
 
                              Patek                                                             Philippe
 
위대한 가문들의 이름을 잘 관찰한다면 독특한 매칭을 발견하게 됩니다.
 
파텍 필립의 파텍은 시계기술자가 아닌 귀족출신의 경영자였고, 필립은 시계기술자였습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경우 바쉐론이 기술자였고, 콘스탄틴은 경영전문가였습니다.
 
오데마 피게의 경우도 시계기술자 출신의 2 명이 창업했지만, 오메가가 테크니컬 책임자로서
 
기술을 개발하고 시계를 만드는 역활을 맡았다면, 피게는 영업을 담당하여 영업과 경영을 담당하게 됩니다.
 
즉, 18세기와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빅 3 로 살아남은 이 위대한 세 가문들은 시계의 역사에 등장한 수 많은
 
시계가문들 중에서 시계기술이 가장 탁월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기술과 경영의 양쪽에서 균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물론, 파텍 필립과 바쉐론 콘스탄틴 처럼 실제로는 망했으나 경영능력이 탁월한 주인을 만나 아직
 
성공가도를 달리고 살아남아 있는 가문도 있습니다만....
 
         Philippe Stern
 
이를 인수하여 창업자의 유지를 계승할 성씨가 다른 우수한 주인을 만나기 위해서도 오랫 동안 살아 남아
 
탁월한 브랜드 이미지(가문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브레게나 장 자크 바쉐론, 아드리안 필립과 필적할 만한 수 많은 시계 기술자들이
 
시계의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현대에까지 그 이름을 남긴 위대한 가문이 바로 현대에 빅 3로 불리우는 스위스의 하이엔드 브랜드들인 것입니다.
 
이 브랜드들의 창업자들 보다 훨씬 위대한 수 많은 장인이며 기술자들은 산업화가 진행되던 19세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1920년대말의 세계대공황과 1970년대의 쿼츠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술 때문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하여 살아남는 생존방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루이 오데마를 예로 들었지만, 그와 비슷한 역사는 16세기부터 현대까지 참으로 끊임 없이 반복되는
 
일입니다....
 
 
       Franck Muller                           Watchland
 
 
현재의 프랭크 뮬러, 로제 듀비는 어느덧 몰락의 변곡점에 서 있는 듯하고,
 
조금 미래에는 필립 듀포, 프랑소와 폴 쥬른, 비아니 할터가 서둘러 그 변곡점에 도달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매니아 시기가 마무리되기 전에 루이 오데마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친숙한
 
브랜드의 이름으로 그러나 조금 작은 규모로 반복되는 것을 보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링고가 시계 매니아가 되었을 때 복잡시계의 황제라며 명성을 날리던 프랭크 뮬러가
 
이제 자신의 본거지인 와치랜드의 골방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화려한 시계들 때문에 그 화려한 시계들을 만드는 제네바며 발레 드 쥬, 르 로클이며 라쇼드퐁의 생활이
 
우리의 생활과 크게 다를 것으로 생각할 수 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만드는 화려하고 복잡한 시계들과 상관없이
 
그들의 인생도 한국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인생과 별로 다를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계 이야기는 결국은 시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들 창조하고 만들고 판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계이야기가 시계를 떠나 그 시계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변하게 되었을 때
 
차갑고 복잡하고 난해해 보이는 시계들은 인생 선배들의 한 때 화려했었으나 절망으로 끝이났던
 
고단한 인생살이에 대한 이야기들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 많은 명문가문들이 거의 모두 절망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입니다.
 
 
 
브랜드의 흥망이란 것이 인생의 종말이 죽음인 것과 어쩌면 그렇게 닮아 있는 것인지....
 
시계 이야기도 결국 죽음으로 마무리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시계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와 접하는 순간이야 말로
 
처음에는 뭔가 특별한 지식들로 가득해 보이던 시계라는 숨겨진 세상이 나의 인생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순간이며 어느덧 나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순간을 경험하고 나면, 난해해 보이는 시계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시계를 만드는 세계에 살았던 사람들의 화려한 시절, 고단한 계절, 그리고 몰락의 세월들.... 
 
 
 
5. 숨겨진 시계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나만의 긴 여행
 
 
 
 
시계 초보 매니아들이 궁금해 하고 흥미를 느끼는 것은 브랜드의 인지도며 내재적 가치 혹은 등급 이야기일 것입니다.
 
파텍 필립이 번쩍번쩍하게 피니싱한 스위스 최고급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금통이 기본인 시계이며
 
스텐레스 기반의 필드 와치 수준인 롤렉스 보다 좋은 시계고 따라서 조금 더 비싼 값을 지불하고 구입해도 되며....
 
비슷한 필드와치로 보이지만 롤렉스는 튼튼하고 정확한 COC인증 수준의 자사 무브먼트를 사용하므로
 
ETA를 베이스로 하는 오메가나 브라이틀링 보다 좋은 시계이고 중고 판매가도 높아서 구입후 처분할 때
 
가슴이 덜 아프며며.....
 
해밀턴이나 티솟, 세이코는 실제적인 품질에서는 IWC나 율리스 나르당에 비해 별 손색이 없는 가격대비 품질이 짱인 시계....
 
그러나, 시계에 대해서는 롤렉스와 오메가, 까르티에 정도를 제외하고는
 
만원짜리 쿼츠 시계 수준으로 생각하는 일반인들에게 먹어주는 시계는 보석 장식된 카르티에나
 
금통 롤렉스라는 것....
 
적은 돈으로는 엠포리오 알마니나 펜디 혹은 구찌의 브랜드가 먹어주는 시계들이므로
 
괜히 돈 낭비하지 말고 이런 시계나 구입해서 차고 다니는 것이 폼날거라는 치기어린 고수들의 충고나
 
자기로서는 도무지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는 페라리나 포르쉐급 고가 시계들을 소유하고 있는 컬렉터들의
 
시계 사진 같은 것들이 매력적인 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한 3 년 동안 지루하게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계속 재미있을까요???
 
링고의 시계 탐험은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는 분들에게는 길고 지루한 글들일 뿐입니다.
 
시계탐험을 통해 링고가 매니아님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몇 가지의 기본 장비를 가지고
 
시계의 현재와 역사 속으로 당신만을 위한 배낭 여행을 떠나 보라는 것입니다.
 
이 여행은 회사에 장기 휴가를 내고 비행기 티켓이며 호텔을 예약하는 큰 돈이 드는 여행이 아닙니다.
 
이 여행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당신의 꾸준한 흥미와 여가 시간들입니다.
 
이미 다른 매니아들이 탐험한 경험담을 듣고 고개만 끄떡이기 보다는
 
다른 매니아들이 시도했던 탐험지를 재방문해서 나의 눈으로 직접 구경하고....
 
나아가 아직 그들이 가보지 못한 더 매력적인 모험들이 도사리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
 
답답하고 고단한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나긴 여행을 시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링고는 시계 매니아로서 생활하는 동안 구입한 시계는 많지 않지만 대신에 수 많은 파일들을 만들었습니다.....
 
"IWC 마크시리즈", "IWC 포르투기즈 시리즈", "파텍 필립 투루비용", "바쉐론 콘스탄틴 리피터".....
 
"발레 드 쥬 자료", "밸쥬", "비너스", "필립 듀포", "프랑소와 폴 쥬른", "비아니 홀터"
 
"롤렉스 무브먼트", "파텍 필립 무브먼트" 등등....
 
오늘 들려드린 이야기는 링고의 "발레 드 쥬 자료" 파일중 "루이 오데마 이야기"라는 파일에 모여 있던 자료들을
 
바탕으로 단 하룻밤(사실은 새벽 6 시간) 동안 글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의 글을 마무리하는 것 보다 빠르게 새로운 파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러개의 CD며 저장장치,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 등에는 이미 수 천개가 넘는 파일이 있지만....
 
링고가  그 파일들을 글로 옮긴 것은 그 중 100 개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링고로 하여금 파일을 만들게 했던 "마무리 하고 싶은 여행과 언젠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결국
 
모두 완성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부족한 것은 이제 그 엄청난 양의 파일들을 글로 옮길 시간입니다.
 
 
여행을 많이 하신 분들이라면
 
"세상에는 아직 가 보지 못한 곳,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여행을 하면 할 수록 늘어난다는 것"에 동의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시계에 대해 멋진 글을 쓰고 싶은 데 마땅한 자료가 없다는 분들은
 
오늘부터 나의 관심이 가는 구체적인 이름을 파일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파네라이", "파네라이 무브먼트", "파네라이 빈티지"
 
"롤렉스 역사", "롤렉스 섭마리너", "롤렉스 GMT" 등등.....
 
한 2-3년 시계 매니아 생활을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그런 파일들이 무수하게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항해하며 우연히 새로 발견하게 되는 자료들을 기존의 파일들에 계속 추가해 나갑니다....
 
어느날, 여러분들은 새로운 자료 하나를 추가하면서 그 파일들에 모아져 있는 사진들과
 
글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말해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충동과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동안 준비한 자료들로 진짜 여행을 시작할 순간인 것입니다.
 
여행지를 정하고(파일 만들기), 여행지의 정보를 미리 읽고(자료 읽기), 머리 속에 공상을 하다가...
 
공항으로 출발하면서(글 쓰기 시작) 이제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입을 여는 순간, 컴퓨터 자판에 손을 올려놓는 순간....
 
그 수 많은 자료더미로부터 하나의 이야기가 당신의 입이나 손을 통해 터져나올 것입니다.
 
당신의 머리 속에는 당신이 상상하던 여행지의 모습들이 하나, 둘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 지나갑니다.
 
이제 여행기를 눈에 보이는 데로 혹은 나를 감동시킨 부분을 조금 상세히 써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할 일은 그 이야기들이 천천히 되도록 흥미진진하도록 배치하고 다시 읽으며 오타를 수정하고
 
표현을 매끄럽게 다듬고....
 
읽는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당신의 파일에 보관되어 있는 사진 몇 장을 솜씨 있게 배치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다른 파일들의 사진과 자료들을 연결한다면
 
보다 매력적인 글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는 당신이 가진 파일들이 늘어날 수록 조금씩 길어지게 될 것입니다.
 
함께 이야기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그 수 많은 파일들로부터 영감처럼 떠오를 것입니다....
 
할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서라기 보다는 더 이상 이야기하기엔 너무 졸리기 시작하므로....
 
당신은 링고처럼 이제 자러갈 것입니다....
 
내일쯤....
 
글들 사이에 멋진 사진 몇 장 더 추가하기로 다짐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여러분들이 쓰게 될 수 많은 탐험담들이 시계탐험의 미래 이야기들을 구성하게 될 것입니다.
 
링고가 과거 Watch 119의 "링고의 시계이야기", "링고랜드" 및 타임포럼의 컬럼을 통해 지난 몇 년간
 
이야기 해온 시계 탐험담의 미래는 여러분들이 쓰실 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며
 
링고의 시계이야기들은 그 미래의 풍성한 탐험담들의 작은 시작일 뿐인 것입니다.
 
 
 
 
2007년 7월 15일 새벽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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